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26년 10월 18일 일요일
📖 빌립보서 2:19-30
기쁨의 보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 바로 뒤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이야기를 둔다. 단순한 안부가 아니라 그 마음을 실제로 살아 낸 사람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일을 구할 때,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했다. 그 마음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연단으로 증명된 삶이었다. 이처럼 디모데는 남의 사정을 자기 사정으로 여긴 사람이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도, 바울이 키운 제자도 아닌 빌립보 교회의 평범한 성도였다. 그는 교회의 헌금을 들고 먼 길을 가서 바울을 섬기다가 병들어 죽을 뻔했다. 그런데도 자기 몸보다 고향 교회가 자기 때문에 걱정할 것을 더 염려했다. 바울은 그가 "죽기에 이르러도"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길을 평범한 성도가 따라 걸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평범한 우리의 삶에서도 다시 살아난다. 바울은 감옥에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이 두 사람을 빌립보 교회를 위해 보낸다. 자기 필요보다 교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보내는 사람도, 보냄 받는 사람도, 맞이하는 사람도 함께 기뻐한다. 바울은 병들어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를 모든 기쁨으로 맞이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한다. 세상은 결과를 낸 사람을 높이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긴 사람을 존귀히 여긴다. 그런 사람을 보내고 맞이하는 곳에 기쁨이 흐른다.
최근 설교
2026년 10월 11일 일요일
📖 빌립보서 2:12-18
기쁨의 행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구원을 내 힘으로 완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이루라'는 이미 가진 것을 끝까지 작동시켜 결과로 드러내라는 의미다. 결혼한 날부터 부부이지만 평생 서로 맞춰 살며 부부다워지듯, 이미 받은 구원을 삶으로 풀어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참여하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바울은 먼저 원망하지 말라고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는 구원을 경험했지만, 물이 없는 광야에서 곧 원망했다. 광야는 받은 구원을 날마다 살아 내야 하는 힘든 자리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도 구원의 감격이 있는 바닷가에 머물며 광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서 말씀을 배우고, 삶의 현장인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 그 길을 원망 없이 걸을 때,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서 별처럼 빛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원망 없이 걸을 수 있는가? 원망은 내 권리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나온다. 예수님은 가장 정당한 권리를 가지셨지만 그것을 쓰지 않고 자신을 낮추셨다. 그렇게 낮아진 사람에게는 원망할 거리가 없다. 바울은 그 낮아짐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믿음을 주된 제물로 높이고, 자신은 그 위에 부어지는 전제가 되어도 기뻐한다고 고백한다. 자녀의 졸업식에서 객석의 부모가 가장 기뻐하듯, 조연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세우는 자리에 참된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모두를 함께 기뻐하게 만든다.
2026년 9월 27일 일요일
📖 빌립보서 1:12-30
기쁨의 선택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다. 억울한 고소를 당했고, 재판은 계속 미뤄졌으며,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를 지키던 황제의 친위대가 복음을 들었고, 형제들은 더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 그를 괴롭히려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까지 있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형편은 더 나빠졌지만 기쁨의 이유가 그리스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쁨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나온다. 바울에게는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이었다.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하면서도,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남는 쪽을 택했다. 하늘 시민권은 이 땅에서 도망치는 표가 아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자신의 기쁨보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며 산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생활하라'는 '시민으로 살라'는 뜻이다. 로마 시민권을 자랑하던 '작은 로마' 빌립보 사람들에게 이제 하늘 시민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삶은 안으로는 한마음으로 굳게 서서 함께 협력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대적 앞에서 놀라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도 은혜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도 은혜다. 로마 시민권은 바울을 감옥까지 데려갔지만, 하늘 시민권은 그 감옥 안에서도 그를 기뻐하게 했다. 기뻐하려고 애쓰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먼저다. 그렇게 살 때 참된 기쁨이 찾아온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保羅是在羅馬的監獄中寫下這封信的。他遭受不公的控告,審判一再拖延,也不知道自己何時才能獲得釋放。然而,他卻說自己所遭遇的事,反而使福音更加興旺。看守他的皇帝親衛隊聽見了福音,弟兄們也因此更加放膽傳講神的話。甚至有人存著惡意傳福音,想藉此加重保羅的痛苦,但保羅仍然宣告:只要基督被傳開,他就為此歡喜,並且還要歡喜。環境雖然變得更加艱難,他卻仍能喜樂,因為他喜樂的理由已經轉向了基督。 第二個喜樂,出現在生與死的交界之中。對保羅而言,活著就是基督,死了也有益處。他雖然說,離世與基督同在是好得無比的,但為了腓立比信徒在信心上的長進與喜樂,他仍選擇留下。天上的公民身分並不是逃離這個世界的通行證。屬天的人,不只是為自己的喜樂而活,而是願意為了別人的喜樂獻上自己。 因此,保羅勸勉他們:「行事為人要與基督的福音相稱。」這裡的「行事為人」,原本帶有「以公民的身分生活」的意思。對那些以羅馬公民身分為榮、住在被稱為「小羅馬」的腓立比人而言,保羅如今呼召他們要以天國公民的身分生活。這樣的生活,對內是同心站立、彼此同工;對外則是在仇敵面前毫不驚慌、不退縮。相信基督是恩典,為基督受苦同樣也是恩典。 羅馬公民的身分曾使保羅一路走到監獄,但天國公民的身分,卻使他即使身在監獄中仍然能夠喜樂。並不是先努力讓自己喜樂,而是先活出與福音相稱的生命。當我們如此生活時,真正的喜樂便會臨到我們。</summary_zh> </invoke>
2026년 9월 20일 일요일
📖 빌립보서 1:1-11
기쁨의 기도
빌립보서 1:1–11은 로마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던 바울이 쓴 '기쁨의 서신'의 서문입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편지를 지배하는 정서는 원망이 아니라 기쁨이며, 그 기쁨의 샘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와 간수의 가정으로 눈물 속에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기도와 물질, 에바브로디도의 파송으로 바울을 끝까지 섬긴 동역자들이었고, 그래서 바울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고백으로 편지를 엽니다. 첫째, 복음 안에서 함께한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됩니다. 바울이 감사한 이유는 그들이 다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 '참여'가 코이노니아이며, 친목을 넘어 복음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삶을 나누는 거룩한 연대입니다. 나를 위해 말없이 기도해 준 이들을 떠올리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감사가 되는지 물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소망은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시작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울의 확신은 성도의 의지가 아니라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내가 너를 믿는다"보다 "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가 더 든든한 고백입니다. 목회자도 부모도 씨를 심고 물을 줄 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되 조급해하거나 사람을 쉽게 단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성도를 사모한 '심장'(스플랑크논)은 애가 끊는 듯한 그리스도의 연민이며, 복음은 사람을 보는 눈의 렌즈를 바꿉니다. 셋째, 사랑은 더 뜨거워지는 것만 아니라 더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때로는 곁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 때로는 아프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고, 의의 열매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힙니다. 시작도 성숙도 영광도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문제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떠올릴 때 감사가 솟고 서로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주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腓立比書1:1–11是保羅被囚於羅馬監牢、等候審判時所寫的「喜樂書信」的序言。在生死未卜的處境中,整封信的基調不是怨嘆,而是喜樂;而這喜樂的泉源不在環境,乃在「人」。腓立比教會是在呂底亞與禁卒一家的歸主中含淚建立的,他們以禱告、奉獻,並差派以巴弗提,始終如一地服事保羅,是他的同工夥伴。因此保羅不以嘆息開場,而是以「我每逢想念你們,就感謝我的神」作為信的開端。 第一,在福音裡同心的人,每一次想念都成為感謝。保羅感謝的原因,不是因為他們親切體貼,而是因為他們「從頭一天直到如今,都在福音上有份」。這裡的「有份」就是「團契」(koinonia),不只是彼此聯誼,而是為福音擺上時間、財物與生命的聖潔連結。讓我們回想那些默默為我們禱告的人,也自問:我是否也成為別人的感謝? 第二,我們的盼望不在人的熱心,而在那開始工作的神。保羅的確信不是建立在信徒的意志上,而是建立在神的信實上:「那在你們心裡動了善工的,必成全這工,直到耶穌基督的日子。」「我相信你」固然溫暖,但「我相信神在你裡面工作」更加堅固。牧者與父母只能栽種、澆灌,使人生長的乃是神。所以我們盡上本分,卻不焦急、不絕望,也不輕易論斷或放棄任何人。保羅思慕信徒的「心腸」(splanchnon)是如同腸子翻攪般的基督的憐憫,福音改變了我們看人的眼光。 第三,愛心不只要更火熱,更要懂得分辨。保羅祈求他們的愛心「在知識和各樣見識上多而又多」,因為有時靜靜陪伴等候才是愛,有時縱然心痛,說出真話才是愛。這樣的愛使人能分別是非、選擇至善,而仁義的果子不是人的功勞,乃是「靠著耶穌基督」結成的。起初、成長、榮耀,一切都歸給神。 好的團契不是沒有問題的團契,而是彼此想念時感恩湧現,相信神在彼此身上作工,並以基督的心腸彼此代禱的團契。</summary_zh> </invoke>
2026년 9월 13일 일요일
📖 사무엘하 7:8-16
다윗의 약함과 실패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결심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윗이 말한 집은 건물이었으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집은 다윗의 가문, 곧 왕조였다. 하나님은 다윗이 걸어온 시간을 "내가"라는 주어로 정리하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밝히셨다. 그리고 그 언약 한복판에 하나님은 또 말씀하셨다: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이라는 말씀을 두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안에 죄가 들어올 것을 다 아시면서, 징계는 하시되 사울에게서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을 떠받치는 것은 다윗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이다. 그러나 다윗은 무너졌다.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 왕은 궁에 남아 있었고, 지난 본문에서 반복되던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라는 문장은 11장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윗은 여전히 묻는 사람이었으나 묻는 대상이 바뀌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지를 물었다. 이런 일은 대개 형편이 어려울 때가 아니라 일이 잘 풀리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일어난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였으며, 사람들 앞에서는 완벽하게 덮였으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이었다. 회복의 장면에서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셨고, 그 책망은 언약이 깨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7장의 언약이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다윗은 남의 죄는 즉시 판단했으나 자기 죄는 일 년이 되도록 보지 못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 앞에서 다윗은 변명도 조건도 없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했다. 사울도 같은 말을 했지만 그 뒤에 이유와 자기 자리를 지켜 달라는 요청을 붙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죄의 유무가 아니라 책망 뒤에 향한 방향이었다. 회개했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았다. 칼이 다윗의 집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는 아들에게 쫓겨 맨발로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러나 다윗의 왕위는 사울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징계와 은총, 두 가지를 모두 지키셨다. 은혜는 죄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summary_ko> <parameter name="summary_zh">大衛曾立志要為上帝建造聖殿,但上帝卻反過來對大衛說,祂要為大衛建立「家室」。大衛所說的「家」是建築物,而上帝所說的「家」則是大衛的家族,也就是他的王朝。上帝回顧大衛一路走來的歲月時,一再以「我」作為主詞,表明這一切都是上帝親自成就的事。 而在這約的核心,上帝又說:「他若犯了罪……。」上帝明明知道罪將會進入大衛家中,卻仍應許說,祂雖然會管教,卻不會像對待掃羅那樣,把恩慈從大衛身上收回。支撐這約的,不是大衛的完全,而是上帝自己的信實。 然而,大衛還是跌倒了。當軍隊都在戰場上時,王卻留在宮中。過去的經文中不斷出現「大衛求問耶和華」這句話,但到了撒母耳記下第十一章,這句話一次也沒有出現。大衛仍然是一個會問的人,只是他所問的對象改變了。他不再求問上帝所喜悅的是什麼,而開始思考自己想要的東西要怎樣才能得到。這樣的事不是在環境艱難的時候,反而是在事情進展順利、覺得靠自己的力量也能做到的時候發生。大衛奪取了拔示巴,又殺害了烏利亞。在人面前,所有事情似乎都被完美地掩蓋了;然而在耶和華眼中,這事卻是惡的。 大衛看到別人的罪時,可以立刻作出判斷,卻將近一年都看不見自己的罪。直到拿單對他說:「你就是那人!」大衛沒有辯解,也沒有提出任何條件,只說:「我得罪耶和華了。」掃羅也曾說過同樣的話:「我有罪了。」然而他接著卻為自己找理由,又要求撒母耳仍要在百姓前尊重他,保住他的地位。兩人的差別,並不在於一個犯罪、一個沒有犯罪,而是在受到責備之後,他們轉向了哪裡。 悔改並不代表一切就像從未發生過一樣。刀劍仍沒有離開大衛的家;他甚至被自己的兒子追趕,赤著腳逃離耶路撒冷。然而,大衛的王位並沒有像掃羅那樣被斷絕。上帝同時守住了兩件事:祂的管教,以及祂的恩典。恩典,不是把罪當作從未發生;恩典乃是即使人在罪中跌倒,上帝仍不去棄那個罪人。</summary_z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