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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시편 2:1-12

    今日默想:詩篇 2:1-12

    Kyoung Woo Han··조회 41

    제목 : 무엇을 묵상하는가?

    시편 2편은 전통적으로 메시아 시편으로 불려 왔다. 본래 문맥에서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다윗 계열의 왕, 곧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래하는 왕권 시편이지만, 후대 유대교와 신약의 해석 안에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 왕을 가리키는 시로 읽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다른 관점을 이 본문을 보고자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시편 1편과 2편이 이중 서문으로 시편 전체의 서문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 관점으로 본문을 볼 것이다.

    시편 2편이 열리자마자 땅이 시끄럽다.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고, 민족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왕들과 관원들이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일어선다. 그런데 시인은 이 요란한 반역을 첫 절부터 한 단어로 규정해 버린다. '헛되다.'

    시 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여기서 '꾸미는가'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하가(הָגָה)'다. 재미있게도 이 단어는 바로 앞 시편 1편 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할 때 쓴 그 단어다. 같은 동사다. 그러니까 시편은 첫 두 편에서 두 종류의 묵상을 나란히 세워 놓고 묻는 셈이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하가(묵상)하고, 열방은 헛것을 하가(묵상)한다. 이 대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너는 무엇을 되뇌며(묵상하며) 사는가?"

    그런데 본문을 계속 읽어 보면 땅은 소란한데, 하늘은 평온하다. 하나님은 그 음모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웃으신다. 이 웃으신다는 것은 그 일을 꾸미는 자들을 비웃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모가 하나님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여기서 '세웠다'는 동사는 히브리어 완료형이다. 이것은 열방의 반역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편에서는 왕의 즉위가 이미 확정된 현실로 선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열방의 반역은 앞으로 결정될 일을 막으려는 저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왕권 앞에서 벌이는 헛된 몸부림이다. 그래서 신약은 이 시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사도행전 13:33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시편 2:7의 말씀이 예수의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한다. 또한 사도행전 4:25–28은 헤롯과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예수를 대적해 모인 십자가 사건조차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 안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열방은 반역했지만, 하나님은 웃으셨고, 그 반역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왕을 세우셨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이 뜻밖이다. 진노와 심판으로 끝날 것 같던 시가 초청으로 끝난다.

    시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반역하던 바로 그 열방에게 피할 곳이 열려 있다. 그분께, 곧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다.

    결국 시편 1편이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했는데, 시편 2편은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로 끝난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자주 쓰이는 수미상관(inclusio, 인클루지오)기법으로 이 두 시편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두개의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을 두 마디로 정의하며 문을 여는 셈이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그리고 그분께 피하는 사람. 이 둘은 별개가 아니다. 헛것을 묵상하던 열방은 길에서 망하고(2:12),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피할 곳을 알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마음이 소란해질 때가 많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하루 종일 '하가(묵상)'하며 산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하가(묵상)하느냐다. 말씀보다 뉴스를 더 오래 묵상한 날이 있다. 그 뉴스들을 되뇌고, 곱씹고, 답답해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묵상의 끝에는 피난처가 없다. 헛것을 묵상하면 마음도 헛것으로 피하게 될 뿐이다. 시편 2편은 그런 나에게 시선을 들라고 한다. 세상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왕을 세우셨다. 그렇다. 왕은 이미 계신다. 그래서 오늘도 그분의 가르침을 묵상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합당한 삶으로, 이 소란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피할 곳을 잃은 사람들에게 참된 피난처를 가리키는 것, 그것이 나의 사명이며 우리 공동체의 사명임을 다시 되새겨 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사명을 잊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中文 AI翻譯

    題目:你在默想什麼?

    詩篇第2篇,傳統上一直被稱為彌賽亞詩篇。在其原本的文脈中,這是一首歌頌受耶和華所立、出自大衛系譜之王——即「受膏者」——的王權詩篇。然而,在後來的猶太教與新約的詮釋脈絡裡,它被讀作指向那位將要來臨的彌賽亞君王之詩。但今天,我想從另一個角度來看這段經文。當代學者也有人認為,詩篇第1篇與第2篇共同構成一個雙重序言,作為整卷詩篇的引言。我將從這個角度來閱讀本文。

    詩篇第2篇一開卷,大地便喧囂不已。外邦列國憤怒,萬民聚集謀劃陰謀,君王與首領起來敵擋耶和華並祂的受膏者。然而,詩人從第一節起,便以一個詞定性了這場喧囂的叛亂——「虛妄」。

    詩 2:1 外邦為何爭鬧?萬民為何謀算虛妄的事?

    這裡譯為「謀算」的希伯來文,是「哈加(הָגָה)」。有趣的是,這個詞正是在緊接於前的詩篇1篇第2節中,描述有福之人晝夜「默想」耶和華律法時所用的同一個字。是同一個動詞。因此,詩篇在開頭的兩篇中,並排呈現了兩種默想,並向我們提問:有福的人「哈加(默想)」神的話語,列邦卻「哈加(默想)」虛妄之事。透過這個對比,詩篇彷彿在問我們:「你每天反覆思念(默想)的,是什麼?」

    然而,繼續讀下去,我們看見:大地喧鬧,天上卻平靜。神看見那些陰謀,並不驚懼,反而發笑。這「笑」,是對那些謀算者的嗤笑——因為他們的陰謀根本無法推翻神的定旨。因此,祂這樣說:

    詩 2:6 我已經立我的王在錫安我的聖山上了。

    這裡「立了」這個動詞,在希伯來文中是完成式。這表明,即便在列邦叛亂仍在進行的那一刻,在神那一邊,君王的登基已是既定的現實,已被宣告確立。因此,列邦的叛亂,並非要阻擋一件尚未發生之事,而是在神已然定下的王權面前,所做的一場徒勞掙扎。也因此,新約將這首詩應用在耶穌基督身上。使徒行傳13:33宣告,詩篇2:7「你是我的兒子,我今日生了你」這句話,已在耶穌的復活中得著成全。使徒行傳4:25–28更詮釋道,就連希律與彼拉多、外邦人與以色列人聚集敵擋耶穌的十字架事件,也都在神預先定旨的旨意之中。列邦雖然叛亂,神卻發笑;在那叛亂的正中心,神仍然立定了祂的王。

    然而,這首詩的結尾出人意料。原以為將以震怒與審判作結,它卻以一個邀請作結。

    詩 2:12 當以嘴親子,恐怕他發怒,你們便在道中滅亡,因為他的怒氣快要發作。凡投靠他的,都是有福的。

    就是那些曾經叛亂的列邦,如今也向他們敞開了逃奔之所。逃奔到祂那裡——逃奔到耶和華、以及耶和華所立之王那裡——的人,都是有福的。

    最終,詩篇第1篇以「有福的人」開篇,詩篇第2篇卻以「凡投靠他的,都是有福的」作結。這正是希伯來文學中常用的首尾呼應(Inclusio,包含法)技巧,將這兩篇詩篇合而為一。與此同時,這兩篇詩篇以兩句話定義了「有福的人」,作為整卷的開門之語:默想神話語的人,以及投靠祂的人。這兩者並非分離的。默想虛妄之事的列邦,在路上滅亡(2:12);而默想神話語的人,因為知道那逃奔之所在哪裡。

    最近看新聞,心裡常常感到紛亂。坦白說,我自己也是整天都在「哈加(默想)」地活著。但問題在於,默想的是什麼。有些日子,我默想新聞的時間比默想話語還長。反覆咀嚼那些新聞,輾轉思量,心裡鬱悶,甚至憤怒。然而,那樣的默想到頭來,沒有避難所。默想虛妄之事,心靈也只會往虛妄之處逃奔。詩篇第2篇呼召這樣的我,抬起眼來。在世界尚未得出結論的那個地方,神已經立定了祂的王。是的,王已經在了。因此,今天我也默想祂的教導。並且,願以與那教導相稱的生命,在這喧囂的世界中,活出光與鹽的見證。向那些失去避難所的人,指引那真實的避難所——我再次思念,這是我的使命,也是我們群體的使命。

    於是我禱告:願我們成為一個不忘記那神聖使命的群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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