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24–10:13, 에베소서 4-6)
광야에서 큰 은혜를 누리고도 우상숭배와 원망으로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저의 연약함을 봅니다. 일상에 치여 살다 문득 돌아보면 용서받은 자의 모습과는 너무도 멀어져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분명 큰 기쁨이 있지만 승리를 위해 철저히 절제하는 운동선수나 영적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는 군사처럼 매일 내 자아를 쳐서 주님께 내어드리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달려갈 때 수많은 유혹이 찾아온다. 여기까지만 하자, 더 쉬운 길로 가고 싶은데 왜 나에게만 이렇게 힘든 길을 주시지?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과 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예비하신 길을 끝까지 가게 하실 것이고 넘어질 즘에는 다른 길로 인도하시더라도 끝까지 완주하게 하신다. 광야의 은혜에 만족하고 멈춰버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하신 큰 상급을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주의 길을 완주하는 자가 되자.
(고린도전서 9:1-23, 에베소서 1-3)
절대적이고 흔들림 없는 구원의 확신 하에서도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낮은 자로 여기며 복음을 위해 모든 권리를 포기합니다. 내게 베풀어주신 구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이지만 나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은 아님을 생각합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영적인 나태나 방종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자유 안에서 기꺼이 종이 되어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했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나오지 않아 힘들어 했던 날들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내 기쁨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낮아지는 것이 은혜인 줄 믿는다. 시편의 말씀처럼 자원하는 마음을 구하고, 주님의 일을 감사함으로 행하는 자가 되자.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권리와 자유를 내려 놓았고 예수님은 날 살리기 위해 하늘 보좌 버리시고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한없이 크신 그 은혜를 자격 없는 내게 거저 주셨다. 하지만 내 지난 삶을 돌아볼때 난 항상 반대의 삶을 살아왔음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난 어떻게든 내 권리를 찾으려 애쓰고, 내 자유를 빼앗길까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왔다. 영혼을 위해 희생하기는 커녕 두 손을 꽉 진채 살아온 내 모습을 회개하며 이제는 나도 주를 위해 낮아지고 희생하며 내게 맡기신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고린도전서 8:1-13, 누가복음 23-24)
바울의 말처럼 지식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데 탁월하지만 결국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하고 세우는 것은 사랑임을 봅니다. 누가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건을 피상적으로만 알았을 뿐 그 희생의 본질에는 무지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제자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르치시고 뜨거운 마음을 심어주신 예수님을 봅니다. 어느 공동체에 있든 지식을 뽐내며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함께 걸어가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하늘 보좌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다. 주님의 성품을 닮은 우리도 기꺼이 나의 것을 내어놓음으로 내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나의 지식이 사랑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다.
나의 말과 습관이 아이에게 기준이 되기도하고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때도 많았을것입니다. 부모가 본보기가 되어 자녀의 신앙에 도움이 되기엔 참으로 어렵습니다.
세상 속에서도 나의 행동 하나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실족하거나 복음의 문이 막힐 수 있기 때문에 더 배려하고 본이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자유롭게 살고있는지 반성이됩니다.
나의 자유와 편안함보다 다른사람들을 더 배려하는 성도가될수있길 원합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바울은 사랑이 없는 지식은 오히려 해로울 뿐이라고 설명한다. 부모가 되고 아이가 자라며 내 행동, 말투, 삶을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아이에게는 본보기가 될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이 되지 못하는 연약한 내 모습을 매번 발견하는것 또한 사실이다. 내 책임감 없는 잔소리가 아이를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케 하는게 아니라 바울처럼 사랑으로 내 자신을 버릴때 비로소 아이가 바르게 자라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를 받았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잠 10:12
고전 7:40 내 의견으로는, 그 여자는 그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며칠째 내게 감동을 주시는 말씀은 내 의견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참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오해하여 확신에 차면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바울도 자기 의견을 제시하면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하였듯이 모든 일에 있어 내 확신으로 밀어부치기 보단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열린 자세로 수용하는 지혜를 주시길 오늘도 구해본다. 은혜 없이는 안된다.
결혼 후 배우자와 자녀라는 소중한 존재가 생기면서, 나의 시간과 에너지가 가족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우선순위가 가족이 되었고 그로 인해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멀어지진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가정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제 첫번째 사역지이니 주님과 친밀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가족을 흘려보내는 삶을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결혼을 비롯한 많은 삶의 선택 가운데 그것을 선택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된다면 주님께서도 어떤 길이든지 축복하실 것이다. 세상 일로 인한 나의 걱정과 염려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앞서지 않도록 주의하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자.
(고린도전서 7:1-24, 누가복음 19-20)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권면한 것처럼 사명은 삶의 자리에서 증명되어야 함을 봅니다. 맡겨진 한 므나를 그대로 묻어두어 책망받은 종과 달리 부도덕해 보였던 삭개오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바로 결단과 변화로 응답했습니다. 제게 허락하신 부르심이 아무리 작고 평범해 보일지라도 기쁨으로 감사하고 결단하며 매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신실하게 사는 것이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참된 열매임을 묵상합니다. 그런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확신에 차 서로 옳다 주장한 것처럼 나 또한 확신에 차 내 주장만을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특히 가정에서 아내에게, 아들에게, 부모님들에게, 누나들에게.. 10년 주기로 그 생각이 바뀌고 그때 옳다 생각했던 것이 아님을 깨우치는 순간마다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바울도 정답이 아닌, 상황에 맞는 옳음, 때로는 차선책을 제시하듯 나 또한 정답만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닌 너그러이 이해하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보다 각자의 부르심에 맞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믿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돌이켜보면 행복한 가정생활에 만족하면서도 그 중심에 예수님을 얼마나 모시고 살았는지 부끄러워집니다. 믿는 배우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안주해 신앙의 훈련과 노력을 게을리하진 않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 가정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전 16: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것이 무겁게 다가온다. 언제나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가령 교회에서는 집에서와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한다. 겸손한 척, 선한 척, 자비로운 척, 심지어 말투도 달라지는 것이 내 모습이다. 더 큰 문제는 왜 그렇듯 주님을 의식하고 살지는 못할까? 이다.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 고전 1:26-29 약할때 강함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고린도전서 6:1-11, 누가복음14-16)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거나 다툼에서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봅니다. 내 눈에 아무리 옳고 좋아 보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길이고 서로 하나 되는 길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막상 내가 양보하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것 같아 굳이 내 고집을 주장했던 옹졸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참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