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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야고보서 2:14–26

    今日默想:雅各書 2:14–26

    한경우··조회 37

    제목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어제 우리는 영광의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을 발등상 아래로 보내던 교회를 보았다. 그래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지 않느냐고.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묻는다.

    약 2:14-1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야고보는 '누가 믿음이 있으면'이라고 하지 않고, '누가 믿음이 있노라 하고'라고 한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믿음이 있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묻는다. 믿음이 구원하느냐는 질문이 아니다. 말뿐인 그런 믿음이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한 장면을 보여 준다. 헐벗고 굶주린 형제가 찾아왔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고 그냥 돌려보낸다. 말만 들으면 경건한 축복이다. 하지만 그 말로는 아무도 따뜻해지지 않고, 아무도 배부르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야고보는 지금 머릿속의 신학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배고픈 형제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무엇을 하는지를 묻고 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리고 야고보는 이런 반론도 예상한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대답은 분명하다. 행함 없이 네 믿음을 내게 보여 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겠다. 믿음은 마음속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결국 행함을 통해서다.

    약 2:19-20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이스라엘이 날마다 외우던 가장 정통적인 신앙고백이다. 맞다. 그 고백은 옳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것을 믿는다. 그것도 떨면서 믿는다. 그러니 옳은 고백을 안다는 것만으로는 귀신보다 나을 것이 없다. 문제는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옳은 고백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데 있다.

    그리고 20절을 원문으로 읽으면 야고보의 말놀이가 보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문장에서 '행함 없는'은 코리스 톤 에르곤(χωρὶς τῶν ἔργων)이고, '헛것'은 아르게(ἀργή)다. '헛것'으로 옮긴 아르게는 '행함, 일'을 뜻하는 에르곤(ἔργον) 앞에 부정의 '아'(ἀ-)가 붙어 줄어든 말로, 문자 그대로 '일이 없는, 일하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장터에 하는 일 없이 '놀고' 서 있던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인 바로 그 말이다. 그러니 야고보의 문장을 이렇게 들을 수 있다. 에르곤이 없는 믿음은 아르게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일하지 않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붙든 사람을 야고보는 '허탄한', 곧 속이 텅 빈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야고보는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운다. 먼저 아브라함이다.

    약 2:21-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야고보와 바울이 부딪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순서를 보아야 한다. 23절이 인용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 15장의 말씀이다. 그때는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하나님은 밤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며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이삭이 번제 나무를 질 만큼 자랐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칼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다. 그래서 야고보는 15장의 말씀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모리아 산의 순종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니다. 이미 의로 여겨진 그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음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22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 곧 믿음이 가만히 있지 않고 아브라함의 손과 발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되다'는 1장에서 인내가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고 할 때의 그 말이다. 믿음은 처음부터 다 자란 채로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순종하는 가운데 자라서 그 목적에 이른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불렸다.

    약 2:24-25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 말씀은 행함이라는 값을 믿음에 보태야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말처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

    그래서 야고보는 두 번째 증인으로 기생 라합을 세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옆에 이방의 기생을 나란히 세운 것이다. 어떤 사람도 믿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라합이 한 일을 보라. 라합은 목숨을 걸고 사자들을 집에 받아들여 숨겨 주었고, 살 길을 열어 다른 길로 보냈다. 반면 16절의 사람은 굶주린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는 말만 하고 보냈다. 한 사람은 말만 하고 보냈지만, 라합은 받아들이고 살려서 보냈다. 이것이 말뿐인 믿음과 일하는 믿음의 차이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몸이 숨 없이 살 수 없듯, 믿음도 행함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숨이 멎은 몸은 겉모양이 그대로여도 죽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고백의 모양을 다 갖추고 있어도 죽은 것이다. 그러니 행함은 믿음에 붙여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이 아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숨을 쉰다.

    그래, 야고보는 믿음에 선행이라는 값을 보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같은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순종하고 이웃을 돌보는 가운데 일하며, 그 행함을 통해 온전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신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루터를 떠올린다. 루터는 특히 이 구절 때문에 야고보서가 바울과 부딪친다고 보았고, 한때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불렀다. 아마 이 구절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만큼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장로교 목사라서 그런지 이 본문 앞에 설 때마다 야고보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자꾸 강조하려 한다. 그래, 맞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 야고보가 내게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세상과 우리 공동체 앞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말이 아니라 행함이다. 굶주린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 빵을 쥐여 주는 것이다. 물론 그 행함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행함이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나는 우리 공동체를 떠올리며 소망한다. 우리의 믿음이 말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드러나기를...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세상 앞에 그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그리고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행함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中文 AI翻譯

    標題:信心是與他的行為並行

    昨天我們看見一個教會,口裡說信榮耀的主,卻叫穿著骯髒衣服的人坐在腳凳下。所以雅各警告說,對不憐憫人的人,也要受無憐憫的審判。這時,或許有人會反問:可是我們不是有信心嗎?今天的經文正是要問:那「信心」究竟是怎樣的信心。

    雅 2:14-16 我的弟兄們,若有人說自己有信心,卻沒有行為,有甚麼益處呢?這信心能救他嗎?15 若是弟兄或是姊妹赤身露體,又缺了日用的飲食,16 你們中間有人對他們說:「平平安安地去吧!願你們穿得暖,吃得飽」,卻不給他們身體所需用的,這有甚麼益處呢?

    這裡有一句話不可錯過。雅各不是說「若有人有信心」,而是說「若有人說自己有信心」。因為說自己有信心,和真正有信心,是兩回事。所以他問:「這信心能救他嗎?」這不是在問信心能不能救人,而是在問:那種只停留在嘴上的信心,能救人嗎?

    接著雅各呈現一個場景。一位赤身露體、挨餓的弟兄來了,有人對他說「平平安安地去吧!願你們穿得暖,吃得飽」,就打發他走了。單聽這話,是很敬虔的祝福。但這些話不能叫任何人暖和,也不能叫任何人吃飽。那麼有甚麼益處呢?雅各此刻不是在進行腦袋裡的神學辯論,他是在問:在飢餓的弟兄面前,我們的信心究竟做了甚麼。

    雅 2:17 這樣,信心若沒有行為就是死的。

    雅各也預料到這樣的反駁:信心和行為難道不能分開存在嗎?然而雅各的回答很清楚:你將你沒有行為的信心指給我看,我便藉著我的行為,將我的信心指給你看。信心在心裡,眼睛看不見。那麼信心要如何顯明出來呢?終究是透過行為。

    雅 2:19-20 你信神只有一位,你信的不錯;鬼魔也信,卻是戰驚。20 虛浮的人哪,你願意知道沒有行為的信心是死的嗎?

    「神只有一位」是以色列人每天背誦、最正統的信仰告白。沒錯,這告白是對的。可是鬼魔也信,而且是戰驚地信。所以單單知道正確的告白,並不比鬼魔好到哪裡去。問題不在於告白的內容,而在於以為只要有正確的告白就足夠了。

    而若用原文讀第20節,就會看見雅各的文字遊戲。「沒有行為的信心是死的」這句話中,「沒有行為」是 χωρὶς τῶν ἔργων(chōris tōn ergōn),「死的」(韓文譯作「虛空的」)是 ἀργή(argē)。argē 是在意指「行為、工作」的 ἔργον(ergon)前面加上否定的「a」(ἀ-)而縮合成的字,字面意思就是「沒有工作的、不做工的」。這正是主耶穌在葡萄園的比喻中,用來形容那些在市上無所事事「閒站」之人的同一個字。所以雅各這句話可以這樣聽:沒有 ergon 的信心是 argē。沒有行為的信心,就是不做工的信心。而雅各稱抓著這種信心的人為「虛浮的人」,也就是裡面空空的人。

    那麼,活的信心是怎樣的呢?雅各立了兩個人作見證。首先是亞伯拉罕。

    雅 2:21-23 我們的祖宗亞伯拉罕把他兒子以撒獻在壇上,豈不是因行為稱義嗎?22 可見,信心是與他的行為並行,而且信心因著行為才得成全。23 這就應驗經上所說:「亞伯拉罕信神,這就算為他的義。」他又得稱為神的朋友。

    因為「因行為稱義」這句話,許多人認為雅各和保羅互相衝突,因為保羅說亞伯拉罕是因信稱義。但首先要看順序。第23節引用的「亞伯拉罕信神,這就算為他的義」,是創世記15章的話。那時以撒還沒有出生。神指著夜空的眾星應許他,亞伯拉罕信了這應許,神就以這信為他的義。

    此後歲月流轉,以撒長大到能背燔祭的柴時,神吩咐亞伯拉罕把這兒子獻上。亞伯拉罕舉起了刀。於是神說:「現在我知道你是敬畏神的了。」所以雅各說,15章的話在這時「應驗」了。不是摩利亞山上的順服使亞伯拉罕成為義人,而是那早已被算為義的信心,在神面前顯明為活的信心。

    而第22節更往前一步:信心是與他的行為並行。也就是說,信心並沒有靜止不動,而是推動了亞伯拉罕的手和腳。而且信心因著行為得以成全。這裡的「成全」,就是第1章說忍耐使人「成全」時所用的同一個字。信心不是一開始就以完全長成的樣子賜下的,而是在信靠神、一步步順服的過程中長大,達到它的目的。亞伯拉罕就這樣被稱為神的朋友。

    雅 2:24-25 這樣看來,人稱義是因著行為,不是單因著信。25 妓女喇合接待使者,又放他們從別的路上出去,不也是一樣因行為稱義嗎?

    「不是單因著信。」這句話並不是說,要在信心上加上行為這筆代價才能得救。正如宗教改革者所說,我們唯獨因信稱義。然而,使我們稱義的那信心,從來不是單獨存在的。

    所以雅各立妓女喇合為第二位見證人。他把一個外邦妓女,與以色列的祖宗亞伯拉罕並列。這表示任何人都能成為信心的見證人。再看喇合所做的:她冒著生命危險,把使者接進家中藏起來,又為他們開出生路,從別的路送他們出去。相反地,第16節的那個人對挨餓的弟兄只說「平平安安地去吧」,就打發他走了。一個人只用嘴說說就送走了,喇合卻是接納、救活之後才送走。這就是嘴上的信心與做工的信心之間的差別。

    雅 2:26 身體沒有靈魂是死的,信心沒有行為也是死的。

    身體沒有氣息就不能活,信心離了行為也不能活。斷了氣的身體,即使外表依舊,也是死的。同樣,沒有行為的信心,即使具備了告白的一切樣式,也是死的。所以行為不是一種可有可無、附加在信心上的裝飾。活的信心必定會呼吸。

    是的,雅各並不是叫我們在信心上加上善行的代價。但他也不把口說相信和真正信神視為同一回事。信神的信心,會在順服和照顧鄰舍中做工,並藉著這些行為得以成全。而神看重的正是這樣的信心。

    今天默想這段經文時,我想起了路德。路德特別因為這段經文,認為雅各書與保羅相衝突,甚至一度稱雅各書為「稻草書信」。這段經文大概是最主要的原因。雅各書就是這麼強調行為。但坦白說,或許因為我是長老會的牧師,每次站在這段經文面前,總是忍不住先強調:雅各並沒有放棄因信得救。是的,沒錯,我們唯獨因信得救。然而,今天雅各問我的並不是這個。他問的是:那麼這信心在世界和我們的群體面前,是如何顯明出來的?而那條路不是言語,而是行為。不是只對挨餓的弟兄說「平平安安地去吧」,而是把餅放在他手中。當然,這些行為不可以是做給人看的虛假,而應當是信神的信心自然呼吸出來的行為。所以今天,我想著我們的群體,懷著盼望:願我們的信心不停留在言語上,而是在生命中彰顯出來……願我們成為彼此補足需要、在世人面前活出這信心樣式的群體……我也如此禱告:神啊,求祢使我們的信心與我們的行為並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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