성령이 내 안에서 일하시고 주님의 은사를 받았겠지만 내가 받은 은사를 잘 분별하고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님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 겸손히 사용할 수 있는 모습이 되길 소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1:17-34, 사도행전 1-3)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오순절 사건 직후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칭송받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만찬의 자리에서조차 가난하고 약한 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너진 모습을 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심에도 그 인도하심에 깨어있지 않을 때 구약의 백성들처럼 우리의 연약함이 얼마나 쉽게 바닥을 드러내는지 깨닫습니다. 내 안의 육체의 소욕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찬의 은혜는 누리고 싶은데 구약에서부터 그렇게 강조했던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배려하라는 말씀은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모두 하나를 이루셨는데 우리가 세상이 정한 기준과 계급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꼭 돈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라도 내 안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했던 모습을 회개하고 나의 모든 일을 주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자가 되자.
성찬의 참 의미를 기억하며 내 안에 남아 있는 차별과 편견, 내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했던 잘못된 생각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변화되길 소망합니다.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정 안에서나 교회에서, 직장에서 또는 거리를 걷는 일상에서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분열시키는 사람이 아닌 하나되게 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가지려고 애쓰는 모습을 버리고 더 나누려고 애쓰는, 배려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그라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바울이 서로 살피고 함께먹기위해 기다리라고 한 이유는 빵보다 사람이 먼저이기때문인데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하며 공동체 구성원과 주변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기다림을 실천하는 삶으로 바뀌길 소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1:2-16, 빌립보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영적 질서와 권위를 묵상하며 이것이 우리를 통제하기 위함이 아님을 봅니다. 오히려 빌립보서의 권면처럼 서로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함께 나아가도록 돕는 은혜로운 도구가 됨을 봅니다. 주님께서 가정과 교회에 세우신 이 거룩한 질서를 존중하며 그 질서 안에서 서로를 온전히 세워주고 하나 됨을 이루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미지나 기대감이 있다. 그것을 지켜주는 것도 어쩌면 이웃 사랑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예수님을 본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단정치 못하게 옷 입고 다닌다면 그 모습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볼 수 있겠나.. 앞선 본문들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할 자유가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웃을 넘어지게 한다면 절제하는 것이 옳다. 나의 먹고 마시고 옷을 입는 모는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자가 되자.
고린도전서 11:16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해석이 갈릴때 참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판단할때가 많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적인 문제 앞에서 많이 느끼곤 합니다. 그럴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바울의 조언대로 그런 논쟁하는 풍습 자체가 어쩌면 문제일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움으로 다른 의견을 더 존중할 줄 아는 제가 되길 기도합니다.
지나온 묵상과 신앙적 담론들 속에서 오늘에서야 이 고린도전서 11장의 답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는 바로 균형(均衡)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전적 의미로 균형은 저울로 비교를 할 때 어느 곳 한 곳에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이라는 잣대와 저울로 그 규율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하루가 우리가 되길 소망해본다.
(고린도전서 10:14-11:1, 골로새서, 빌레몬서)
모든 것이 가하나 남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라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빌레몬에게 하는 바울의 부탁에서도 나타납니다. 노예 오네시모를 처벌할 법적 권리를 내려놓고 그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는 제 삶에 참 많은 도전을 줍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 안에서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그 자유를 내가 성취한 것, 혹은 내 것이라 생각하는 교만을 버리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자유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울과 같이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비랍니다. 가족에게 가장으로써 본이 되지 못했던 지난 모습들이 마구 떠올라 회개합니다. 아내와 아이에게 내가 살지 못했던 삶을 강요하고 스스로에게만 관대하였던 지난 날들을 뉘우칩니다. 앞으로는 더욱 주님의 사랑으로 아내와 아이를 바라볼 수 있길 소망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유익케 하는 단 한가지라도 매일 실천해야겠습니다.
절제는 희생이 아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다. 내가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이웃을 위해 절제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령이 이를 통해 열매 맺게 된다. 단순히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나의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며, 연약한 이웃을 위해 나의 자유를 절제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사는 것은 나도 잘 되는 일이다. 나의 생각, 나의 유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참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 가족들을 챙기며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는 어느새 여유가 없어지고 불평이 싹트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저를 돌아보게됩니다. 내가 행하는 일이 타인의 유익이 되기를,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바울의 조언이 진하게 남아 마음을 파고든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거울처럼 역사를 훑는 말씀들 속에 이미 미쁘신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언어들이다.
감당할 것이 시험밖에 없음에도 그 시험에 허덕이는 내 자신을 회고하며, 말씀을 쏟아부으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9:24–10:13, 에베소서 4-6)
광야에서 큰 은혜를 누리고도 우상숭배와 원망으로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저의 연약함을 봅니다. 일상에 치여 살다 문득 돌아보면 용서받은 자의 모습과는 너무도 멀어져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분명 큰 기쁨이 있지만 승리를 위해 철저히 절제하는 운동선수나 영적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는 군사처럼 매일 내 자아를 쳐서 주님께 내어드리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달려갈 때 수많은 유혹이 찾아온다. 여기까지만 하자, 더 쉬운 길로 가고 싶은데 왜 나에게만 이렇게 힘든 길을 주시지?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과 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예비하신 길을 끝까지 가게 하실 것이고 넘어질 즘에는 다른 길로 인도하시더라도 끝까지 완주하게 하신다. 광야의 은혜에 만족하고 멈춰버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하신 큰 상급을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주의 길을 완주하는 자가 되자.
(고린도전서 9:1-23, 에베소서 1-3)
절대적이고 흔들림 없는 구원의 확신 하에서도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낮은 자로 여기며 복음을 위해 모든 권리를 포기합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구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이지만 나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은 아님을 생각합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영적인 나태나 방종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자유 안에서 기꺼이 종이 되어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했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나오지 않아 힘들어 했던 날들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내 기쁨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낮아지는 것이 은혜인 줄 믿는다. 시편의 말씀처럼 자원하는 마음을 구하고, 주님의 일을 감사함으로 행하는 자가 되자.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권리와 자유를 내려 놓았고 예수님은 날 살리기 위해 하늘 보좌 버리시고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한없이 크신 그 은혜를 자격 없는 내게 거저 주셨다. 하지만 내 지난 삶을 돌아볼때 난 항상 반대의 삶을 살아왔음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난 어떻게든 내 권리를 찾으려 애쓰고, 내 자유를 빼앗길까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왔다. 영혼을 위해 희생하기는 커녕 두 손을 꽉 진채 살아온 내 모습을 회개하며 이제는 나도 주를 위해 낮아지고 희생하며 내게 맡기신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고린도전서 8:1-13, 누가복음 23-24)
바울의 말처럼 지식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데 탁월하지만 결국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하고 세우는 것은 사랑임을 봅니다. 누가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건을 피상적으로만 알았을 뿐 그 희생의 본질에는 무지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제자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르치시고 뜨거운 마음을 심어주신 예수님을 봅니다. 어느 공동체에 있든 지식을 뽐내며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함께 걸어가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