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26년 7월 19일 일요일
📖 사무엘상 3:1-21
사무엘의 선지자 직분
사무엘서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최종 기록된 책으로, 나라를 잃고 절망한 백성에게 실로가 왜 무너졌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책의 앞뒤에 배치된 한나의 노래와 다윗의 노래는 사무엘서 전체의 주제를 선포한다. 여호와는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시는 역전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보석처럼 희귀했던 시대의 진단으로 시작된다. 말씀이 희귀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침묵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들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제물을 가로채고 성소를 더럽히며 하나님을 이용했고, 말씀의 통로가 막히니 온 이스라엘에 말씀이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이 캄캄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밤, 하나님은 사무엘을 네 번 부르셨고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했다. 이 한 문장을 기점으로 시대가 갈라진다. 하나님은 시대를 바꾸실 때 하늘에서 소리를 키우지 않으시고, 땅에서 듣는 한 사람을 세우신다. 사무엘이 받은 첫 말씀은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 선고였으나, 그는 그 무거운 말씀을 숨기지 않고 전했다. 듣는 종은 맡겨진 말씀이 아무리 무거워도 삼키지 않고 전하는 사람이다. 본문은 말씀의 기근에서 시작하여 말씀이 실로에 다시 나타나는 계시로 끝나는 역전 드라마다. 대제사장을 건너뛰어 아이에게 말씀이 임한 것은 한나의 노래가 실행된 첫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응답을 완전하게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말씀이 희귀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응답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을 보내신 것이며,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먼저 들으신 그분의 은혜 때문이다.
최근 설교
2026년 7월 12일 일요일
📖 로마서 14-15장
사랑의 실천
로마서 14-15장은 사랑이 가장 어려워지는 순간, 곧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세 걸음으로 가르친다. 당시 로마교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음식과 절기 문제로 충돌하고 있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것인가, 유대교의 절기를 지킬 것인가를 두고 서로 자기 신앙이 옳다며 다른 편을 비판한 것이다. 첫 번째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의 관심은 '무엇이 옳으냐'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다름 앞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다. 삼위일체와 구원론 같은 진리는 양보할 수 없으나, 음식이나 절기 같은 비본질적 문제는 각자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이니, 재판관 되지 말고 그 다름을 남겨내야 한다. 두 번째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비판을 멈추는 소극적 단계에서 나아가, 형제가 넘어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배려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강한 자'는 더 영적인 자가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자다. 자유로운 자가 그 자유를 스스로 접고, 옳은 것 옮음을 양보하는 것 —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더 아는 자가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세 번째 용납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으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서로를 받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요, 그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둘 다 받으셨으니,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진 자가 어찌 옆 사람의 다름을 밀어내겠는가. 다름을 품는 그 자리가 곧 성령의 기쁨과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자리가 된다.
2026년 7월 5일 일요일
📖 로마서(羅馬書) 12-13장(章)
거룩한 산 제물 (聖潔的活祭)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1-11장에서 이신칭의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우리에게, 이제 그 신분에 맞은 품격 있는 삶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그 삶의 첫 단추는 '너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이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일의 형식적 예배를 넘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를 의미한다. 또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한다. 여기서 변화는 겉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속부터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드린 사람은 사랑의 반경을 점점 넓혀 간다.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한다. 그 첫걸음은 거창한 헌신이 아니라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겸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한 몸의 지체이기에, 그 다름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도구다. 그래서 먼저 대접받으려 다투지 않고 먼저 존경하고 먼저 섬긴다. 이어 사랑은 교회 담을 넘어 원수와 세상에까지 이른다.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며, 악을 선으로 이긴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 였을 때 도리어 사랑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사랑은 국가에까지 이르러,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인 권세에 복종하며 선한 시민으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한마디다. 수많은 계명이 결국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안에 다 들어 있다. 율법은 밖에서 명령만 할 뿐 지킬 힘을 주지 못했으나, 사랑은 안에서부터 그 모든 것을 살아낸다. 그러기에 품격 있는 삶이란 규칙을 외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여기에 바울은 시간이 없다는 긴장을 더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 갑옷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다. 날마다 옷을 갈아입듯 예수님을 입고,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예수님이 보이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왕자와 공주의 품격이다.
2026년 6월 28일 일요일
📖 에베소서 2:1~11
하나로 지어져 가는 작품들
에베소서 2장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분열에서 화평으로, 흩어짐에서 지어짐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은 전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곧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였습니다. 이사야 59장은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힘임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응답할 책임을 포함하지만, 죄 가운데 있던 우리는 응답할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이 영적 죽음과 분리는 한국 대만의 현실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4절은 '그러나'(δέ)라는 단어로 반전을 선언합니다. 인간은 무능했지만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구원은 자격증 같은 상태가 아니라 전존재가 새로워지는 삶 전체의 과정입니다. 10절의 '포이에마'(작품)는 하나님이 오래 참음과 선하심으로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빚으셨음을 뜻합니다. 14~18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사 한 새 사람, 화평을 이루셨다고 선언합니다. 한국과 대만 사회에는 정치적·문화적 담장과 교회 간 경쟁의식이 세워져 있지만,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19~20절은 성도가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며,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외형의 성장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공의·사랑이 살아 있는 복음적 성장이 중요합니다. 은혜로 살아난 자들이 화평을 이루며 함께 지어져 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부르심입니다.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 로마서 9-11장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은혜
로마서 9-11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헛되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선언을 증명하는 본문이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바울은 세 번의 단호한 부정(斷乎不可)으로 답한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들이 영영 넘어지도록 실족하였느냐 — 그럴 수 없다. 이 세 번의 부정이 본문 전체의 뼈대를 이룬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선택의 은혜를 권리로만 누리며 그 사명을 버린 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랑과 공의로 살롬을 이루어 열방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나, 그들은 자녀의 신분을 자랑하면서 자녀의 품격은 버렸고 선민사상으로 이방인을 서자 취급하였다. 바울은 이삭과 야곱의 선택도 행위나 신분이 아니라 오직 은혜임을 밝힌다. 유대인이 은혜로 구원받았도 이방인도 동일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그 구원에는 적자와 서자의 차이가 없다.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상식을 거스르는 순전한 은혜의 사건이니, 뿌리를 보전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뿌리다. 8장의 "끊을 수 없다"와 11장의 "두려워하라"가 충돌하는 듯 보이나, 8장은 참으로 믿는 한 개인의 최종적 안전을, 11장은 나무에 붙은 가지의 구성이 바뀔 수 있음을 말한다. 그 경고는 구원을 빼앗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거짓된 안전감을 겨누어 우리를 은혜 안에 머물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마침내 바울은 이 논증을 한 절로 요약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같이 긍휼을 입은 자일 뿐, 교회 안에 적자와 서자가 따로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