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고전 14:1–19
今日默想:哥林多前書 14:1–19
제목 : 알아듣는 다섯 마디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12–14장은 하나의 긴 논증이다. 12장이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한 몸, 한 성령)을, 13장이 그 모든 은사를 측정하는 도구인 사랑을 제시했다면, 14장은 그 사랑이라는 잣대를 들고 고린도 교회의 실제 문제—방언과 예언의 공적 사용—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래서 14장에 다시 은사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 사랑은 추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공동체 안에서 아주 구체적인 한 단어로 드러난다. '덕을 세움'이다. 헬라어로 집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결국 '이것이 무엇을 세우는가'에서 드러난다.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바울은 방언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18절). 다만 그는 두 가지를 나란히 놓는다. 자기를 세우는 것과 남을 세우는 것.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후자를 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앙이 내 안의 뜨거운 체험에서 끝나면 그것은 나를 세우는 데서 멈춘 것이다. 그래. 사랑은 그 뜨거움을 옆 사람에게로 흐르게 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다른 사람이 알아들어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피리도 거문고도 음을 구별할 수 없으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고, 군대 나팔이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예화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 없는 방언은 결국 '공기에 대고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아무리 거룩한 말이라도 옆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그 사람은 세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흔한 오해 하나를 미리 막는다. 영과 마음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 본문에서 '또' 라는 말이 중요하다. 영을 버리고 마음을 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과 알아듣는 지성, 뜨거움과 명료함, 이 둘이 함께 갈 때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도 이 본문을 이렇게 주석한다. '이해가 빠진 예배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아니라고. 하나님은 알아듣는 예배를 기뻐하신다'
그러니 바울이 구하라고 하는 것은 은사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고전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렇다 우리는 영적 은사가 풍성해야 한다. 다만 그 풍성함의 방향을 교회를 향해 돌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은사들에 대한 올바른 척도는 '내가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니다. '그것이 누구를 세우는가'이다. 내가 받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공동체로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아직 자기 안에 고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천사의 방언을 할찌라도 그것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면, 옆에 있는 지체들을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이라면, 공동체에서는 절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짧은 몇마디를 통해 진심 어린 사랑의 관심이 더 나은 것이다.
오늘 묵상을 하면서 이 마지막 한 절을 깊이 묵상한다. 솔직히 나는 일만 마디 쪽으로 기울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강단에서 깊은 신학을 풀어내고, 헬라어 한 단어를 길게 설명하고, 멋진 표현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그럴 때 나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것이 누구를 세웠는가를 잊을 때가 있다. 우리 공동체의 예배에는 대학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사업하는 분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함께 예배한다. 그렇기에 삶의 자리도, 알아듣는 언어도 제각각이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내 일만 마디가 그들에게 가닿지 못하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면, 나는 나를 세운 것이지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다섯 마디가 되고 싶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그렇다. 내가 사는 모습이 너무 복잡하고 화려해서 아무도 따라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옆 사람이 알아듣고 "아멘" 하고 화답할 수 있는, 그런 알아듣는 삶의 본보기가 되길 기도한다.
題目:讓人聽懂的五句話
我們一再重複說明,第12至14章是一段完整的論證。第12章論述恩賜的多樣性與合一性(一個身體、一位聖靈),第13章提出衡量一切恩賜的標準——愛,而第14章則拿起「愛」這把尺,說明如何解決哥林多教會的實際問題——說方言與說預言在公共聚會中的使用方式。
因此,第14章再度回到恩賜的話題。然而,愛並不停留在抽象層面,它在群體中以一個非常具體的詞語彰顯出來,那就是「造就」。這個詞在希臘文中有「建造房屋」的意思。愛是否真實,最終在於「它建造了什麼」。
哥林多前書 14:4 說方言的,是造就自己;作先知講道的,乃是造就教會。
在這裡,保羅並非貶低說方言。他自己說方言比任何人都多(第18節)。只是,他將兩件事並排而列:建造自己,與建造他人。他說,愛永遠選擇後者。若信仰只停留在內心熾熱的體驗中,那就只是停在建造自己的層次而已。是的,愛使那份火熱流向身旁的人。
因此,保羅強調他人必須能夠聽懂。他舉例說:笛子或琴若發出的音無從分辨,怎能知道是什麼曲子?軍中號角若吹出不清楚的聲音,又有誰能預備打仗呢?所以保羅說,沒有翻譯的方言,終究不過是「對著空氣說話」。也就是說,無論話語多麼聖潔,若旁邊的人聽不懂,那人就得不到建造。
然而,保羅在此預先阻止了一個常見的誤解——他並沒有將靈與心思對立起來。
哥林多前書 14:15 這卻怎麼樣呢?我要用靈禱告,也要用悟性禱告;我要用靈歌唱,也要用悟性歌唱。
這節經文中,「也要」這個詞至關重要。保羅並非叫人放棄靈、選擇悟性,而是說兩者都重要。也就是說,聖靈的感動與聽得懂的理解,火熱與清晰,這兩者並行,才構成真正的敬拜。因此,加爾文在注釋這段經文時也說:「缺乏理解的敬拜,不是獻給神的合宜敬拜。神喜悅能夠理解的敬拜。」
因此,保羅所要求的,並非減少恩賜。
哥林多前書 14:12 你們也是如此,既是切慕屬靈的恩賜,就當求多得造就教會的恩賜。
「求多得」——是的,我們應當在屬靈恩賜上豐富。只是,要將那豐富的方向轉向教會。因此,衡量恩賜的正確標準,不是「我領受了多少」,而是「它建造了誰」。無論我領受了多少,若它無法流向群體,就仍然積存在自己裡面。所以保羅這樣作結:
哥林多前書 14:19 但在教會中,寧可用悟性說五句教導人的話,強如說萬句方言。
即便說的是天使的方言,若那是為了高舉自己,若那傷害了身旁的肢體,在群體中就需要節制。透過簡短的幾句話,傳遞出發自內心誠摯的愛與關懷,遠比萬語更有價值。
默想到今日的最後這節經文,我將它深深放在心裡。說實話,我是一個很容易傾向「萬句話」那一邊的人。我心裡常常浮起這樣的渴望:要在講台上闡釋深奧的神學,要花很長時間解釋希臘文的某一個字,要用精彩的表達收尾。每當如此,我也確實會感到自己做了一件了不起的事。然而這樣一來,我有時就忘記了:這建造了誰?
我們群體的敬拜中,有大學生、有上班族、有做生意的弟兄姊妹,更重要的是,主日學的孩子們也一同敬拜。因此,每個人的生命處境不同,能聽懂的語言也各不相同。若我那一萬句話,他們無法理解,只是消散在空氣中,那我建造的是自己,而不是教會。
所以,我想成為那五句話。不只是言語上如此,生活上也當如此。我祈願自己的生命樣式,不要複雜華麗得讓人無從閱讀。我禱告,願我能成為讓旁邊的人聽得懂、能夠回應「阿們」的,那樣一個讓人看懂的生命榜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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