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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이사야 10:20–34

    今日默想:以賽亞書 10:20–34

    한경우··조회 57

    제목 : 이스라엘의 남은 자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의 몽둥이였던 앗수르가 심판대에 섰다. 도끼가 자기를 든 손을 잊고 자랑하다가 도리어 찍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심판이 지나간 자리에 유다는 어떻게 남는가.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서 이사야가 처음부터 조금씩 흘려 온 한 가지 '남은 자'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이야기한다.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지금까지 남은 자는 단지 심판 가운데 살아남은 소수를 가리키는 말처럼 보였다. 전쟁이 지나가고 살아남은 사람들, 숫자로 헤아리는 나머지처럼 보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그 남은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신다. 남은 자란 단지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다. 자기를 친 자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 본 본문에서 아하스 왕은 두 나라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징조를 거절하고 앗수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전 창고의 은과 금을 긁어모아 앗수르 왕에게 보내며 나를 구원해 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그렇게 붙든 앗수르가 훗날 유다를 치는 자가 되었다. 자기가 구원자로 부른 그 나라가 자기를 때리는 몽둥이가 된 것이다. 그러니 남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서 돌아선 사람들이다. 한때 살길이라 여겨 붙들었던 것이 실은 자기를 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이제는 그 손을 놓고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들이다.

    사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사야가 아하스를 만나러 갈 때 데리고 나갔던 맏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이었다. 그 뜻이 바로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이다. 그날 아하스는 그 아이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아이의 이름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언자의 아들이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던 그 말이,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남은 자는 어떻게 남은 자가 되는가. 자기가 잘 견뎌서 살아남은 것인가. 사실 이사야는 이미 1장에서 그 답을 주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고 했다. 남은 자는 스스로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겨 두신 자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문장도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의지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날에 그들이 그렇게 의지하리라'고 선언하신다. 곧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것은 남은 자가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물론 그 남은 자의 수는 적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모래알 같은 후손이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소망이면서 동시에 아픈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남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신다.

    사 10: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하나님은 앗수르의 압제를 '애굽이 하던 것처럼'이라고 표현 하신다. 사실 이 한마디에 위로가 담겨 있다. 애굽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그 애굽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 내셨다. 그러니 앗수르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이전에 행하셨던 두 사건을 나란히 언급하신다.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치신 일과 애굽에 행하신 일이다. 한 사건은 기드온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이긴 그 밤이고, 또 다른 사건은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가 수장된 그 아침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이기신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 방식으로 다시 앗수르의 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즉 남은 자들을 건지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긴박해진다. 앗수르 군대가 북쪽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오는 경로가 지명으로 하나씩 열거되기 때문이다. 아얏을 지나고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짐을 둔다. 라마가 떨고 기브아 사람이 도망한다. 갈림 사람이 소리를 높이고 아나돗이 그 소리에 응답한다. 지명이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적이 가까워진다. 이 목록의 힘은 지리 정보가 아니라 다가오는 발소리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놉에 이른다. 예루살렘이 눈에 보이는 자리다. 거기서 그가 시온 산을 향하여 손을 흔든다. 이제 곧 너를 치겠다는 몸짓이다.

    바로 그 순간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10:33-34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손을 흔들던 그 순간에 하나님이 도끼를 드신다. 어제 우리가 읽은 그 도끼 비유에서 말한 것처럼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끼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베어질 나무가 된다. 찍던 자가 찍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던 레바논의 삼림이 통째로 베여 넘어진다. 그 교만이 심판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높은 것을 낮추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 본문에서 항상 나의 신학에 깊게 자리 잡은 '남은 자 사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다시금 묵상해 본다. 그래 남은 자는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친 자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전의 삶을 돌아보면 나의 삶도 아하스와 많이 다르지 않다.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성전의 은금을 실어 보내던 그 마음이, 사실 내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나를 친 자를 의지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이 말씀이 다가왔고, 나를 그 말씀 앞에 엎드리게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이렇게 말한다. 남은 자가 남은 것은 그가 잘 버텨서가 아니라고. 하나님이 남겨 두셨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믿음이 굳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셨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섰던 그 순간들조차, 실은 하나님이 먼저 나를 돌이켜 주신 것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다만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새벽에 기도한다. 하나님, 오늘 우리를 남겨 두신 그 은혜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흔들림 속에서도 주님만을 진실하게 의지하며, 오늘 하루도 신실하게 걸어가게 하옵소서.

    中文 AI翻譯

    題目:以色列的餘民

    昨日的經文中,曾作為神刑杖的亞述站上了審判台。那斧頭忘記了舉起它的手,自誇自大,結果反被砍伐。那麼,審判過後,猶大將如何存留?今日的經文正是述說這件事。以賽亞也在此清晰地道出他從一開始便逐漸流露的一個主題——「餘民」的確切意義。

    賽 10:20 到那日,以色列的餘民和雅各家逃脫的人,不再倚靠那擊打他們的人,卻要誠實倚靠耶和華——以色列的聖者。

    到目前為止,「餘民」似乎只是指在審判中僥倖存活的少數人——戰爭過後的倖存者,像是數算剩下的人數一般。然而,神在此揭明了餘民究竟是怎樣的人。餘民並非單指活下來的人,而是那些不再倚靠擊打自己之人、卻真誠倚靠以色列聖者的人。

    這裡「擊打他們的人」指的是亞述。在先前的經文中,亞哈斯王面對兩國的威脅,拒絕了神所賜的預兆,反而向亞述伸出了手。他刮盡聖殿府庫中的金銀,送給亞述王,懇求他來拯救自己。然而,他所緊抓的亞述,後來竟成了擊打猶大的人。他所稱為救主的那個國家,成了打他的棍棒。因此,餘民就是那些從這愚昧中回轉的人——那些認清了昔日以為是活路而緊抓的東西,其實正是傷害自己的東西,如今放開那手、轉向神的人。

    賽 10:21 雅各的餘民,就是剩下的人,必歸回大能的神。

    以賽亞去見亞哈斯時所帶去的長子,名叫「瑪黑珥沙拉勒哈施罷斯」……不,那孩子的名字是「施亞雅述」,意思正是「餘民必歸回」。那一天,亞哈斯應當聽見了那孩子的名字。然而他自己卻沒有回轉。如今,神說那孩子名字所承載的話,終有一天必定成就。先知之子如同名牌般掛在身上的那句話,在這裡成為了神的應許。

    那麼,我們在此必須弄清一件事:餘民是怎樣成為餘民的?是因為自己撐得夠好、靠著自己存活下來的嗎?事實上,以賽亞在第一章就已給出了答案:「若不是萬軍之耶和華給我們留下一點餘種,我們早已像所多瑪、蛾摩拉一樣了。」餘民不是靠自己成為餘民的,而是神所留存的人。今日經文中的句子也不是命令,而是應許。神並不要求說「你們要如此倚靠」,而是宣告說「到那日,他們必如此倚靠」。因此,真誠倚靠神,不是成為餘民的資格條件,而是神所留存之人身上所顯現的樣式。

    當然,那餘民的數目將會稀少。因為神說,以色列民雖多如海沙,得以歸回的不過是其中的餘民。這意味著神應許亞伯拉罕的那如沙粒般眾多的後裔,將銳減至屈指可數。原因在於他們離棄神,受了審判。因此,這話語既是盼望,同時也是令人心疼的話語。然而神向那些餘民賜下了安慰。

    賽 10:24 所以主萬軍之耶和華如此說:住在錫安的我的百姓啊,亞述人雖用杖打你,像埃及人打你一樣,你卻不要怕他。

    神在此將亞述的壓迫比擬為「像埃及所行的一樣」。事實上,這短短一句話中藏著莫大的安慰。埃及的結局如何?神從埃及人手中拯救了祂的百姓。亞述也將如此。接著,神並列提及了祂昔日所行的兩件事:在俄立磐石擊打米甸,以及向埃及所行的事。一件是基甸率領三百人在那一夜勝敗米甸大軍,另一件是埃及軍隊在紅海被淹沒的那個清晨。這兩件事有一個共同點:都不是靠人的能力,而是神獨自得勝的爭戰。神如今說,祂要用同樣的方式,再次從亞述手中拯救祂的百姓,也就是那些餘民。

    然而,在本段經文的最後一段,氣氛驟然緊迫起來。亞述大軍從北方南下逼近耶路撒冷的路線,以地名一一列舉出來。經過艾雅,經過米磯崙,在密抹安置輜重;拉瑪戰兢,基比亞人逃跑;迦琳人大聲呼喊,亞拿突應聲回響。每一個地名掠過,敵人便愈加逼近。這份名單的力量,不在於地理資訊,而在於那步步迫近的腳步聲。終於,他來到挪伯——那是能夠望見耶路撒冷的地方。他在那裡向錫安山揮手示意,那是「我即將攻打你」的姿態。

    就在那一刻,神如此說道:

    賽 10:33–34 看哪,主萬軍之耶和華要以大能折斷樹枝,長大的樹木被砍伐,高大的被刨低。34 他用鐵器砍伐茂密的樹林,黎巴嫩被有能者砍倒。

    就在他揮手的那一刻,神舉起了斧頭。正如昨日我們所讀的那個斧頭比喻所說,亞述曾是神手中的斧頭。然而如今,他成了將被砍伐的樹木。砍伐者成了被砍伐者。那如刺破蒼天般高聳的黎巴嫩森林,整個被砍倒傾覆。那傲慢遭受了審判。神的審判,始終從降卑那高傲的開始。

    今日的經文,清晰地詮釋了一直深深扎根於我神學思想中的「餘民思想」。因此,我再次默想這段話語。是的,餘民不是活下來的人,而是不再倚靠擊打自己之人、卻真誠倚靠神的人。回顧過去,我的生命與亞哈斯並無多大不同。亞哈斯將聖殿的金銀運送給亞述時的那份心情,其實正是我自己的心情。然而,「不要倚靠擊打你的人,要倚靠創造主神」這話語向這樣的我走來,使我俯伏在這話語面前。而這一切,都是神的恩典。所以今日的經文也這樣說:餘民之所以得以存留,不是因為他撐得夠好,而是因為神留存了他……是的,我如今站立在這裡,也是同樣的道理。不是因為我的信心堅定,而是因為神一直握住了我。回頭看,就連我轉向神的那些時刻,其實也是神先使我回轉。因此,我沒有什麼可誇口的,唯有感恩。所以,我今日也在這清晨禱告:神啊,求祢讓我們不忘今日蒙祢留存的這份恩典。無論在何等的動搖之中,都願我們真誠倚靠唯獨祢,今日也能信實地走完這一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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