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21:13–25
今日默想:士師記 21:13–25
제목 :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어제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한 맹세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맹세를 꺼내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처녀 사백 명을 데려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백 명으로도 문제를 다 풀지 못하자 한 걸음 더 내려간다.
삿 21: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림몬 바위에서 넉 달을 지내던 베냐민 사람들에게 마침내 평화가 선포된다. 기억할 것이 있다. 19장에서 기브아의 노인은 레위인을 맞으며 '그대는 안심하라'고 했다. 원문에서 같은 말, 샬롬이다. 참극이 일어나기 직전에 들렸던 그 말이 이제 다시 들린다. 그러나 이 샬롬은 야베스 길르앗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도 본문은 '아직도 부족하므로'라고 덧붙인다(14절). 한 지파를 살리려고 한 성읍을 진멸했는데도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삿 21: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본문은 백성이 베냐민을 불쌍히 여긴 까닭을 이렇게 적는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틈을 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본문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말 뒤에 자신들의 선택을 숨길 수는 없다. 어제 본문에서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하고 묻던 이스라엘은 이제 그 틈을 하나님께 돌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틈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는지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베냐민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돌아와 성읍과 사람과 가축까지 친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미스바에서 맹세한 것도, 야베스 길르앗에 용사를 보낸 것도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스라엘이, 이제 그 결과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회중의 장로들이 나선다. 장로들의 고민은 남은 베냐민 사람 이백 명에게 어떻게 아내를 구해 줄 것인가였다. 그러나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맹세가 여전히 길을 막고 있었다(18절). 베냐민을 향해 던졌던 저주가 이제 이스라엘을 묶고 있다. 그리고 장로들의 지혜도 끝내 자기들이 만든 맹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장로들은 실로에서 해마다 열리는 여호와의 절기를 떠올린다.
삿 21: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의 절기에 춤추러 나온 딸들이 매복의 대상이 된다. 매복은 여호수아가 아이 성에서 쓴 전술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전술로 기브아를 쳤고, 이제 베냐민이 같은 방식으로 실로의 딸들을 기다린다. 여기서 '붙들어'로 번역된 말은 시편에서 악인이 가련한 자를 낚아채는 장면에 쓰인 말이다. 장로들은 실로의 아버지들이 항의하면 이렇게 말하겠다고 한다.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22절). 딸을 준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니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한 맹세는 어기지 않으려고 그토록 애쓰면서, 하나님이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 그 일을 스스로 계획했다. 사람의 맹세는 지키고 하나님의 율법은 버린 것이다.
삿 21: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베냐민 자손은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고 성읍을 다시 지었다(23절). 여기서 '붙들어'는 원문에서 빼앗고 강탈한다는 말이다. 본문은 이 일을 혼인이 아니라 강탈로 기록한다. 그리고 모두가 각자의 기업으로 돌아간다. 여호수아서도 같은 모습으로 끝났다.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수 24:28). 그러나 여호수아의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고 돌아갔다. 사사기의 백성은 한 성읍을 진멸하고 여호와의 절기에 나온 딸들을 빼앗은 뒤에 돌아간다. 겉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베냐민은 살아남았고, 성읍은 다시 세워졌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았다. 기브아의 일부 남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마지막에는 장로들이 계획하고 공동체가 승인한 폭력이 되어 있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미가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들었던 그 문장으로 사사기는 끝난다(17:6). 모세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리하지 말지니라'(신 12:8).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간 뒤에는 하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살았다. 그렇다. 사사기에서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울 질서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이 삶의 마지막 기준이 되었다는 뜻이다.
사사기의 문제는 사람들이 길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고, 예배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벧엘에서 울며 기도했고, 여호와의 이름은 끝까지 불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사람들은 그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맹세와 폭력을 돌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앞에서는 하나님께 '어찌하여'를 물으며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 버렸다. 그렇게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로 사사기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언젠가 한 청년이 "사사기 묵상이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 이해가 된다. 사사기에는 너무나 참혹한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이방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땅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하지만 본문을 묵상할수록 나는 계속 내 모습을,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기도는 하면서도 결국 내 뜻대로 하곤 했던 나를 보았다. 그 결과 앞에서는 "하나님, 왜 미리 막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묻곤 했던 나를 보았다. 그런데 그 부끄러운 반성이 오히려 나를 회개의 자리로 이끌었다. 내 잘못을 직면하게 했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했고, 내가 어디서부터 다시 서야 하는지를 보게 했다. 그래서 사사기 묵상은 힘들었지만 감사했다. 이제 사사기를 덮으며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의 기준을 따라 내 자리로 돌아가는가… 그래, 오늘도 내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자리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도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말씀을 붙들기를 기도한다.
標題:各人任意而行
在昨天讀的經文中,以色列沒有把自己所起的誓放在神面前。他們反而又拿出另一個誓言,攻打基列雅比,帶回了四百個處女。然而,以色列發現這四百人仍不足以解決問題,於是又往下走了一步。
士 21:13 全會眾打發人到臨門磐那裡的便雅憫人,向他們說和睦的話。
在臨門磐住了四個月的便雅憫人,終於聽見和睦的宣告。有一件事值得記得:第19章裡,基比亞的老人迎接利未人時說:「願你平安」。在原文中是同一個字——沙龍(shalom)。慘劇發生前一刻所聽見的那句話,如今再次響起。然而,這個沙龍卻是建立在基列雅比的死亡之上。即便如此,經文還補上一句:「還是不夠」(14節)。為了保全一個支派而滅了一座城,問題卻仍未解決。
士 21:15 百姓為便雅憫人後悔,因為耶和華使以色列人中缺了一個支派。
經文這樣記載百姓憐恤便雅憫的原因:是因為耶和華使以色列支派中出現了缺口。是的,經文確實這樣說。然而以色列不能把自己的選擇藏在這句話背後。昨天還在問「為何以色列中有這樣的事」的以色列,如今把這個缺口歸給神。但我們也知道,在這缺口裂開的過程中,以色列做了什麼。神所應許的,是把便雅憫交在以色列手中。戰役結束後回頭擊殺城邑、人民,連牲畜也不放過的,是以色列。在米斯巴起誓的,是以色列;派勇士到基列雅比的,也是以色列。沒有求問神、任憑己意而行的以色列,如今卻把後果歸給神。
會眾的長老出面了。長老們苦惱的是,該如何替剩下的兩百個便雅憫人找到妻子。然而,「將女兒給便雅憫人為妻的,必受咒詛」這個誓言依然擋住了去路(18節)。原本向便雅憫拋出的咒詛,如今反過來捆綁了以色列。而長老們的智慧,終究也跳不出自己所立誓言的框架。長老們想起了每年在示羅舉行的耶和華節期。
士 21:21 若見示羅的女子出來跳舞,就從葡萄園出來,在示羅的女子中各搶一個為妻,回便雅憫地去。
在耶和華節期出來跳舞的女兒們,竟成了埋伏的對象。埋伏是約書亞在艾城所用的戰術。以色列用這戰術攻打了基比亞,如今便雅憫也用同樣的方式等候示羅的女兒們。這裡譯作「搶」的字,在詩篇中用於描寫惡人擄掠困苦人的場景。長老們說,若示羅的父親們來爭論,就要這樣回答:「這並不是你們給他們的;若是你們給的,就算有罪」(22節)。意思是:女兒不是給出去的,而是被搶走的,所以不算違背誓言。然而神的律法說:「拐帶人口,或是把人賣了,或是留在他手下,必要把他治死」(出 21:16)。所以,以色列為了不違背自己所起的誓而費盡心思,卻親手策劃了神說必要治死的那件事。守住了人的誓言,卻丟棄了神的律法。
士 21:24 當時以色列人離開那裡,各歸本支派、本宗族、本地業去了。
便雅憫人照著他們的數目,從跳舞的女子中搶來為妻,並重建城邑(23節)。這裡的「搶」,在原文中是奪取、強擄的意思。經文記錄這件事,不是婚姻,而是強擄。然後眾人各歸自己的地業。約書亞記也是以同樣的畫面結束:「約書亞打發百姓各歸自己的地業去了」(書 24:28)。然而約書亞時代的百姓,是在與神重新立約之後才回去的。士師記的百姓,卻是在滅了一座城、搶走在耶和華節期中出來的女兒們之後回去的。表面上看來,一切問題都解決了:便雅憫存活下來,城邑重建了,大家都回家了。然而,什麼都沒有恢復。基比亞部分男人所犯的罪,到最後竟變成了由長老策劃、群體認可的暴力。
士 21:25 那時,以色列中沒有王,各人任意而行。
士師記以米迦故事開始時所聽見的那句話作結(17:6)。摩西早就說過:「我們今日在這裡所行的,是各人行自己眼中看為正的事;你們將來不可這樣行」(申 12:8)。以色列進了那地之後,偏偏就照著被禁止的那種方式生活。是的,在士師記中,沒有王意味著沒有能建立神公義的秩序。而更深一層,則意味著自己的判斷取代了神的話語,成為生命最終的標準。
士師記的問題,不在於人們不認識路。有神的話語,有祭司,也有敬拜。以色列曾在伯特利哭泣禱告,耶和華的名直到最後都被呼求。然而直到最後,人們仍不肯在那話語面前回轉,放下自己的誓言與暴力。面對後果時,又向神問「為何」,把責任推給神。就這樣,各人回到自己的地方。
今天,我們要為士師記的漫長旅程畫下句點。曾有一位青年對我說:「默想士師記好辛苦。」是啊,我能理解。士師記記載了太多慘烈的景象,而且不是發生在外邦之地,而是在神所賜給以色列的土地上。然而,越默想經文,我越是不斷回頭看見自己,也看見我們群體的樣子。我看見那個一邊禱告、最後卻還是照自己意思去做的我。我看見那個面對後果時,總是問「神啊,祢為什麼不事先攔阻」的我。然而,那份羞愧的反省反而帶我來到悔改的地方。它使我正視自己的過錯,使我在神面前回轉,也讓我看見自己該從哪裡重新站起來。所以,默想士師記雖然辛苦,卻充滿感恩。如今合上士師記,我再次自問:我是照著誰的標準回到自己的位置……是的,今天也盼望自己不是照著己意,而是照著神的話語回到自己的位置。也禱告我們的群體,在各自的位置上,緊緊抓住同一份話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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