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번 주 설교

    2026년 8월 30일 일요일

    📖 사무엘상 27:1-7

    다윗의 핍박과 환란

    골리앗을 이긴 다윗은 그날부터 십 년이 넘도록 도망자로 살았다. 사울의 시기로 왕궁에서 쫓겨났고, 놉에서는 자신이 쓰러뜨린 거인의 칼을 생존을 위해 다시 손에 쥐었으며, 가드에서는 미친 척 침을 흘리며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 유랑의 시작인 아둘람 굴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사백 명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상황을 바꾸지 않으시고, 그 상황 속으로 그와 똑같이 무너진 사람들을 보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 방식이다. 십 년의 도망 끝에 다윗은 지쳤다. 27장 1절은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이라고 기록한다. 앞선 장들에서 묻고 또 묻던 그가 이제는 묻지 않는다. 지치면 기도가 결정 앞에 오지 않고 결정 뒤에 온다. 그는 육백 명과 그 가족을 데리고 원수의 땅으로 들어가 시글락에서 일 년 사 개월을 살았고, 아기스에게 거짓으로 보고하며 이중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값이 따랐다. 동족을 치는 군대에 편성될 뻔했고, 성읍은 불탔으며, 아내와 부하들의 신뢰까지 잃었다. 묻지 않은 결정은 언젠가 청구서를 보내온다. 그러나 바로 그 바닥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고, 에봇을 가져오게 하여 다시 하나님께 물었다. 27장에서 사라졌던 그 문장이 30장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방향은 잃지 않았다. 역대상 12장은 같은 시글락을 다른 눈으로 기록한다.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들이 왔고, 갓 지파 용사들은 요단강이 넘칠 때 목숨을 걸고 건너왔으며, 날마다 사람이 모여 마침내 하나님의 군대와 같이 되었다. 아둘람의 무너진 사백 명의 파선된 사람들이 시글락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이다. 사울에게는 왕좌와 왕궁과 정예 삼천 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를 떠났고, 다윗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사람은 자리를 보고 오지 않고 사람을 보고 온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반듯할 때만 일하지 않으신다. 다윗이 훗날 돌아보며 한숨 쉬었을 그 부끄러운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왕의 군대를 만들고 계셨다. 타협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실수가 하나님의 손을 묶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의 위로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戰勝歌利亞之後,大衛從那天起,展開了長達十餘年的逃亡生涯。因掃羅的嫉妒,他被逐出王宮;在挪伯,他為了生存,再次拿起自己曾經擊殺巨人的那把刀;到了迦特,他甚至假裝瘋癲、口流唾沫,才勉強保住性命。在這段流亡的起點——亞杜蘭洞,神所差遣來到他身邊的人,竟是那些受患難的、欠債的、心中苦惱的四百人。神並沒有立刻改變大衛的處境,反而把與他一樣破碎的人帶到他身旁。這正是神安慰的方式。 十年的逃亡,使大衛疲憊不堪。撒母耳記上27章1節記載:「大衛心裡說……」。前面的經文中,他一次又一次尋求神的旨意;然而到了這裡,他不再求問。當人疲憊時,禱告往往不再走在決定之前,而是在決定之後才出現。於是,大衛帶著六百名部下及他們的家眷,投奔仇敵之地,在洗革拉住了一年四個月,並向亞吉王謊報軍情,過著雙重生活。然而,這樣的選擇終究付出了代價:他差一點被編入攻打自己同胞的軍隊;自己的城邑被燒毀;甚至連妻子和部下對他的信任也幾乎失去。凡是不曾求問神而作出的決定,終有一天都會收到它的代價。 然而,就在跌到人生谷底的時候,大衛因耶和華重新得力,恢復了勇氣。他吩咐人把以弗得拿來,再一次來到神面前求問。第27章消失的那一句話,在第30章再次出現。大衛並不完美,但他沒有失去生命的方向。歷代志上第12章則用另一個角度記載同一段洗革拉時期:原本屬於掃羅支派的便雅憫人來投奔他;迦得支派的勇士冒著約旦河氾濫的危險渡河前來;並且天天都有人加入,最後形成了一支如同神軍隊一般的大軍。亞杜蘭洞中那四百個破碎的人,最終在洗革拉成為了神的軍隊。 掃羅擁有王位、王宮,以及三千精銳士兵,然而人們卻一個個離開他;大衛起初一無所有,卻天天有人聚集到他身邊。人不是因著地位而來,而是因著一個人的生命而來。神並非只有在我們信心剛強、生命端正時才工作。即使是在大衛日後回想起來、或許會感到羞愧與嘆息的那段歲月中,神仍然默默地建立屬祂的王將軍隊。這並不是說妥協是對的,而是提醒我們:人的失敗,並不能攔阻神的工作。這正是今天帶給我們的安慰。</summary_zh> </invoke>

    최근 설교

    2026년 8월 23일 일요일

    📖 요한복음 20:19-23

    선교적 교회로의 부르심

    선교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는 선교적 교회의 심장이다. '보내셨다'는 완료 시제로, 예수님은 지금도 보냄받은 상태에 계신다. 우리가 그분의 사명을 대신 잇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교가 우리를 통해 계속된다. 첫째 에토스는 사랑의 공동체다. 두려움에 빗장을 건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들어오셔서 먼저 평강을 주신다. 무덤의 돌도 그분을 가두지 못했으니 두려움의 빗장도 그분을 막지 못한다. 주님은 그들의 실패를 원망하지 않으시고 관계의 회복부터 시작하신다. 파송과 하나됨은 같은 기도 안에 있으며(17:18, 21), 그 하나됨의 목적은 세상이 믿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이 복음을 믿는 통로는 뛰어난 논증 이전에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다. 둘째 에토스는 십자가다. 주님은 못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로 자신을 확인시키신다. 부활은 십자가를 지우지 않았고, 영광의 몸에 남은 상처는 우연이 아니라 선언이다. '보내신 것 같이'(카도스)는 사명의 방식까지 포함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성육신과 순종과 십자가로 보내셨듯, 파송받은 우리도 그 길을 간다. 십자가는 믿는 내용의 일부가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이다. 내가 감추려는 그 상처가 상처 입은 이웃에게 하나님이 말 거시는 통로가 된다. 셋째 에토스는 재창조하시는 성령님이다. 주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신다. '엠퓌사오'는 창세기 2:7과 에스겔 37:9를 잇는 재창조의 언어다.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은 조직 재정비가 아니라, 흙덩이에 생기가 들어가고 마른 뼈에 살이 붙는 사건이다. 성령님이 먼저 증언하시고 우리가 함께 증언한다.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파송도 회의가 아니라 예배의 결과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성령님께 민감한 공동체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宣教是從神的屬性流露出來的。「父怎樣差遣了我,我也照樣差遣你們。」(21節)這是宣教型教會的核心。「差遣了」使用完成式,表示耶穌如今仍然處在被差遣的狀態中。不是我們接續祂的使命,而是祂的宣教藉著我們繼續進行。 第一種核心精神,是彼此相愛的群體。復活的主來到因害怕而把門鎖上的門徒中間,首先賜給他們平安。連墳墓的石頭都不能困住祂,因此恐懼所上的門閂也不能攔阻祂。主沒有責怪他們的失敗,而是先從恢復關係開始。差遣與合而為一是在同一個禱告中出現的(17:18、21),而合一的目的,是要使世人相信。世人相信福音的途徑,在卓越的論證之前,是一個彼此相愛的群體。 第二種核心精神,是十字架。主以有釘痕的手和被槍刺過的肋旁來表明自己的身分。復活並沒有抹去十字架,榮耀的身上所留下的傷痕不是偶然,而是一個宣告。「照樣」(καθώς, kathōs)也包含了使命的方式。父怎樣以道成肉身、順服和十字架差遣祂的兒子,被差遣的我們也要走同樣的道路。十字架不是我們所相信內容的一部分,而是我們存在的方式。我一直想隱藏的那個傷口,會成為神向受傷的鄰舍說話的管道。 第三種核心精神,是重新創造的聖靈。主向他們吹氣,把聖靈賜給他們。「έμφυσάω(emphysaō)」是連結創世記2:7和以西結書37:9的重新創造之語。教會的更新,不是重新調整組織,而是生命氣息進入泥土、血肉長在枯骨上的事件。聖靈先作見證,我們也與祂一同作見證。安提阿教會差派宣教士,也不是會議的結果,而是敬拜的結果。我們所需要的,不是更優秀的人,而是一個對走在前面的聖靈敏銳的群體。</summary_zh>

    2026년 8월 16일 일요일

    📖 사무엘상 16-17장

    시냇가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블레셋 진영에서는 삼 미터에 가까운 거인 골리앗이 사십 일 동안 나와 이스라엘을 모욕하였고,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크게 두려워하며 진영에 숨어 떨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양쪽 군대 모두에게 훤히 노출된 골짜기 한복판 시냇가에서 한 소년이 평안한 얼굴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고르고 있었다. 이 장면을 정지시켜 보면 세 사람이 보인다. 승리를 확신하며 큰소리치는 거인 골리앗, 패배를 두려워하며 숨어 있는 세미거인 사울, 그리고 그 한가운데 고요히 서 있는 소년 다윗이다. 우리는 살면서 입시, 사업의 경쟁자, 진급, 죄악과 탐욕 같은 수많은 골리앗을 만난다. 그때 사울처럼 자기 갑옷을 입혀 주려는 손길들이 다가온다. 사울의 갑옷은 원래 골리앗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사울 자신이 입고 내려갔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서지 않을 자리에 다윗을 세우며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것을 입혔다. 이처럼 세상의 방법과 상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도움 아닌 도움들이 믿음의 시력을 흐리게 한다. 그날 다윗도, 사울도, 이스라엘도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한쪽은 떨면서 숨어 승리를 구경했고, 한쪽은 평안히 서서 승리를 살아냈다. 다윗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곳에 함께 계신 하나님이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으러 가는 자리라 여긴 그 시냇가가 다윗에게는 원수의 목전에서 여호와께서 차려 주신 상이었다. 폭포 곁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로빈새처럼,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과 기준으로 세상을 보며 평안을 누리는 자리, 그 시냇가에 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부름이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非利士與以色列在以拉谷兩軍對峙。非利士陣營中,身高近三米的巨人歌利亞連續四十天出來羞辱以色列,掃羅和全以色列都極其懼怕,躲在營中戰兢不已。然而就在此時,兩軍都能看得一清二楚的谷中溪邊,一個少年正神情安然地挑選著五塊光滑的石頭。若將這個畫面定格,會看見三個人:確信必勝、口出狂言的巨人歌利亞;懼怕失敗、躲藏起來的「半個巨人」掃羅;以及靜靜站立在兩者中間的少年大衛。 我們一生中也會遇見無數個歌利亞——升學、事業上的競爭者、升遷、罪惡與貪婪。就在那時,會有人像掃羅一樣,伸手要為我們穿上他們的戰甲。掃羅的戰甲,原本應該是唯一能與歌利亞對抗的掃羅自己穿上、親自下場的裝備。他卻把大衛安放在一個不屬於他的位置上,用「幫助」之名,把自己的東西套在大衛身上。同樣地,那些用世上的方法與常識,想要把我們的信心「正常化」的、看似幫助卻並非真幫助的手,也會使我們信心的視力變得模糊。 那一天,大衛、掃羅、以色列都得了勝利。然而一方是戰兢躲藏著觀看勝利,另一方是安然站立著活出勝利。大衛之所以能夠坦然無懼,並不是因為環境,而是因為他看見了那位與他同在的神。眾人都以為是赴死之地的那條溪邊,對大衛而言,卻是耶和華在仇敵面前為他擺設的筵席。如同瀑布旁也不為所動的知更鳥一般,不以世上的標準、而以神的眼光與標準來看世界、享受平安的地方——站立在那條溪邊,正是賜給我們的呼召。</summary_zh> </invoke>

    2026년 8월 9일 일요일

    📖 사무엘상 13-31

    사울의 패망

    오늘 본문은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그냥 두시는가"라는 신정론의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억지로 순종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계속 말씀하시며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동시에 거부할 자유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바로 그 자유 앞에서 반복해서 잘못된 길을 택한 인물입니다. 첫 번째 균열(13장)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린 조급함이었습니다. 문제는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 권위로 인정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균열(15장)은 아말렉 진멸 명령에 불순종하고, 지적받자 회개 대신 백성 탓으로 돌리는 변명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선언에도 사울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백성 앞에서의 체면이었습니다. 세 번째 균열(18장)은 다윗을 향한 백성의 칭송에서 비롯된 시기심이었고, 이 시기심을 통해 악한 영이 그를 덮쳤습니다. 24장 엔게디 동굴에서는 다윗의 관용 앞에 잠깐 눈물을 흘리고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그 뉘우침은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균열(28장)에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자 자신이 금지했던 신접한 여인을 몰래 찾아갔고, 얻은 답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불순종의 결과였을 뿐입니다. 결국 31장에서 사울은 세 아들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를 버리기로 하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 돌이킬 문을 열어 놓으셨지만, 사울은 매번 회개 대신 변명을, 순종 대신 자기 판단을 택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완전해서가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철저히 하나님께 돌이켰기에 그 결말이 갈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오늘 하나님 안에 있는가"를 늘 확인하는 삶입니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今天的經文從神義論的提問出發:「良善的上帝為何容許惡存在?」上帝並未將人造成被迫順服的機器人,而是不斷說話、給予回轉的機會。但這自由同時也意味著可以選擇拒絕。掃羅正是在這樣的自由面前,一再選擇了錯誤的道路。 第一道裂痕(13章)是因無法等候撒母耳而自行獻祭的急躁。問題不在於缺乏武器,而在於內心無法承認上帝為最高權威。第二道裂痕(15章)是違背滅盡亞瑪力人的命令,被指責時不悔改,反而將過錯推給百姓。儘管撒母耳宣告「順服勝於獻祭」,掃羅在意的並非與上帝關係的恢復,而是在百姓面前的顏面。 第三道裂痕(18章)源自百姓對大衛的讚美所引發的嫉妒,惡靈正是藉此臨到他身上。24章隱基底洞中,面對大衛的寬容,掃羅雖一度落淚、誠實面對自己,卻未能真正改變生命。最後的裂痕(28章)是在上帝靜默之時,他偷偷去找自己曾下令驅逐的交鬼婦人,得到的答案不過是早已聽過卻不順服的話語重複。 最終在31章,掃羅目睹三子陣亡後自盡,屍身被釘在伯善城牆上。然而這並非上帝從起初就定意棄絕他的故事——上帝多次為他敞開回轉之門,但掃羅每次都以辯解代替悔改、以自己的判斷代替順服。相對地,大衛並非完全人,卻在每次失敗後徹底回轉向上帝,這差異決定了兩人截然不同的結局。結論在於:我們當持續省察「我今天是否活在上帝裡面」。</summary_zh> </invoke>

    2026년 8월 2일 일요일

    📖 사무엘상 9:2-11:15

    사울의 흥기

    사울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준수했고 키가 어깨 위만큼 더 컸으며,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새벽에 적진을 치는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라 말했다. 겸양의 말투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기브아 사건으로 베냐민은 육백 명만 남았던 지파였고, 그의 고향이 바로 그 기브아였다. 진짜 겸손은 아무것도 없는 자의 체념이 아니라, 가진 자가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미스바에서 제비가 그를 지목했을 때,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사람은 짐보따리 뒤에 숨어 있었다. 그를 찾아낸 것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부끄러워 물러앉은 그 자리까지 하나님의 손이 들어와 그를 붙들어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이유는 그의 자격이 아니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곧 백성을 향한 긍휼이었다. 자기를 크게 여기는 손은 이미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어 채울 수가 없다. 겸손은 자격이 아니라 그릇이다. 미스바는 본래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심판하려고 모였던 자리요, 딸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리였다. 그런데 같은 장소, 같은 제비뽑기로 이번에는 베냐민 사람이 왕으로 세워진다. 하나님은 상처가 가장 깊은 곳에서 답을 꺼내신 것이다. 그리고 세우신 뒤에 채우셨다. 새 마음을 주셨고, 감동된 사람들을 붙여 주셨고, 야베스 길르앗이라는 기회를 주셨다. 그곳은 일찍이 베냐민 지파를 다시 살려 준 마을이었으니, 받은 은혜를 이제 갚게 하신 것이다. 멸시하는 자들 앞에서 그는 잠잠했고, 왕으로 뽑힌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 밭을 갈았다. 승리한 날에도 자기를 멸시하던 자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영광을 여호와께 돌렸으며, 개선식 대신 화목제를 드렸다. 백성을 설득한 것은 족보도 웅변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 실제로 일하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자격 없음은 하나님이 친히 감당하신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掃羅並非一個無能的人。他是全以色列中最英俊的,身高比眾人高出一個頭,並且是一位能將兵力分為三路、在晨曦中突襲敵營的指揮官。然而,他卻稱自己是「最小的便雅憫支派的人」。這並非虛偽的客套,而是事實。因著基比亞事件,便雅憫支派當時只剩下六百人,而他的家鄉正是基比亞。真正的謙卑,不是一無所有之人的無奈自嘲,而是擁有者不以此作為自己的誇耀。 當在米斯巴用掣籤選出他時,全以色列身材最高大的人卻躲在器具行李後面。找到他的不是百姓,而是神。神的手伸進了他因羞怯而退縮的角落,將他扶持起來。神立他為王的理由,並非因為他的資格,而是「因為我民的呼求已經達到我面前」,也就是神對百姓的憐憫。自以為大的手,已經塞滿了自己的東西,無法再被填滿。謙卑不是資格,而是一個容器。 米斯巴原本是以色列人聚集要審判便雅憫人的地方,也是他們發誓絕不把女兒嫁給便雅憫人的地方。然而,在同一地點、同樣透過掣籤,這次卻選出了一位便雅憫人做王。神在傷痕最深之處拉出了答案。神先立了他,隨後填滿了他——賜給他一顆新心,感動眾人跟隨他,並給了他基列雅比這個機會。基列雅比曾是拯救便雅憫支派免於滅絕的村莊,神如今讓他去償還曾經受的恩典。 面對藐視他的人,他保持沈默;被選為王之後,他依然回到家中下田耕作。即使在戰勝的日子,他也阻止人們殺害那些曾藐視他的人,將榮耀歸給耶和華,並以平安祭代替了慶功宴。說服百姓的不是家譜,也不是雄辯,而是神親自透過這個人所成就的事實。當神立一個人時,缺乏資格的部分,神會親自承擔。</summary_z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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