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지도자들이 모두 죽자 신앙이 사라져버린 이스라엘을 보며 하나님과 대면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봅니다. 내 삶에도 신앙을 이끌어 준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결국 중요한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임을 묵상합니다. 또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는 말씀을 묵상하며 신앙을 승계하고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은혜를 배풀어 주신 하나님을 자녀에게 더욱 힘써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내가 원하는 대로 그냥 죄에 내버려두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심지어 나는 내 멋대로 하게 해주겠다는 주님께 왜 나를 구하지 않냐고 원망만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어이없겠나.. 회개는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다. 하물며 사람끼리도 미안하다고 느끼면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너무 가벼히 여기고 있었다. 회개는 순간의 감정 노동이 아니라 진정한 돌이킴이다. 죄를 단호히 끊어내고 거절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말로만 반복되는 회개가 아닌 행동으로 변화되는 자가 되자.
힘들 때는 누구나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본문 속 이스라엘은 수많은 통곡에도 불구하고 삶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돌이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극적인 결과로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태만은 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전하지 못하는 영적 단절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돌이키는 삶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제가되길 소망합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 남겨둔 편법과 욕심이 도리어 저를 영적으로 고립시킵니다. 단 지파가 가나안을 부리려다 산지에 갇혀버린 것처럼 인간의 지혜로는 죄를 길들일 수 없음을 봅니다. 오늘도 죄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완전한 죽으심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것이 결국 훗날에는 각종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끊어내지 못하고 타협한 작은 죄악이 불어나서 결국 나를 망치게 하는 큰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지난주 설교 말씀처럼 결국 변명과 합리화가 불순종의 대가를 치루게 되는 씨앗임을 기억합니다. 내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뜻과 합하였는지를 말씀으로 겸손히 점검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고, 어울리려 살고, 혹은 부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나의 눈으로 힘들어 보여 멈추거나, 혹은 당장의 이득이 되는 것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제가 하는 선택들이 주님의 뜻에 합치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고 그 땅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이제 주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내 몫이다.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져 살 수 없다. 죄가 가득한 땅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 나의 상황에 맞춰 말씀을 조금씩 수정해서 적용하지 말자. 내가 한 타협은 반드시 또 다른 죄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죄와 타협하면 내가 다스려야 하는 죄가 나를 다스리게 된다. 타협의 유혹을 이겨내는 승리의 하루를 보내길 소망한다.
본문 속 이스라엘은 쫓아내야 할 이방 족속을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남겨둡니다. 하나님이 없애라고 하신 것을 타협하여 남기는 것은 융통성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상황이 아닌 의지의 문제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내가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삶에 남겨둔 영역은 무엇인지 깊이 되돌아보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멈춰섬과 타협을 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철병거 때문에 멈춰서기도 하고, 일부 사람들은 쫓아 내지 못한 채 함께 살게 됩니다. 전체적으로는 잘 해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작아 보이지만 분명한 문제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는 모습을 봅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얼마나 많이 멈추어섰는지, 얼마나 많이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를 합리화 했는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내일은 작은 부분까지 순종으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나이도, 성별도, 이방인인 것도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문제가 없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나의 믿음이지 능력이 아니다. 능력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승리를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에게 더 나아가라고 하시는데 내가 여기까지만 가겠다 선을 그어버리면 그것은 만족이 아니라 타협이다. 자꾸 눈 앞의 현실을 크게 생각하지 말고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내가 보는 거인과 철병거는 나를 주저앉히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신뢰하라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나아가 온전한 기업을 누리는 자가 되길 소망한다.
삿 1: 21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자손과 함께 살고 있다.
본문을 묵상하며 내 영적신앙의 상태가 교차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죄의 습성을 끊어내지 못한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모습과 같습니다. 불순종으로 쫓아내지 못한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의 세대에까지 반복적으로 발목을 잡는 모습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악사는 물이 부족한 땅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기 위해 믿음으로 필요한것을 구했습니다. 반면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철병거가 더 크게보여서 타협을 하고 살아가게됩니다. 믿음과 타협의 갈림길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 내앞의 철병거 앞에서 멈춰서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철병거보다 크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멈춰 선 그 자리를 기도의 기회로 삼아서 악사처럼 하나님께 은혜의 샘을 구하며 담대히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가나안 정복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맞이한 여호수아의 죽음은 백성들에게 단순한 리더십의 부재를 넘어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위기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현실에 타협하며 정착할 만한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가장 먼저 하나님께 뜻을 여쭙고 나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이 인상깊습니다.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고 해서 주님이 주신 원래의 목적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고 약속하신 그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본래 순탄치 않음을 보게됩니다.
비록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곁에 없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하나님은 예정된 승리를 주십니다. 지금은 분에 넘치게 감사한 분들께 배우고, 여쭙습니다만 혼자가 된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뜨거울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종종 듭니다. 홀로 있게 될지라도 주님만을 바라보는 제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시작하면 일을 행하기 전부터 나에게 승리를 약속하신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해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방법으로 더 큰 욕심을 내는 것은 경계하자. 하나님께 기도로 시작했다면 일을 행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공의롭게 행하며 죄와 타협하지는 않되 사랑과 온유로 일하는 자가 되자. 오늘부터 9월이 시작된다. 하나님께 나의 삶을 온전히 맡겨드리며 일을 시작하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하나님 안에서 시작과 끝이 동일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새 달이 되길 소망한다.
여호수아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진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방향을 물었습니다. 저 역시 과거 목회자를 의지하던 시행착오를 통해, 오직 영원한 분은 주님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중요한 결정 앞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응답을 구하며, 유다와 시므온 지파처럼 믿음의 동역자들과 연합하길 원합니다. 삶을 나누고 중보하며 선한 일을 도모하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저부터 먼저 기도하며 노력하겠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 뒤 유다 지파가 바로 하나님께 여쭘으로 순종을 나타냅니다.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불순종의 모습으로 시므온 지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간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제 모습도 다르지 않음에 회개합니다. 주님 한분만 의지하면 되는데 자꾸만 세상의 방법과 도움을 구하려 애씁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에서 벗어날 가장 합리적인 해답이 바벨론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저라도 그 사절단을 환대하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자랑스레 내보였을 것 같습니다. 내 안의 교만과 욕심을 포장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답변인양 섣불리 일을 저질러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옳으시고 저는 늘 같은 실수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자세를 잃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바로 나아갔던 히스기야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본래 성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나 또한 위기때만 하나님을 찾기에 급급했던 날들이 떠올라 당혹스럽습니다. 내 삶을 평탄하게 인도하실 때에 오히려 더 주님을 붙들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함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던 삶을 돌아봅니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뤄야 하는데 히스기야 때처럼 그 대가를 만약 내 후손이 치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주님께 묻고 또 묻는 인생으로 거듭나길 기도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잊을 때가 많다. 하나님은 언제와 나와 함께 계심을 명심하자. 의식적으로라도 하나님을 찾고 주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자. 모든 일이 다 잘 풀린다고 그것을 은혜라고 착각하고 멋대로 넘어가지 말고 이것이 화친을 가장한 또 다른 위기인지, 그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는 자가 되자. 나의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길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나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며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길 소망한다.
히스기야는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상황이 좋아지자 바벨론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 대신 자신의 보물과 무기를 자랑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아이와 둘이 있을 때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는데, 대만에 와서 가족이 함께지내니 예전만큼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또한 주님의 일하심보다 내 자녀와 소유를 자랑하진 않았는지, 내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저의 삶 속에서 오직 주님만 온전히 의지하길 기도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히스기야는 먼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 귀감이 됩니다. 그의 삶을 통틀어 신앙의 습관이 매우 바람직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온전하게 서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땅에서 그애게 맡기신 직분은 왕이었지만 그 마음의 왕좌는 언제나 하나님께 내어드렸음을 봅니다. 이런 삶을 살아내기란 정말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묵상하며 다짐해 보지만 매일같이 무너집니다. 기도를 소홀히 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히스기야처럼 언제나 먼저 주님께 아뢰는 모습으로 거듭나길 기도합니다.
내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님이 나에게 새로운 하루를 주시는 것은 내 맘대로 살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요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나누는 삶을 살라고 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내게 새 하루를 주셨다. 먼저 주님이 주신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자. 또 오늘 주일 예배에 나아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들과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 오늘 하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의 시간을 보내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