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고린도전서 5:1-13
今日默想:哥林多前書 5:1-13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또다른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이다. 이방인들조차 부끄러워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정작 가슴을 친 것은 그 죄 자체가 아니었다. 그 죄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였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마땅히 통곡해야 할 자리에서 그들은 침묵했다. 왜 그랬을까? 교만 때문이다. 교만한 마음은 죄 앞에서 슬퍼할 줄을 모른다. 자신을 너무 높이 여기는 탓에, 잘못을 직면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거나 도리어 관대함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래. 통회는 늘 겸손한 자의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룩 이야기를 꺼낸다.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작은 누룩은 결코 혼자 작은 채로 머물지 않는다. 반죽 전체로 퍼져 온 반죽덩이의 성질을 바꿔 놓는다. 죄도 그렇다. 한 사람의 죄를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덮어두는 사이, 그 누룩은 공동체 전체로 번진다. 죄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묵인된 죄는 결국 공동체의 성격 자체를 바꿔버린다. 그렇기에 권징이 사라진 교회는 거룩을 잃는다.
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었다. 그가 그 사람을 내쫓으라 한 것은 그 영이 주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었다(고전 5:5). 곧 회복이 목표였다. 우리의 유월절 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희생되셨기에(고전 5:7), 교회의 거룩은 율법의 강요가 아니라 십자가 사랑의 열매다. 그러므로 죄를 직면하는 일은 차가운 심판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가정에도서 마찬가지이다. 너그럽고, 다그치지 않고, 친구 같은 아빠. 그래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을 못 본 척 넘긴 적이 있다. 마음 불편한 대화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너그러움이 실은 사랑이 아니라, 갈등을 피하려는 나의 편함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대학생이 된 아들과 딸은 이제 내가 일일이 붙잡고 통제할 나이가 아니다. 그래, 안다. 그러나 존중과 방치는 다르다. 존중은 그들을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고, 방치는 부딪히기 싫어 그저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적은 누룩을 '괜찮겠지' 하고 두는 사이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자란다는 것을, 나는 안다.
자녀를 방종하게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바울이 그 사람의 구원을 바라며 권징을 말했듯이, 부모의 바른 권면도 아이를 몰아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잘 되라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신 말씀이(엡 6:4) 오늘따라 무겁게 다가온다.
부모로서, 목사로서 나에게 맡겨진 가족과 공동체를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돌아보며, 죄의 문제를 교만하지 않게 바르게 직시할 수 있길...
使徒保羅在此談及哥林多教會的另一個問題——有人娶了自己的繼母。這是連外邦人都引以為恥的事。然而,真正讓保羅椎心泣血的,並非罪行本身,而是教會面對這件事的態度。
林前 5:2 你們還是自高自大,並不哀痛,把行這事的人從你們中間趕出去。
本該痛哭的時刻,他們卻選擇沉默。為什麼?因為驕傲。驕傲的心不懂得在罪面前悲哀。因為過於抬高自己,便輕看了正視過錯這件事,甚至以寬容為榮。是的,痛悔,向來是謙卑之人的分。因此保羅提起了酵的比喻。
林前 5:6 你們這自誇是不好的。豈不知一點麵酵能使全團都發起來嗎?
小小的酵,絕不會獨自停留在微小的狀態。它會蔓延至整個麵團,改變整團的性質。罪也是如此。當我們以「算了吧,也沒什麼大不了」的態度遮掩一個人的罪時,那酵便悄然蔓延至整個群體。罪,並非私事。被默許的罪,終將改變整個群體的本質。正因如此,失去管教的教會,也必失去聖潔。
然而,保羅的目的並非定罪。他要將那人趕出去,是為了使他的靈魂在主的日子可以得救(林前 5:5)。目標,是恢復與復原。因為我們逾越節的羔羊基督已經被獻為祭(林前 5:7),教會的聖潔不是律法的強制,而是十字架之愛所結的果子。因此,正視罪的問題,不是冷酷的審判,而是因著愛,所以不肯放棄。
家庭中也是如此。我是一個隨和、不強迫、像朋友一樣的父親。因此,有些本該清楚指出的事,我曾假裝沒看見、讓它就這樣過去。因為我不想面對那令人不舒服的對話。然而,那所謂的寬容,或許並非真正的愛,而不過是我為了逃避衝突而選擇的舒適……
已經上了大學的兒子和女兒,早已不是我需要事事盯緊、加以管控的年紀。是的,我明白。但尊重與放任,是截然不同的兩件事。尊重,是將他們視為有人格的個體;放任,卻是因為不想碰撞,就索性撒手不管。那小小的酵被我以「應該沒問題吧」輕輕帶過的時候,小事便悄悄長成了大事——這一點,我心裡清楚。
放縱兒女,並不是愛。正如保羅出於盼望那人得救而談及管教,父母正確的勸誡,也不應是為了逼迫孩子,而應出於真心盼望他們得好處。「只要照著主的教訓和警戒,養育他們」(弗 6:4)——這句話,今天讀來格外沉重。
身為父親,身為牧師,願我能以主愛的眼光,重新凝視託付給我的家人與群體,不以驕傲,而能正確地直面罪的問題……
댓글 / 留言 (0)
로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