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19:22–30
今日默想:士師記 19:22–30
제목 : 기브아의 비극
어제 기브아에서 레위인 일행에게 문을 열어 준 사람은 그 성읍 사람이 아니라 타향살이하던 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들에게 평안을 빌었고, 레위인 일행은 발을 씻고 함께 먹고 마셨다. 이제 위기는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삿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즐거운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성읍의 불량배들, 원문으로는 '벨리알의 아들들', 곧 아무 쓸모없고 악한 자들이 집을 에워싼다. 이 불량배들의 요구는 오래전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 앞에서 했던 요구와 같다. 생각해 보라.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이 위험하다며 여부스를 지나쳤다. 그런데 레위인이 안전하리라 믿고 들어간 이스라엘의 성읍이 소돔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다.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일도, 사람의 생명과 몸을 지키는 일도, 이웃을 보호하는 일도 모두 무너져 있었다.
노인은 불량배들을 막아선다.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그런데 노인은 그 대신 자기 처녀 딸과 손님의 첩을 내어 주겠다며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같은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사기 내내 들어 온 그 말, '자기 눈에 옳은 대로'가 이 노인의 입에서 다시 울린다. 조금 전까지 환대의 본이었던 노인이, 두려움 앞에서는 자기 집에 머무는 또 다른 손님을 내어 주려 한다. 그렇게 이 시대의 기준은 무너져 있었다.
삿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그 여인을 붙잡아 문밖으로 내보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남편, 곧 레위인이었다.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내의 마음에 말하겠다며 베들레헴까지 찾아갔던 레위인이, 이 이야기에서 아내에게 한 일로 처음 기록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밤에 일어난 일을 길게 말하지 않는다. 세 마디로 짧게 적을 뿐이다. 우리도 그 밤을 더 들여다보지 않는다. 다만 분명히 기억한다. 이 일의 책임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 손님을 내어 주려 한 노인에게, 그리고 자기 아내를 문밖으로 내보낸 레위인에게 있었다.
삿 19:26–27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이야기의 처음에서 성경은 레위인을 '그녀의 남편'이라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녀의 주인'이라 부른다. 본문은 레위인이 밤새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레위인은 아내를 찾으러 나간 것이 아니라, 자기 길을 가려고 문을 연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아내가 엎드러져 있다. 성경은 굳이 한 가지를 적어 둔다.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마치 마지막까지 문 안을 향해 손을 뻗은 듯한 모습이다. 생각해 보라. 사사기 내내 '손'은 승리의 말이었다. 하나님은 원수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고, 에훗과 야엘과 기드온과 삼손의 손이 적을 이겼다. 그런데 사사기의 끝, 이스라엘의 성읍 문지방 위에 놓인 것은 한 이스라엘 여인의 힘없는 두 손이었다. 어제 우리는 기브아에 나그네에게 열리는 문이 없는 것을 보았다. 오늘 그 문은 열렸다. 레위인이 아내를 내보낼 때 한 번, 그리고 아침에 레위인이 떠나려 할 때 한 번. 그 여인을 들이기 위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레위인이 아내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이것이 성경에 직접 기록된 레위인의 첫 말이다. 아내의 마음에 말하겠다며 시작한 길에서, 레위인이 아내에게 건넨 말로 처음 기록된 것이 이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여인은 이 이야기에서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여인이 정확히 언제 숨을 거두었는지, 성경은 끝내 말하지 않는다. 레위인은 아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사사기의 처음에도 나귀를 탄 여인이 있었다. 갈렙의 딸 악사는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께 복을 구했고, 샘물을 얻었다. 그런데 사사기의 끝에서는 이름도 목소리도 없는 한 여인이 나귀에 실려 간다.
집에 이른 레위인은 칼로 아내의 몸을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온 지파에 보낸다. 그 시대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옛 메소포타미아의 한 편지에는, 군대로 부른 사람들이 모이지 않자 감옥에 있는 죄수를 죽여 그 머리를 여러 성읍에 돌리자는 제안이 적혀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서둘러 모일 것이라는 것이다. 레위인도 그렇게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려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 편지에서 몸이 돌려진 사람은 죄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 밤의 피해자였던 여인의 몸이, 마치 죄인의 몸처럼 조각나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 여인은 살아서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문밖으로 내보내졌고, 그 뒤에는 남편의 분노를 알리는 도구가 되었다. 끝까지 그 여인은 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리고 레위인은 이제 정의를 부르짖으며 온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 정의를 외치는 레위인이, 그 밤 아내를 문밖으로 내보내고 아침에 자기 길을 가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고. 그리고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고 한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정의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찾을 해결책마저 곧 또 다른 폭력을 낳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보자. 레위인은 아내의 마음에 말하러 베들레헴까지 갔지만, 성경은 레위인이 아내에게 건넨 말을 끝내 기록하지 않았다. 기브아에는 나그네에게 열리는 문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문은 그 여인을 내보낼 때만 열렸고, 그 여인의 두 손은 문지방 위에 남았다. 이 추락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마음을 듣지 않는 데서, 한 사람의 몸조차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자리까지, 이스라엘은 그렇게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나는 샬롬의 땅이 되어야 할 곳이 소돔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평화 안에 살아야 할 그곳에서,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문을 닫았고 한 여인을 지켜 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그 해답은 사사기의 처음에 이미 있다. 여호수아의 세대가 다 떠난 뒤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들은 말씀을 잊어버린 세대였다. 그런데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시대에도 레위인은 있었다. 제사장의 이름도, 예배의 형식도, 신앙의 전통도 남아 있었다. 다만 그 모든 형식 안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 본문의 참담함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우리를 돌아본다. 우리에게도 예배가 있고, 직분이 있고, 교회의 전통이 있다. 그러나 혹시 우리도 종교의 형식만 남고 말씀은 잊어버린 세대는 아닌가. 말씀을 전하는 나부터, 말씀을 듣는다는 우리 공동체까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고 있는 세대인지 정직하게 묻는다. 그래 오늘 우리는 다시 말씀 앞에 선다. 형식이 아니라 말씀의 본질을 붙드는 세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標題:基比亞的悲劇
昨天在基比亞為利未人一行開門的,不是那城裡的人,而是一位寄居在那裡的老人。老人向他們問安,利未人一行洗了腳,一同吃喝。如今危機似乎已經過去了。然而今天的經文卻是這樣開始的:
士 19:22 他們心裡正歡暢的時候,城中的匪徒圍住房子,連連叩門,對房主老人說:「你把那進你家的人帶出來,我們要與他交合。」
「他們心裡正歡暢的時候。」就在那歡樂的夜晚,傳來了敲門聲。城中的匪徒,原文是「彼列的兒子們」,也就是毫無用處、邪惡的人,把房子團團圍住。這些匪徒的要求,和很久以前所多瑪人在羅得家門前的要求一模一樣。請想一想:利未人說外邦人的城危險,就略過了耶布斯。然而利未人以為安全而進入的以色列城邑,竟已變成了所多瑪。在這裡崩壞的不只一件事。接待旅客、守護人的生命與身體、保護鄰舍,這一切全都崩壞了。
老人出面攔阻匪徒,叫他們不要行這樣的醜事。然而老人卻接著說,要把自己還是處女的女兒和客人的妾交出來,說「任憑你們的心願而行」。雖然不是同一句話,但我們在整卷士師記裡一直聽見的那句話——「各人任意而行」(直譯:照自己眼中看為正的去行)——又從這位老人口中迴響出來。剛才還是接待典範的老人,在恐懼面前,竟要交出另一位住在他家中的客人。這個時代的標準就是這樣崩壞了。
士 19:25 那些人卻不聽從他的話。那人就把他的妾拉出去交給他們,他們便與她交合,終夜凌辱她,直到天色快亮才放她去。
抓住那婦人、把她推出門外的,不是別人,正是她的丈夫——那位利未人。這裡我們絕不能錯過。那位說要對妻子說安慰話、一路找到伯利恆的利未人,在這個故事中第一次被記錄下來為妻子所做的事,竟是這件事。聖經對那一夜發生的事並沒有多加描述,只用短短三句話帶過。我們也不再細看那一夜。只是我們要清楚記得:這件事的責任,在於基比亞的匪徒,在於想要交出客人的老人,也在於把自己妻子推出門外的利未人。
士 19:26–27 天快亮的時候,婦人回到她主人住宿的房門前,就仆倒在地,直到天亮。27 早晨,她的主人起來,開了房門,出來要行路,見那婦人仆倒在房門前,兩手搭在門檻上。
故事一開始,聖經稱利未人為「她的丈夫」,但在這裡卻稱他為「她的主人」。經文沒有說利未人那一夜做了什麼。然而到了早晨,利未人不是出去尋找妻子,而是為了要上路才打開門。而就在那門前,妻子仆倒在地。聖經特意記下了一件事:「兩手搭在門檻上。」彷彿她直到最後都向著門內伸出雙手。請想一想:在整卷士師記中,「手」是代表勝利的字。神將仇敵交在以色列人的手中,以笏、雅億、基甸和參孫的手都勝過了敵人。然而到了士師記的結尾,擱在以色列城邑門檻上的,卻是一位以色列婦人無力的雙手。昨天我們看見,基比亞沒有一扇為旅客而開的門。今天那扇門開了——一次是利未人把妻子推出去的時候,另一次是早晨利未人要離開的時候。卻從來沒有一次是為了讓那婦人進來而開的。
接著利未人對妻子說:「起來,我們走吧!」這是聖經直接記載利未人說的第一句話。在一段以「要對妻子說安慰話」為起點的路程上,第一句被記下來、利未人對妻子說的話,竟是這句。然而沒有任何回應。那婦人在整個故事裡直到最後,一句話也沒能說出口。她究竟何時斷氣,聖經始終沒有說明。利未人把妻子馱在驢上,回到家去。士師記的開頭,也有一位騎驢的女子。迦勒的女兒押撒下了驢,向父親求福,得到了水泉。然而在士師記的結尾,一位沒有名字、也沒有聲音的女子,被馱在驢上帶走。
利未人回到家,用刀將妻子的屍身切成十二塊,傳送到以色列四境的各支派。那個時代並非沒有這樣的事。古代美索不達米亞的一封書信中記載著一個提議:當被徵召從軍的人不肯集合時,就把獄中的一個囚犯殺了,把他的頭在各城之間傳送,這樣人們就會因懼怕而趕緊集合。利未人也想藉這種方式召集全以色列。然而請想一想:在那封信中,屍身被傳送的是囚犯;但這位婦人卻毫無過錯。那一夜的受害者,她的身體竟像罪人的身體一樣被切成碎塊,送往以色列四方。這婦人活著的時候,為了保護丈夫而被推出門外;死後,又成了宣洩丈夫憤怒的工具。直到最後,她都沒有被當作一個人來對待。而利未人如今卻成了高呼公義、號召全以色列起來的人。然而這位高喊公義的利未人,正是那一夜把妻子推出門外、早晨只想走自己路的那個人。
看見這事的以色列人說:從以色列人出埃及地,直到今日,這樣的事沒有發生過,也沒有見過。他們要大家思想這事,商議之後再說。以色列就這樣開始商討公義。然而,以色列所要找的解決之道,很快又將帶來另一場暴力。
讓我們從頭再看一次這個故事。利未人為了對妻子說安慰話,一路去到伯利恆,但聖經始終沒有記下利未人對妻子說的那些話。基比亞沒有一扇為旅客而開的門。最後,那扇門只在把婦人推出去時打開,而她的雙手留在了門檻上。這樣的墮落並非一瞬間發生。從不肯傾聽一個人的心,到連一個人的身體都不當作人來對待,以色列就是這樣一步步往下沉淪。
今天默想這段經文,我看見那本該是平安(Shalom)之地的地方,竟然變成了所多瑪。在神所應許的地上,在神的百姓本該活在神的平安中的那片土地上,人們對旅客關上了門,也沒有保護一位婦人。為什麼會落到這種地步?答案其實早已在士師記的開頭。約書亞那一代的人都歸了列祖之後,興起來的另一代人「不知道耶和華,也不知道耶和華為以色列人所行的事」。他們是遺忘了神話語的一代。然而這裡我們不能錯過:那個時代仍然有利未人,祭司的名分、敬拜的形式、信仰的傳統也都還在。只是在這一切形式之中本該存在的神話語的本質,已經消失了。而其結果,就是今天經文中這令人心碎的慘狀。所以今天我回頭省察我們自己。我們也有敬拜,也有職分,也有教會的傳統。然而,我們會不會也是只剩下宗教形式、卻遺忘了神話語的一代?從傳講話語的我開始,到自認為在聆聽話語的我們這個群體,我誠實地問:我們真的是正確看見神話語的一代嗎?所以今天,我們再一次站在神的話語面前。我禱告,願我們成為不是抓住形式、而是緊緊抓住話語本質的一代……願我們記念神為我們所行的事,被建立成為照著祂話語而活的群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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