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8:1–21
今日默想:士師記 8:1–21
제목 : 전쟁은 승리했으나
전투가 끝나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따졌다. 왜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드온의 전령을 받고 요단 나루를 점령했고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였다(7:24-25). 결코 작은 공이 아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이 '크게 다투는지라'라고 적는다. 자칫하면 내전이 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다만 송병현 교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들이 정말 동족을 위해 싸울 마음이 있었다면, 미디안의 압제가 극심했던 지난 칠 년 동안 왜 나서지 않았는가.
하지만 기드온은 이 위기를 잘 넘긴다. 그는 자기 공로를 바닥까지 낮춘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우리 집안이 거둔 가장 좋은 것이 당신들이 흘린 부스러기만도 못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빈말이 아니다. 기드온은 승리의 주체로 하나님을 세웠고, 이 전쟁에서 에브라임이 한 역할을 크게 인정했다. 에브라임의 노여움은 풀렸다. 그러나 훗날 입다는 이런 에브라임의 똑같은 도발 앞에서 이 일을 풀지 못해 동족 사만 이천 명이 죽는다(12:1-6). 그러니 기드온이 여기서 한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을 건넌 뒤부터 같은 사람의 말투가 달라진다.
삿 8:4-5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기드온이 숙곳에서 한 말을 보면 '나를 따르는 백성', '나는 추격하고 있노라.' 말하는데 이 두 문장 안에 하나님이 없다. 조금 전 에브라임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분명히 말했던 사람인데, 여기서는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기드온이 하나님을 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하나님의 자리가 줄고 '나'의 자리가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여튼 숙곳은 기드온의 요구를 거절했다. 숙곳 사람들의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다. 세바와 살문나는 아직 잡히지 않았고 미디안 군대도 만 오천 명이 남아 있다. 숙곳은 요단 동편에 있으니 보복이 닥치면 가장 먼저 당할 자리다. 그리고 그들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는 굶주리고 지친 삼백 명뿐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 동족의 구원군에게 떡 한 덩이를 내주지 않았다.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는 대답에는 오히려 비아냥이 섞여 있다. 이처럼 그들은 눈앞의 미디안이 무서웠고, 하나님의 구원은 그만큼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삿 8:7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다. 8장 3절에서 기드온이 쓴 말은 일반 명칭인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가 처음 나오는 곳이 바로 이 자리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이름을 사람을 설득하는 데 쓰지 않고, 동족을 치겠다는 선언 안에 넣어 쓴 것이다. 브누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설득하지 않고 망대를 헐겠다고 말하고 떠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말한 대로 실행한다. 숙곳의 장로 칠십칠 명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고, 브누엘의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인다. 숙곳 사람들이 실제로 죽었는지는 히브리어 본문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브누엘에 대해서는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라고 기록한다. 웹은 그의 주석에서 여기에 한마디를 붙인다. 사사기에서 구원자가 자기 동족을 향해 이렇게 직접 칼을 든 장면은 이것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디안의 두 왕을 처형하는 장면에 이르면 전쟁의 이유마저 달라져 있다.
삿 8:18-19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이제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다볼에서 죽은 자기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전쟁이 한 사람의 복수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수의 맹세에 붙인 말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였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동족을 치겠다는 선언에서이고 다른 한 번은 형제의 피를 갚겠다는 맹세에서다.
7장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군대를 줄이셨고, 기드온이 말하기도 전에 그의 두려움을 아셨고, 적진에 꿈을 준비하셨고, 적의 칼이 서로를 향하게 하셨다. 그런데 8장으로 넘어오면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현저히 뒤로 물러나고 기드온의 말과 행동이 전면에 나온다. 이런 기드온의 행동이 점점 개인의 복수와 왕 같은 처신으로 흘러가는 것과 맞물리면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기드온을 나쁜 사람이라고 잘라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사람이 조금 뒤에 사사기 전체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왕이 되어 달라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김지찬 교수는 이 대목을 사사기 전체의 열쇠로 읽는다. 그 시대에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말한 사람은 기드온 하나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8:28). 사사기에서 이 말이 나오는 것도 이 기드온의 때가 마지막이다. 또한 히브리서도 그를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세운다(히 11:32).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면서 균형있게 기드온을 봐야 한다.
그렇기에 본문은 기드온을 처음부터 악한 사람으로 그리지도 않고 끝까지 이상적인 영웅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다만 믿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힘과 자기 상처와 자기 명예에 조금씩 끌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에브라임 앞에서 기드온은 자기 이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였다. 그러나 요단을 건넌 뒤에는 그의 말에서 '나'가 커지기 시작했고, 구원의 전쟁은 조금씩 자신의 전쟁과 자신의 복수로 변해 갔다. 문제는 기드온이 하나님을 모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고백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는 것이다.
오늘 묵상을 통해서 나를 돌아 보게하는 것이 바로 이런 기드온의 모습이다. 특별히 기드온은 맏아들 여델에게 미디안의 두 왕을 죽이라고 명했는데, 그 소년은 아직 어려서 두려워 칼을 빼지 못했다. 한 신학자는 이처럼 두려워 칼을 들지 못하는 기드온의 아들 모습이 바로 전쟁을 시작할 때 기드온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기드온 자신이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몇 번이고 그 두려움을 감당해 주셨다. 그런데 이제 기드온은 두려워하는 아들을 전쟁과 복수의 한복판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 훗날 기드온의 또 다른 아들은 '내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의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게 된다. 이런 기드온의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 보게 된다. 나는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해 왔는지 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은혜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배웠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자녀들이 보는 것은 내가 강단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집에서 사는 모습이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 내가 어떤 말투가 되는지, 거절당했을 때 내가 어떤 얼굴이 되는지,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챙기는지를 자녀들은 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드온이 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옳았다. 문제는 그 고백과 그의 삶 사이가 멀었다는 것이고, 그의 자녀들은 바로 그 사이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내 강단에서의 말과 내 삶 속의 행동을 돌아보며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세우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標題:戰爭雖已得勝
戰鬥結束後,以法蓮人來找基甸理論。他們質問為何一開始不召集他們。這並不表示他們什麼都沒做。他們接到基甸的傳令後,佔領了約旦河渡口,並殺了米甸的兩個首領俄立和西伊伯(7:24-25)。這絕不是小功勞。所以經文才記載他們「與基甸大大地爭吵」。這是一個稍有不慎就可能引發內戰的時刻。不過宋炳鉉教授提出這樣的疑問:如果他們真心願意為同胞而戰,那麼在米甸壓迫最為嚴酷的過去七年間,他們為何沒有挺身而出呢?
然而基甸巧妙地化解了這場危機。他將自己的功勞降到最低。「以法蓮拾取剩下的葡萄,豈不比亞比以謝所摘的更好嗎?」意思是說,我們家族所收穫的最好成果,還比不上你們留下的碎屑。接著他又補充說:「神已將米甸人的首領俄立和西伊伯交在你們手中了。」這不是客套話。基甸把神立為得勝的主體,並且高度肯定了以法蓮人在這場戰爭中所扮演的角色。以法蓮人的怒氣就此平息。然而日後耶弗他面對以法蓮人同樣的挑釁時,卻未能化解此事,導致四萬二千同胞喪命(12:1-6)。由此可見,基甸在此所做的絕非小事。
但問題是,渡過約旦河之後,同一個人的言語口氣卻變了。
士 8:4-5 基甸和跟隨他的三百人到了約旦河,過了河,雖然疲乏,還是追趕。5 他對疏割人說:「求你們拿餅來給跟隨我的人吃,因為他們疲乏了;我們追趕米甸人的兩個王西巴和撒慕拿。」
看基甸在疏割所說的話,「跟隨我的人」、「我在追趕」——這兩句話裡完全沒有提到神。就在剛才,他在以法蓮人面前還明確地說是神所成就的,可是這裡卻沒有再提及神。當然,基甸並非忘記了神。但不可否認的是,在他的話語中,神所佔的位置正逐漸縮小,「我」的位置卻正在擴大。
無論如何,疏割拒絕了基甸的請求。疏割人的恐懼是可以理解的。西巴和撒慕拿尚未被擒,米甸軍隊還剩一萬五千人。疏割位於約旦河東岸,若遭到報復,將首當其衝。而他們眼前所見的,不過是又餓又累的三百人。但是「可以理解」和「正確」是兩回事。他們同為以色列百姓,卻連一塊餅都不肯給予前來拯救同胞的軍隊。「我們豈可把餅給你的軍隊呢?」這句回答中甚至帶著幾分嘲諷。由此可見,眼前的米甸令他們恐懼,而神的拯救對他們而言,卻顯得那麼不真實。
士 8:7 基甸說:「這樣,耶和華將西巴和撒慕拿交在我手裡以後,我就用曠野的荊條和枳棘打你們這些人的肉。」
這裡有值得留意之處。八章3節基甸所用的稱呼是一般性的「神」。而立約之名「耶和華」,正是首次出現在這裡。基甸並未用耶和華的名去說服人,而是把這聖名用在了要攻打同胞的宣告當中。在毗努伊勒也是如此。他沒有嘗試說服對方,只撂下要拆毀城樓的話便離去了。
回程途中,他果真照所說的去做。他抓住疏割的七十七位長老,用曠野的荊條和枳棘懲罰他們,並拆毀了毗努伊勒的城樓,殺了那城裡的人。疏割人是否真的被殺,希伯來原文並不明確。但關於毗努伊勒,經文明確記載「殺了那城裡的人」。韋伯在他的注釋中對此加了一句話:在士師記中,拯救者親自對自己同胞舉起刀劍,這是第一次。
而且到了處決米甸兩位君王的場景時,就連戰爭的理由也已經改變了。
士 8:18-19 於是基甸問西巴和撒慕拿:「你們在他泊山所殺的人是怎樣的人?」他們說:「他們好像你,各人都像王子的樣式。」19 基甸說:「他們是我的弟兄,我母親的兒子。我指著永生的耶和華起誓,你們若存留他們的性命,我就不殺你們了。」
如今基甸不再是為以色列報仇,而是在為在他泊山被殺的自己的兄弟報仇。神所開始的拯救之戰,正逐漸轉變為一個人的私人復仇。而這誓言中所用的話,正是「我指著永生的耶和華起誓」。在今天的經文裡,耶和華的名字出現了兩次,一次是在攻打同胞的宣告中,另一次則是在誓言要為兄弟之血報仇之中。
回想第七章:神下了命令,神縮減了軍隊,神在基甸開口之前就已知道他的恐懼,神在敵營中預備了夢境,神使敵人的刀劍彼此相向。然而到了第八章,神的話語與作為顯著退居幕後,基甸自己的話語與行為則走到了前台。當基甸這樣的行動逐漸滑向個人的復仇與君王式的作風時,這樣的變化便顯得格外意味深長。
即便如此,我們也不能斷然地把基甸定義為壞人。因為正是這同一個人,稍後說出了整卷士師記中無人說過的話。當百姓要求他作王時,他這樣回答:「我不管理你們,我的兒子也不管理你們,惟有耶和華管理你們」(8:23)。金志燦教授將這句話視為整卷士師記的鑰匙。他指出,在那個時代,唯獨說出「惟有耶和華要管理你們」這句話的人,只有基甸一人。士師記的作者也記載,在基甸在世的四十年間,那地太平無事(8:28)。這句話在士師記中出現,也是在基甸的時代畫下句點。此外,希伯來書也將他列在信心偉人的行列之中(來11:32)。我們應當記住這一點,以平衡的眼光來看待基甸。
正因如此,經文既不從一開始就把基甸描繪成惡人,也不到最後都將他刻畫為理想的英雄。它只是呈現出,一個原本以信心起步、親身經歷神拯救的人,是如何一點一點地被自己的力量、自己的傷痛、自己的名譽所牽引。在以法蓮人面前,基甸貶低自己的名聲,高舉了神。但渡過約旦河之後,他話語中「我」的份量開始擴大,拯救之戰也逐漸演變為他個人的戰爭與個人的復仇。問題並不在於基甸不再認識神,而在於他認識神的告白,與他實際的生活方式之間,正逐漸拉開距離。
透過今天的默想,讓我省察自己的,正是基甸這樣的樣貌。特別是基甸曾命令長子益帖去殺米甸的兩個王,但那少年因年幼而害怕,不敢拔刀。有位神學家指出,這個因害怕而不敢拔刀的基甸之子的模樣,正是基甸自己當初開戰時的模樣。當年基甸自己害怕時,神一次又一次地為他承擔了那份恐懼。可如今,基甸卻把同樣害怕的兒子,推到戰爭與復仇的最前線。日後,基甸的另一個兒子還頂著「亞比米勒」這個名字生活——意思是「我父是王」。看著基甸的這副模樣,我不禁反省自己。我知道自己一直對兒女說了些什麼——說是神所成就的,說這是恩典,說父親就是這樣蒙教導的。然而,兒女們所看見的,並非我在講台上所說的話,而是我在家中生活的樣子。當我需要開口求人時說話的語氣是什麼樣子,被拒絕時我臉上會露出什麼表情,在無人看見的地方我又暗自計較些什麼——這一切,兒女們其實都看在眼裡。或許基甸對神所作的告白本身並沒有錯。問題在於,那告白與他的生活之間有著距離,而他的兒女,正是在那距離之中成長起來的。因此,願今天成為這樣的一天:省察我在講台上所說的話與我生活中的行為,並藉此稍稍向著神的心意,建立起真實的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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