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이사야 10:5–19
今日默想:以賽亞書 10:5–19
제목 : 도끼의 교만
지금까지 이사야서에서 앗수르는 늘 하나님이 부르시는 심판의 도구였다. 하나님이 휘파람을 불어 부르시는 군대였고, 유다의 수염을 미는 삯꾼의 면도칼이었으며, 목까지 차오르는 큰 강물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도구가 심판대 위에 선다. 하나님의 몽둥이가 이제 매를 맞는 것이다.
사 10:5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먼저 앗수르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막대기다. 막대기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 들어야 움직인다. 제국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성을 무너뜨리는 그 거대한 사건조차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6절에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한 마디가 들어 있다. 하나님이 그 막대기를 어디로 보내셨는가.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로 보내셨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나라가 이방이 아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자기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지금 자기 백성들을 두고 경건하지 않은 나라라고 부르고 계신다.
그렇게 앗수르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7절에서 본문이 방향을 튼다.
사 10: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래 하나님의 뜻과 앗수르의 뜻이 달랐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매로 다스려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앗수르의 마음에 있던 것은 정복과 멸절이었다.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을 섬기려 한 적이 없다. 오직 자기 야망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 앗수르의 야망을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음까지 인정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앗수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이어지는 자랑에서 드러난다. 앗수르는 자기 고관들이 다 왕이라고 뽐내며, 자기가 무너뜨린 도시들의 이름을 하나씩 늘어놓는다. 하맛과 아르밧과 다메섹과 사마리아, 차례로 쓰러진 강대국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그 목록의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마리아와 그 우상들에게 행한 것같이 예루살렘과 그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 한마디에 앗수르의 진짜 죄가 들어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다른 나라들의 신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했다. 사마리아의 신을 이겼으니 예루살렘의 신도 이길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과 같은 자리에 놓은 것, 그것이 앗수르의 교만이었다. 또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 10:13上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내 손의 힘과 내 지혜. 이것이 앗수르의 신조였다. 그런데 이사야서 5장을 보면 하나님이 유다를 향해 화 있을진저 하고 외치신 대상 가운데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가 있었다. 이처럼 민족은 달라도 교만의 말은 똑같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교만에 대답하신다.
사 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그래 도끼가 나무를 찍은 것은 사실이다. 앗수르는 실제로 강했고 실제로 이겼다. 그러니 도끼의 자랑이 우스운 이유는 그것이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다. 자기가 무엇인지를 잊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몽둥이가 자기를 든 사람을 들려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도구가 주인을 부리려 드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으려는 이 교만이야말로, 사람이 짓는 모든 죄의 뿌리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앗수르는 그저 하나님이 쓰신 도구인데 왜 벌하시는가. 왜 괜히 이스라엘을 치라고 하셔 놓고 또 그들을 책망하시는가? 이방 민족은 그저 하나님의 연장에 불과한가.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이방에게 복수를 하시는 것인가? 신학자들은 이러한 의구심에 두 가지로 답한다.
첫째, 하나님이 앗수르를 심판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증거다. 도끼는 벌을 받지 않는다. 나무를 찍었다고 도끼를 법정에 세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그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대하신다는 뜻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셨고, 그들이 돌이켰을 때 재앙을 거두셨다. 도구에게 회개를 권하는 분은 없다.
둘째, 그가 심판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쓰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쓰임 안에서 품은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은 유다를 향한 경고였는데 앗수르가 행하고자 한 것은 멸절이었다. 하나님은 조금 노하셨는데 앗수르는 힘을 다해 유다에 고난을 더했다. 즉 매를 들라고 맡겼더니 죽도록 때린 것이다. 훗날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실 때도 같은 이유를 대셨다. '내가 내 백성을 네 손에 넘겼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다(사 47:6)'는 것이다. 그래 도구에게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일반은총 속에서 주신 인간의 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잊었기에 책망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일을 다 이루신 후에 앗수르의 완악한 마음과 높은 눈을 벌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심판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신다.
사 10: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며칠 전 우리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는 말씀을 읽었다. 그런데 그 같은 빛이 여기서는 불이 된다. 구원하는 빛과 태우는 불이 한 분이시다. 같은 태양이 밀랍은 녹이고 진흙은 굳게 하듯,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께 속한 자에게는 빛이고 그분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불이다. 그렇게 온 세상을 새 둥지 털듯 쓸어 담던 제국의 숲이 타 버리고, 남은 나무가 너무 적어 어린아이라도 셀 수 있게 된다.
오늘 나는 이 긴 문장에서 앗수르를 향한 경고가 아닌 유다를 향한 한 표현을 다시 묵상해 본다.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 나를 노하게 한 백성(사 10: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부르셨다. 그들은 여전히 성전이 서 있었고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이였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를 무엇이라 여기는가와,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이라 보시는가 사이에 이렇게 큰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무엇이라 부르실까. 나는 그 답을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유다 백성도 자기들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몰랐던 이유는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이 아니라 자기를 안심시켜 줄 근거만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전이 여기 있지 않느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냐. 나에게도 그런 근거들이 있다. 몇 년째 이어 온 사역, 쌓아 온 시간, 사람들이 불러 주는 호칭... 그래서 오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부르시는지를 여쭙고 싶다.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 말고, 주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 이름을 알고 싶다. 물론 그 간격이 클수록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간격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더 위험하다. 그렇기에 내가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는 자리에서 다시 겸손하게 회개하고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눈으로 저를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題目:斧頭的驕傲
在以賽亞書中,亞述一直是神所呼召的審判器具。祂吹起口哨所召來的軍隊,是剃去猶大鬍鬚的雇工剃刀,是漫流至頸項的滔滔大水。然而在今天的經文中,那器具卻站上了審判臺。神的杖,如今要承受責打了。
賽 10:5 亞述人有禍了!他是我憤怒的杖,手中拿我惱恨人的棍。
首先,神清楚說明亞述的身分。他不過是神手中所持的一根杖。杖自己不會動,必須有人拿起才能移動。這是一個宣告:縱使帝國的軍隊越過邊界、傾覆城邦,那龐大的事件依然在神的掌握之中。然而緊接著的第六節,藏著一句我們容易忽略的話。神將那根杖差往何處?祂說是差往「不敬虔的國」。但那個國並非外邦,而是神立約的自己百姓。神此刻稱呼自己的百姓為「不敬虔的國」。
亞述就這樣照著神的命令行動了。然而第七節,經文的方向轉了個彎。
賽 10:7 然而他心不這樣,他意也不這樣,他心裡倒想毀滅,剪除不少的國。
是的,神的心意與亞述的心意截然不同。神所要的,是以刑杖管教自己的百姓,使他們回轉。然而亞述心中所存的,卻是征服與滅絕。他從未有意事奉神,不過是被自己的野心所驅使。神將亞述的野心,使用於神自己的旨意之中。然而重要的是,神並未認可那顆心。
亞述的心思如何,在其後的誇口中一覽無遺。亞述誇耀自己的首領個個都是君王,並逐一列舉那些被他攻破的城邑:哈馬、亞珥拔、大馬士革、撒瑪利亞,這是一份列強相繼傾倒的名單。而在名單的末尾,他說道:我豈不能像辦撒瑪利亞和她的偶像那樣,也辦耶路撒冷和她的偶像嗎?這一句話,道盡了亞述真正的罪。他們將耶和華與其他諸國的神列為同等。他們盤算:既能勝過撒瑪利亞的神,也必能勝過耶路撒冷的神。將永活的神與木石所造的偶像並列同論——這就是亞述的驕傲。他們還這樣說:
賽 10:13上 他說:我靠自己手的大能和我的智慧行了這事,我本聰明。
我手的大能和我的智慧——這便是亞述的信條。然而回看以賽亞書第五章,神向猶大喊出「有禍了」的對象當中,有一類是「自以為有智慧、自看為通達」的人。可見,民族雖異,驕傲的話語卻如出一轍。而神也回應了那份驕傲。
賽 10:15 斧頭豈可向用斧砍木的自誇呢?鋸豈可向用鋸的自大呢?好像杖能掄起用杖的人,棍能拿起不是木頭的人。
是的,斧頭確實砍了樹木,亞述確實強大,確實得勝了。所以斧頭誇口之所以可笑,並非因為那是謊言,而是因為它忘記了自己是什麼——忘記了自己不過是被人拿在手中。最後神又說,棍子竟想拿起持棍的人,也就是器具想要支配主人。受造之物妄圖坐上創造主的位置,這份驕傲,正是人所犯一切罪的根源。
然而在此,我們不禁生出一個疑問:亞述不過是神所使用的器具,為何還要受罰?為何神先命他攻擊以色列,卻又責備他?外邦民族難道只是神的工具?神是為了自己的百姓而向外邦報仇嗎?神學家對這份疑惑提出兩個回答。
第一,神審判亞述這件事本身,正是他並非單純器具的明證。斧頭不會受罰,沒有人會因為斧頭砍了樹木而將它帶上法庭。然而神審判亞述,意味著神將他視為一個能夠承擔責任的存在。事實上,神差遣約拿前往亞述的首都尼尼微,呼召他們悔改,而當他們回轉時,神也撤回了災禍。沒有人會勸說一件器具悔改。
第二,亞述受審判,不是因為被神所使用,而是因為在被使用的過程中所懷存的心。神所託付的,是向猶大發出警告,而亞述所欲行的,卻是滅絕。神不過略施忿怒,亞述卻竭盡全力向猶大加增苦難——換言之,神命他行杖,他卻往死裡打。日後神審判巴比倫時,也給出了同樣的理由:「我將我的百姓交在你手中,你並不憐憫他們(賽 47:6)。」器具也有不可逾越的界線,因為他們在普遍恩典中,同樣被賦予了作為人應有的本分。然而他們忘卻了這一點,因此受到責備。
所以神說,待祂成就了自己的一切旨意之後,必要懲罰亞述剛硬的心和高傲的眼。而那審判的景象,如此描繪:
賽 10:17 以色列的光必如火,他的聖者必如火焰,在一日之間將亞述的荊棘和蒺藜焚燒盡了。
幾天前,我們讀到「在黑暗中行走的百姓看見了大光」。然而同一道光,在這裡卻成了火。施救的光與燃燒的火,出自同一位神。正如同一輪太陽,使蠟融化,使泥土堅硬,神的同在對於屬祂的人是光,對於抵擋祂的人卻是火。那曾如掃空鳥巢般橫掃天下的帝國森林,就這樣燃燒殆盡,所剩的樹木寥寥無幾,連小孩子都數得出來。
今天,我在這段漫長的經文中,不再默想那針對亞述的警告,而是再次細思那句向猶大所說的話:「不敬虔的國,惹我發怒的百姓(賽 10:6)」。神如此稱呼自己的百姓。他們的聖殿依然矗立,祭祀依然進行,他們自己也以神的百姓自居。然而從神口中說出的,卻是「不敬虔的國,惹我發怒的百姓」。也許,我們自以為是什麼,與神眼中看我們是什麼,之間竟可以有這麼大的落差。那麼,神會如何稱呼我?我沒有把握說自己知道答案,因為猶大百姓也不知道自己是如何被稱呼的。他們之所以不知道,或許是因為他們所尋求的,不是能照見自己真實樣貌的鏡子,而是能叫自己安心的根據:聖殿不是在這裡嗎?我們不是亞伯拉罕的後裔嗎?我心中也有這樣的根據——多年持續的事工、積累的歲月、人們所給予的稱謂……因此,今天我想求問神:祢怎麼稱呼我?不是我與周遭的人所叫我的名字,而是主所呼喚我的那個名字,我渴望知道。當然,那落差越大,就越是刺痛。然而不知道那落差、就這樣活下去,才更加危險。因此我禱告,願我不再停留在自我安慰的地方,而能在神面前如實地站立,從那裡重新謙卑地悔改,重新出發。神啊,求祢使我能用祢的眼光來省察自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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