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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고린도전서 12:1-11

    今日默想:哥林多前書 12:1-11

    한경우··조회 55

    제목 : 한 성령과 다양한 은사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다. 바울이 편지 첫머리에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라고 말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은사가 많으니 은사로 다투었다. 누구의 은사가 더 영적이고 더 높은가를 두고 분쟁이 생긴 것이다. 특히 방언처럼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고 황홀한 체험을 동반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더 영적인 자라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예배는 질서를 잃었고, 서로 자기 은사를 드러내려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공동체를 세우라고 주신 은사가 도리어 공동체를 갈라놓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2장부터 14장까지, 세 장에 걸쳐 이 문제를 길게 다룬다. 12장에서는 은사가 본래 어떤 것인지 — 그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리고 13장에서는 그 모든 은사보다 더 큰 길, 곧 사랑을 보여 준다. 마지막 14장에서는 그 사랑의 원리를 실제 예배의 자리에 적용하여, 방언과 예언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그러니까 이 세 장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은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하나의 물음에 대한 긴 대답이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분별의 기준을 바로잡는다. 그는 그들의 옛 시절을 상기시킨다. 이방인이었을 때 그들은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녔다. 그때도 격렬한 체험이 있었다. 황홀경이 있었고 무아경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체험의 강렬함 자체는 성령의 증거가 아니다. 심지어 이교의 영도 사람을 뜨겁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인가.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래 기준은 그리스도다. 성령의 일하심은 언제나 예수를 주(主)로 높이는 방향으로 향한다.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느냐가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높이느냐가 분별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을 말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고,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 '성령과 주와 하나님'이 나란히 호명된다. 다양성이 세 번 반복되고, '같은'이 세 번 반복된다. 그래, 이게 핵심이다. 다양성은 분열의 근거가 아니다. 한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여러 모양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 다양한 은사들을 나열하기 전에, 먼저 그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유익'은 헬라어로 '함께 가져옴'을 뜻하는데, 이는 곧 공동의 유익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성령이 은사를 나타내시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자랑거리나 소유물이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함께 세우라고 주신 것이다. '각 사람에게' 주신다고 했다. 은사는 특별한 몇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지체가 받는다. 공동체의 필요를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까지 아홉 가지가 이어진 뒤, 바울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그 분배는 성령의 주권적 결정이다. 내가 더 영적이어서 더 좋은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받는 것이다. 그러니 은사는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우열의 근거도 될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본다. 그런데 설교하고 가르치고 돌보는 자리에 서 있다 보면, 어느새 그 은사가 나의 것인 양, 나의 능력인 양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다른 지체의 은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은근히 내 자리를 지키려 들 때가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의 목적을 잊은 것이다. 그래 성령이 나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을 함께 세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받은 것으로 누군가를 자라게 하고, 누군가의 짐을 덜고,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도록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그 목적을 놓치면 은사는 자랑이 되고, 자랑은 분열이 된다. 마치 고린도 교회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오늘도 주신 은사를 통해 온전히 공동체를 섬기는 자가 되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題目:同一聖靈與多樣恩賜

    哥林多教會是一間恩賜豐富的教會。保羅在書信開篇便說:「你們在一切恩賜上沒有一樣不及人的」(林前 1:7)。然而,這份豐盛反倒成了問題。恩賜既多,便因恩賜而相爭。究竟誰的恩賜更屬靈、更崇高,紛爭由此而生。尤其是那些擁有方言等外表華麗、伴隨著狂喜體驗之恩賜的人,更以為自己比別人更屬靈。如此一來,敬拜失去了秩序,聚會淪為各人爭相展示自己恩賜的場合。原本賜下來建立群體的恩賜,反倒將群體分裂了。

    因此,保羅從第十二章到第十四章,用整整三章的篇幅詳細處理這個問題。第十二章闡明恩賜本來的樣式——其多樣性與合一性,以及其目的為何。第十三章則指出一條超越一切恩賜的更美之道,那就是愛。最後的第十四章,將愛的原則應用於實際的敬拜場合,糾正方言與先知講道的秩序。因此,這三章並非彼此分離,而是對「恩賜是為了什麼」這一問題所作的一篇完整而深長的回答。

    保羅首先端正辨別的標準。他提醒他們昔日的光景:當他們還是外邦人的時候,曾被那不能說話的偶像所牽引。那時同樣有激烈的體驗,有狂喜,有忘我的境界。因此保羅說:體驗本身的強烈程度,並不是聖靈同在的憑據。就連異教的靈,也能使人熱情激昂。那麼,標準究竟是什麼?

    林前 12:3 所以我告訴你們,被神的靈感動的,沒有一個說耶穌是可咒詛的;若不是被聖靈感動的,也沒有一個能說耶穌是主的。

    標準就是基督。聖靈的工作,始終朝向高舉耶穌為主的方向。不是體驗有多強烈,而是那體驗是否高舉基督——這才是辨別的標準。

    接著,保羅談到恩賜的多樣性。恩賜有許多種,聖靈卻是同一位;職事有許多種,主卻是同一位;功用有許多種,叫萬事都成就的神卻是同一位。「聖靈、主、神」並列呼應。多樣性三度重申,「同一」也三度重申。這正是核心所在:多樣性不是分裂的根據,而是同一位神——三位一體的神——那豐盛的恩典以各種形式流溢而出。在列舉各樣恩賜之前,保羅先道明其目的:

    林前 12:7 聖靈顯在各人身上,是叫人得益處。

    這裡的「益處」,在希臘文中含有「共同帶來」之意,指的是群體的共同益處。聖靈彰顯恩賜,並非要使恩賜成為某個人的誇耀資本或私有財產,而是為了共同建立群體。經文說「顯在各人身上」——恩賜不是少數特別之人的專利,每一個肢體都領受恩賜,是按著群體的需要分給各人的。

    因此,從智慧的言語、知識的言語、信心、醫病的恩賜、行異能、先知講道、辨別諸靈、說方言,到翻方言,共九樣恩賜一一列出之後,保羅如此作結:

    林前 12:11 這一切都是同一位聖靈所運行,隨己意分給各人的。

    「隨己意。」分配恩賜的是聖靈,而那分配乃是聖靈主權性的決定。並非因為我更屬靈,才領受了更好的恩賜。恩賜是領受來的。因此,恩賜不能成為誇耀的根據,更不能成為高下優劣的根據。

    我有時會省察自己領受了什麼恩賜。然而,當我站在講道、教導、牧養的崗位上,有時不知不覺便會錯以為那恩賜是我自己的,是我個人的能力。於是,其他肢體的恩賜便從眼中消失,甚至暗暗守護著屬於自己的位置。這樣的我,正是忘記了神賜給我恩賜的目的。聖靈賜給我恩賜的緣由是清楚的:為要共同建立我們群體中的肢體。因此,那是要我用所領受的,使人得以成長,減輕人的重擔,服事群體在基督裡合而為一。若失去這個目的,恩賜便成了誇耀,誇耀便帶來分裂——就如哥林多教會那樣……因此,今天我也禱告,願藉著所賜的恩賜,成為一個全心服事群體的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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