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야고보서 2:1–13
今日默想:雅各書 2:1–13
제목 :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1장을 마쳤다. 그런데 2장은 바로 그 반대 장면,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이 밀려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단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1장 1절의 인사에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바로 여기서다. 야고보는 그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부른다. 왜 하필 차별을 금하는 자리에서 영광을 말하는가? 그 영광 앞에 서면 세상의 영광은 빛을 잃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세상의 영광에 눈이 부시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차별하여 대하다'는 원문에서 '얼굴을 취하다', 곧 사람을 겉모습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과 사람을 겉모습으로 대하는 태도는 함께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한 장면을 보여 준다.
약 2:2-4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 사람들은 빛나는 옷에 눈길을 주며 좋은 자리를 내어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서 있든지 발등상 아래 앉으라고 한다. 이 일이 예배 시간에 일어난 것인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교회가 다툼을 판결하던 자리로 본다. 유대 랍비들의 법정 규정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송사할 때 둘 다 앉히거나 둘 다 세우라는 규정이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자리로 읽는다. 어느 쪽으로 읽든 야고보가 4절에서 그들을 '판단하는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같다. 그 사람의 진실이 아니라 옷차림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야고보는 부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하지 않는다. 부자만 높이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죄다.
그런데 '남루한 옷'으로 옮긴 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스가랴서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입고 있던 '더러운 옷'에 쓰인 바로 그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를 내쫓지 않으셨다.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바로 그렇게 더러운 옷을 벗고 은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가 남루한 옷을 입은 형제를 발등상 아래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정반대로 하셨다. 세상이 가난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그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해하면 안 된다. 가난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만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먼저 시작하셨다. 그래서 부한 자는 스스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긍휼에 돌리게 하신다. 그리고 순서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믿음이 부요한 사람을 골라 택하신 것이 아니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 선택이 먼저이고 믿음은 그 은혜의 결과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이 높이신 바로 그 사람을 업신여겼다. 하나님의 질서를 뒤집은 것이다.
약 2:8-9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최고의 법'은 원문에서 '왕의 법'이다. 앞 절에서 가난한 자에게 약속하신 '나라'와 같은 뿌리의 말이다.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이 주신 법,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법이다. 그런데 이 계명이 기록된 레위기 19장을 보면, 바로 몇 절 앞에 이런 계명도 있다. 재판할 때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고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같은 장의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것은 모든 죄가 다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11절이 그 이유를 말한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 계명을 주신 분은 한 분이시다. 그러니 내 마음에 드는 계명은 지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계명은 잘라 낸다면, 그것은 계명 하나를 어긴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분을 거스른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한 번이라도 넘어지면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넘어진다. 다만 신자는 넘어져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존중하고, 넘어지면 돌이켜 다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야고보가 정죄하는 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어떤 계명은 처음부터 내 삶에서 빼 버리는 태도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맺는다.
약 2:1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유의 율법'은 율법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게 하는 길이 된 것이다. 그래, 바로 그 율법 앞에서 우리는 모두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율법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선다. 그래,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이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런데 그 긍휼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받은 긍휼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 긍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베푸는 긍휼은 내가 먼저 긍휼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는 한 가지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단 몇 초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정해지고, 그 첫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을 겉모습으로 재고 나누는 것은 어쩌면 죄로 기울어진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런 첫인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루한 옷을 보고 돌아서지 않으셨다. 내가 받은 그 긍휼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말씀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말씀을 너무 잘 안다.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과 수많은 실수로 가득 찼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부족한 나를 품어 준 것은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였다. 그래 나도 한때 그 남루한 옷을 입고 들어섰던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품어 준 그 은혜를 알기에 나는 조금이라도 그 긍휼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자꾸만 내 본성이 고개를 든다. 나도 모르게 사람을 겉모습으로 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나를 다시 단련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하나님, 내가 받은 긍휼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긍휼로 사람을 대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標題:憐憫勝過審判
昨天我們以這段話語結束了第1章:在神我們的父面前,那清潔沒有玷污的虔誠,就是看顧在患難中的孤兒寡婦。然而第2章一開始,卻是完全相反的景象——在教會裡,貧窮人被排擠到一旁。
雅 2:1 我的弟兄們,你們信奉我們榮耀的主耶穌基督,便不可按著外貌待人。
整卷雅各書中,耶穌的名字只出現兩次。一次是在1章1節的問安中,另一次就是在這裡。雅各稱這位耶穌為「榮耀的主」。為什麼偏偏在禁止偏待人的地方提到榮耀呢?因為站在那榮耀面前,世上的榮耀就黯然失色。反過來說,若我們被世上的榮耀晃花了眼,就表示我們有多麼輕看基督的榮耀。「按著外貌待人」在原文是「取人的臉面」,也就是憑外表來接納人。所以,信靠榮耀之主的信心,與憑外貌待人的態度,是無法並行的。
接著,雅各讓我們看見一個場景。
雅 2:2-4 若有一個人帶著金戒指,穿著華美衣服,進你們的會堂去;又有一個窮人穿著骯髒衣服也進去;3 你們就重看那穿華美衣服的人,說:「請坐在這好位上」;又對那窮人說:「你站在那裡」,或「坐在我腳凳下邊」。4 這豈不是你們偏心待人,用惡意斷定人嗎?
有一個戴著金戒指、穿著光鮮衣服的人,和一個穿著破舊衣服的窮人走進會堂。人們把目光投向那光鮮的衣服,讓出好位子給他,卻對窮人說:你站著,或坐在腳凳下邊。這件事是否發生在敬拜的時候,看法不一。有些神學家認為這是教會審斷紛爭的場合。猶太拉比的法庭規定中,有一條是:富人與窮人一同興訟時,要讓兩人都坐,或兩人都站。也有人把它解讀為設立教會職分的場合。無論怎麼讀,雅各在第4節稱他們為「斷定人的」,理由都是一樣的:他們不是憑那人的真實,而是憑衣著來論斷。不過有一點不可誤解:雅各並沒有說向富人以禮相待本身是罪。只抬舉富人、藐視窮人,這才是罪。
此外,譯為「骯髒衣服」的這個詞不可輕輕放過。這個詞正是撒迦利亞書中,大祭司約書亞所穿「污穢的衣服」所用的同一個字。然而神並沒有趕走穿著污穢衣服的約書亞,反而脫去他污穢的衣服,給他穿上華美的衣服。請想一想,我們正是這樣脫去污穢衣服、穿上恩典之衣的人。而這樣的我們,竟把穿著破舊衣服的弟兄打發到腳凳底下。
雅 2:5 我親愛的弟兄們,請聽,神豈不是揀選了世上的貧窮人,使他們在信上富足,並承受他所應許給那些愛他之人的國嗎?
神所做的正好相反。祂揀選世人看為貧窮的人,使他們在信上富足,並使他們成為那國的承受者。但在這裡也不可誤解:這不是說貧窮是得救的條件。神並非只揀選貧窮人,而是從他們先開始。因此,祂叫富足的人無法自誇,也叫貧窮的人將自己的一切歸於神的憐憫。我們也要留意次序:神不是挑選信心富足的人來揀選,而是揀選了他們,使他們在信上富足。揀選在先,信心是那恩典的結果。然而教會卻輕看了神所抬舉的那人,這就是顛倒了神的秩序。
雅 2:8-9 經上記著說:「要愛人如己。」你們若全守這至尊的律法才是好的。9 但你們若按外貌待人,便是犯罪,被律法定為犯法的。
「至尊的律法」在原文是「王的律法」,與前一節應許給貧窮人的「國」同一個字根。這是那國的王——神——所賜的律法,就是「要愛人如己」。而記載這條誡命的利未記19章,就在前面幾節還有這樣的誡命:審判時不可偏護窮人,也不可重看有勢力的人。所以,口說愛鄰舍卻偏待人,就是自己違背了同一章的誡命。
雅 2:10 因為凡遵守全律法的,只在一條上跌倒,他就是犯了眾條。
這不是說所有的罪都一樣。第11節說明了原因:那說「不可姦淫」的,也說「不可殺人」。頒布誡命的是同一位。所以,若我遵守合我心意的誡命,卻剪除不合我心意的誡命,那就不只是違背一條誡命,而是悖逆那位頒布誡命的主。但這話也不是說,只要跌倒一次就不是真信仰。我們都會跌倒。只是信徒即使跌倒,仍尊重神一切的誡命;跌倒了,就回轉,再次來到基督面前。雅各所定罪的不是軟弱,而是從一開始就把某些誡命從自己生命中刪除的態度。
所以雅各這樣作結:
雅 2:12-13 你們既然要按使人自由的律法受審判,就該照這律法說話行事。13 因為那不憐憫人的,也要受無憐憫的審判;憐憫原是向審判誇勝。
「使人自由的律法」不是脫離律法、隨心所欲的自由。我們是在律法中享受自由的人。也就是說,在基督裡,我們從律法的咒詛中得了自由,卻不是從順服神這件事上得了自由。律法不再是定我們罪的法,而成了使我們活在愛中的道路。是的,正是在這律法面前,我們每個人都需要憐憫。經上說,在一條上跌倒,就是犯了眾條。那麼,沒有一個人能靠自己站立在律法面前。我們唯獨靠神的憐憫站立。是的,憐憫向審判誇勝。在最後審判的時刻,得勝的終究是神的憐憫。然而,領受了憐憫的人若不向別人施憐憫,他就是不認識自己所領受憐憫的人。我們不是用自己的憐憫去換取神的憐憫。我所施的憐憫,乃是我先蒙了憐憫的證據。
今天默想這段話語時,我很想為自己找個藉口。心理學家說,人初次見到某人,短短幾秒內就會形成第一印象,而這第一印象很難改變。這樣看來,以外表衡量人、區分人,或許正是我們傾向罪的本性。但我們不可忘記一件事:我們領受神的憐憫,與這樣的第一印象毫無關係。神沒有因看見我們破舊的衣服就轉身離去。我若不忘記自己所領受的憐憫,並為這恩典感恩,就也當向別人施予這憐憫。這就是今天的話語。老實說,這段話我再熟悉不過了。我曾有過極其貧窮的歲月,也有過充滿無數錯誤的日子。那時接納不足的我的,是神和教會群體。是的,我也曾是穿著那破舊衣服走進來的人。正因為知道那接納我的恩典,我努力多少活出一些憐憫。但我的本性總是一再抬頭。我常發現自己不知不覺又在以外表衡量人。所以今天,我再次在神面前操練自己,並且禱告:神啊,求祢使我不忘記自己所領受的憐憫;使我成為以這憐憫待人的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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