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26년 5월 31일 일요일
📖 로마서 6장
죄에서 벗어나라
우리는 흔히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면 은혜를 더하려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느냐고 묻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죄악 가운데 살겠는가.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단지 법정에서 죄의 기록이 지워진 선언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세계에 대하여 이미 죽어 버렸음을 뜻한다. 바울은 이것을 세례로 설명한다. 물 속으로 들어가 옛 사람이 죽어 장사되고, 다시 올라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또한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죽었다'는 말은 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권세와 지배력이 꺾였다는 뜻이다. 죄는 여전히 곁에서 유혹하지만 더 이상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한다. '여기다'는 회계 장부의 계산 용어로,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사실을 사실로 확증하고 그 위에서 살라는 명령이다. 바울은 같은 진리를 종의 비유로 다시 설명한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의 종이며, 주인 없는 중립 지대란 없다. 죄에서 풀려난 것은 주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뀐 것이다. 옛 주인인 죄가 전화를 걸어와도 "나는 이제 너의 종이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 참된 자유는 매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선하신 주인께 사로잡히는 것이다. 죄의 삯은 일한 대가로 정확히 지불되는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영생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의의 종이 된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따라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최근 설교
2026년 5월 24일 일요일
📖 로마서 5:1~15
은혜의 자리에 서다
로마서 5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바울은 성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옛 삶의 관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겪는 고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품격은 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연금술과 같아서, 어떤 삶의 재료가 주어지든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것처럼, 희망의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가능성을 붙들기에 어떤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를 씻는 신비한 물질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과 삶과 가르침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구속했습니다. 구속(atonement)의 본질은 '하나되게 함'이며,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담을 허물고 다리를 놓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생명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할 뿐 없애지는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지배에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교회는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걷는 길벗이 있을 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마음속에 흐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그 피가 있을 때 우리와 가정과 교회가 살아납니다. 주님은 오늘도 "네가 바로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어둠 속에서 사랑의 빛을 비추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5월 17일 일요일
📖 로마서(羅馬書) 1-4장(章)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 (人的罪與上帝的義)
로마서 1, 2장은 인간이 모두 죄인임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이방인들은 창조 세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다. 반면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듣기만 할 뿐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율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죄를 지었다. 율법이 없는 자나 율법을 가진 자나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심판의 대상이다. 로마서 3장은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온 인류가 죄 아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그 가망 없는 자리에 율법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곧 '힐라스테리온'으로 세우셨다. 이는 구약의 속죄소, 시은소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제 예수님은 단지 속죄를 위한 제물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참된 속죄의 자리가 되신다. 더 이상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시은소 앞에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예수께서 친히 참된 시은소가 되셨고, 그분의 피로 단번에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가 두 가지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덮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정당한 심판을 다 치르신 의로우신 분이시며, 동시에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심이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에서 진노와 사랑이 만나고 공의와 자비가 입을 맞췄다. 로마서 4장은 이 의를 얻는 방법이 오직 믿음임을 아브라함을 통해 풀어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기 전에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할례는 그 의의 증거로 주신 도장일 뿐이다. 우리의 구원에는 어떤 공로도, 조상의 공덕도 없다. 오직 죄인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2026년 5월 10일 일요일
📖 요한복음 19:25-27
십자가 곁에 선 어머니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성육신이 진짜라면 아기 예수님도 진짜로 우셨고, 어머니에게 언어를 배우며 자라셨다. 또한 마리아의 산통과 수유와 양육은 모두 인간 아이를 향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만 어머니 마리아는 30년간 가까이서 본 아들의 비범함을 마음에 두었다. 즉 천사의 계시와 시므온의 예언, 12세 성전 사건의 말씀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렇기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아직 표적을 행하지 않은 아들에게 도움을 구한 것은 30년간 마음에 새겨온 어머니의 직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역이 본격화되자 친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판단했고(막 3:2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따라갔고, 거절당하면서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 제자들은 도망가고 베드로는 부인했지만, 어머니는. 채찍에 찢긴 몸과 못 박힌 손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아들을 구할 수도, 막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그저 서 있는 것, 이것이 어머니의 자리이며 가장 거룩한 자리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십자가 위의 한 분이 보고 계셨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사명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잊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어 새 가족을 주셨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그 사명이 어머니의 사랑을 이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효심을 마지막까지 표현하셨다. 그래 예수님은 지금도 이 시대의 어머니들의 헌신을 그 사랑으로 보고 계실 것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더 큰 사랑의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다.
2026년 5월 3일 일요일
📖 누가복음 15:11-32
두 아들의 사역
본문은 누가복음 15장 1-2절의 문맥 속에서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던 바리새인을 향한 비유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음에도 유산을 요구하며 떠났는데, 이는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것과 같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는 아버지 자체가 아닌 아버지의 재산만을 원했고, 결국 '먼 나라' 곧,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모든 것을 탕진한 후 돼지 치는 자가 되어 언약 백성의 정체성마저 상실하기에 이른다. 큰아들 역시 잃어버린 자다. '섬기다'에 사용된 헬라어는 종이 주인에게 쓰는 단어로, 그가 아버지를 '아빠'가 아닌 엄한 '주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 그에게는 순종은 있었으나 관계는 없었고, 의무는 있었으나 기쁨이 없었다. 보상만을 기대하는 거래적 신앙 속에서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 아닌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 부르며 아버지와 형제 모두에게서 단절되어 있었다. 이는 작은아들을 잃어버림보다 더 위험하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임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두 아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먼저 나아가시는 아버지에 있다.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 달려가 아들을 안으셨는데, 1세기 중동에서 가장이 공적으로 달리는 것은 극도의 수치였다. 이는 마을의 추방 의식과 모욕에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수치를 자발적으로 짊어지신 행동이며, 여기에 우리의 정죄를 대신 받으신 십자가의 사랑이 이미 담겨 있다. 또한 아버지는 잔치 자리를 박차고 나간 큰아들에게도 직접 걸어 나가 'téknon(애야_내 자식)'이라 친밀하게 부르시며 '이 네 동생'이라 하여 가족 관계를 다시 정의해 주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