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야고보서 4:1–12
今日默想:雅各書 4:1–12
제목 : 더욱 큰 은혜
어제 우리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보았다. 그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고 했다.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4장은 그 화평과는 거리가 먼 싸움과 다툼에서 시작한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공동체 안의 싸움이 어디서 오는지 묻고 스스로 답한다.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에서 온다. 그런데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어제 읽은 3:15에도 '정욕의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말 성경은 둘 다 '정욕'으로 옮겼지만 원문은 서로 다른 말이다. 어제의 '정욕'은 하나님의 영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을 뜻했고, 오늘의 '정욕'은 헤도네(ἡδονή), 곧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쾌락과 욕망을 뜻한다. 그러니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싶고 내 만족을 채우고 싶은 그 욕망이 먼저 내 안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그 싸움이 밖으로 터져 나와 공동체를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난 싸움의 뿌리를 내 안에서도 봐야 한다.
야고보는 그 욕망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 준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면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얻지 못하면 다투고 싸운다(2절). 살인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살인을 금하는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다(마 5:21–22).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결국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2–3절).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내 힘으로 움켜쥐려 하거나, 구하더라도 하나님을 내 욕망의 심부름꾼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것을 한마디로 부른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간음한 여인들아'. 이 말을 여자들에게만 하는 말로 읽으면 안 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혼인 언약을 맺으신 남편으로 나타나시고, 그 백성이 다른 신을 따를 때 선지자들은 그것을 간음이라고 불렀다. 야고보도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영적 간음이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빼고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2장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었는데, 우리는 세상의 벗이 되려 한다. 하나님의 벗과 세상의 벗, 둘을 함께 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5절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을 헛되이 여기느냐고 묻는다. 신실하지 못한 아내를 향한 남편의 질투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뉜 사랑을 받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뉜 마음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야고보는 이렇게 답한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이 문장을 놓치면 오늘 본문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우리의 실패를 낱낱이 드러냈다. 혀를 다스리지 못하고, 가난한 형제를 돌보지 못하고, 세상과 벗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끝에 '그러나'가 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 우리 안의 욕망보다 더 크고, 세상이 주는 어떤 것보다 더 큰 은혜다. 그런데 이 은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니다. 야고보는 잠언의 말씀을 붙여 그 은혜가 누구에게 주어지는지 말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겸손해져서 은혜 받을 자격을 갖추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낮추시는 것도 은혜이고, 낮아진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도 은혜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런즉'으로 이어 간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한다(7절).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7절부터 10절까지 야고보는 열 번이나 명령한다. 그런데 그 명령 사이사이에 약속이 들어 있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피할 것이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가까이하실 것이고, 주 앞에서 낮추면 주께서 높이실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한 걸음 움직이면 그제야 하나님이 반응하신다는 공식이 아니다. 한 종교개혁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친히 이루신다. 그러나 은혜를 의지한다는 이유로 돌아오는 일을 미룰 수도 없다. 하나님은 실제로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고, 오는 자를 가까이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 돌아옴은 손과 마음 모두에서 일어나야 한다.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은 행실을 돌이키는 것이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은 생각과 동기를 돌이키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누구를 부르는지 보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1장에서 야고보는 의심하는 사람을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다(1:8). 그 두 마음이 바로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붙들려는 마음이다. 야고보는 처음부터 이 두 마음을 이야기해 왔고, 이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부른다. 어제 위로부터 난 지혜를 두고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라고 했는데, 바로 그 성결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한다(9절).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빼앗으려는 말이 아니다. 죄의 단맛에 취해 웃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은혜도 보이지 않는다. 죄를 슬퍼하며 주 앞에 낮아질 때 비로소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는 약속을 붙들 수 있다. 옛 교부의 말처럼, 나무가 위로 자라려면 먼저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낮아진 사람은 형제를 대하는 말부터 달라진다.
약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야고보는 11절에서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한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인가.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는데, 형제를 깎아내리는 사람은 그 사랑의 명령 아래 서지 않고 그 위에 올라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모든 권면과 책망을 금하는 말은 아니다.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고 이웃을 깎아내리는 정죄를 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 정죄가 정당해지지도 않는다. 성경을 들고서도 사랑의 명령을 무시하고 내가 최종 재판관의 자리에 선다면, 그것도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다. 재판관은 한 분뿐이시다. 그래서 야고보는 묻는다. 너는 누구이기에...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나를 돌아본다. 세상과 벗한다는 말은 처음에는 나와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한 신학자의 말처럼, 세상과 벗된다는 것은 세상의 부패에 나를 내어 주고 그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세상 쪽으로 기우는 만큼 나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말하는 세상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재는 눈, 남과 견주는 마음,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심, 그 모두가 세상의 가치에 물든 내 모습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을 피해 사람에게서 물러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은 날마다 세상 한가운데로 나간다. 캠퍼스로, 일터로, 낯선 이 땅 대만의 삶 속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에게서 떼어 놓지 않으신다. 사람 곁에 있되 세상의 가치에 물들지 말라고 하신다. 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오늘 다시 '더욱 큰 은혜'를 붙든다. 세상 쪽으로 기울어 있던 나를 다시 부르시는 그 은혜를... 오늘도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우리 지체들 곁에서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물들지 않는 하나님의 벗으로...
題目:更多的恩典
昨天我們看了從上頭來的智慧。經上說,那智慧先是清潔,後是和平;又說,使人和平的,是用和平所栽種的義果。然而今天的第四章,卻是從與和平相去甚遠的爭戰和鬥毆開始。
雅 4:1 你們中間的爭戰鬥毆是從哪裡來的呢?不是從你們百體中戰鬥之私慾來的嗎?
雅各問群體裡的爭戰從哪裡來,接著自己回答:不是從外面來的,而是從我裡面、從「百體中戰鬥之私慾」來的。這裡的「私慾」一詞不可輕輕帶過。昨天讀的 3:15 也有「屬情慾的」這樣的說法。韓文聖經兩處都譯作「情慾」,但原文其實是不同的字。昨天那個字指的是屬於不順從神的靈之人的本性;今天這個字則是 hēdonē(ἡδονή),就是想要滿足自己的享樂與慾望。所以雅各要說的是:想得到自己所要的、想滿足自己的那份慾望,先在我裡面挑起爭戰,而那爭戰再爆發到外面,把群體撕裂。因此,顯露在外的爭戰,也要在我裡面看見它的根。
雅各讓我們看見這慾望會走到什麼地步:貪戀,還是得不著,就殺害;嫉妒,又不能得,就鬥毆爭戰(2節)。「殺害」這說法聽來或許太重。然而耶穌在教導不可殺人的誡命時,也說凡向弟兄動怒的,難免受審判(太 5:21–22)。未被滿足的慾望,終究會走到傷害別人的地步。雅各接著說出原因:你們得不著,是因為你們不求;你們求也得不著,是因為你們妄求,要浪費在你們的宴樂中(2–3節)。也就是說,我們不向神求,卻想憑自己的力量緊緊抓住;即便求了,也是想把神當作替我慾望跑腿的差役。
於是雅各用一句話來稱呼這一切:
雅 4:4 你們這些淫亂的人哪,豈不知與世俗為友就是與神為敵嗎?所以凡想要與世俗為友的,就是與神為敵了。
「淫亂的人哪」(原文直譯為「淫婦們哪」)。這句話不可讀成只是對女人說的。在舊約中,神是以與自己百姓立婚約的丈夫來顯現,而當百姓去隨從別神時,先知們就稱之為淫亂。雅各此刻說的也是這件事:口稱是神的百姓,卻愛世界,這就是屬靈的淫亂。這裡的世界,不是指神所創造的世界,而是指撇下神而活的世界的價值與慾望。還有一處不可錯過:在第二章,雅各稱亞伯拉罕為「神的朋友」。亞伯拉罕是神的朋友,我們卻想作世界的朋友。神的朋友與世界的朋友,兩者不能兼得。
接下來第5節問:神所賜、住在我們裡面的靈,是戀愛至於嫉妒,你們想經上所說的是徒然的嗎?正如丈夫對不忠的妻子會嫉妒,神愛我們,愛到嫉妒的地步。正因如此,神不接受分裂的愛。
那麼,一直以這樣分裂的心過活的我們,還剩下什麼呢?雅各這樣回答:
雅 4:6 但他賜更多的恩典,所以經上說:神阻擋驕傲的人,賜恩給謙卑的人。
錯過這句話,就錯過了今天整段經文。雅各到目前為止,把我們的失敗一一揭露:我們沒能勒住舌頭,沒能照顧貧窮的弟兄,與世俗為友地活著。然而在這一切的末了,出現了「但」。但神賜更多的恩典。這恩典比我們裡面的慾望更大,也比世界所給的任何東西更大。然而這恩典並不是允許我們可以隨便過活。雅各引用箴言的話,說明這恩典是賜給誰的:神阻擋驕傲的人,賜恩給謙卑的人。但這也不是說,要我們先變得謙卑,具備領受恩典的資格。使我們降卑是恩典,將更大的恩典澆灌給已降卑的我們,也是恩典。
所以雅各用「故此」接下去,要我們順服神,抵擋魔鬼(7節)。然後這樣說:
雅 4:8 你們親近神,神就必親近你們。有罪的人哪,要潔淨你們的手!心懷二意的人哪,要清潔你們的心!
從第7節到第10節,雅各一連下了十個命令。然而在這些命令之間,穿插著應許:抵擋魔鬼,魔鬼就必離開;親近神,神就必親近;在主面前自卑,主就必叫你們升高。但這並不是說,我們要先踏出一步,神才會回應的公式。正如一位宗教改革家所說,神命令我們去做的事,正是祂親自在我們裡面成就的事。然而我們也不能以倚靠恩典為由,延遲回轉。神真實地呼喚我們親近,也應許必親近那來到祂面前的人。
而這回轉必須同時發生在手和心上。潔淨手,是回轉行為;清潔心,是回轉思想與動機。再看雅各在呼喚誰:「心懷二意的人哪」。在第一章,雅各稱疑惑的人是「心懷二意,在他一切所行的路上都沒有定見」的人(1:8)。這二意,正是想同時抓住神與世界的心。雅各從一開始就在談這二意的心,如今他呼喚心懷二意的人要清潔自己的心。昨天論到從上頭來的智慧時說「先是清潔,後是和平」,正是這份清潔。
所以雅各說:要愁苦、悲哀、哭泣(9節)。這不是要奪走基督徒的喜樂。當我們沉醉在罪的甜頭裡嬉笑時,既看不見神的審判,也看不見神的恩典。唯有為罪憂傷、在主面前降卑時,我們才能抓住「務要在主面前自卑,主就必叫你們升高」(10節)的應許。正如一位古代教父所說,樹要往上長,必須先往下深深扎根。
而降卑的人,對待弟兄的言語首先就會改變。
雅 4:12 設立律法和判斷人的,只有一位,就是那能救人也能滅人的。你是誰,竟敢論斷別人呢?
雅各在第11節說:不可彼此批評。批評弟兄、論斷弟兄的,就是批評律法、論斷律法。為什麼呢?因為律法命令我們愛鄰舍,而貶低弟兄的人並不站在這愛的命令之下,反倒站到了它之上。但這並不是禁止一切的勸勉與責備,而是禁止那種把自己的判斷絕對化、貶低鄰舍的定罪。而且,引用聖經也不會使這樣的定罪變得正當。若拿著聖經,卻無視愛的命令,自己站上最終審判者的位置,那同樣是在批評、論斷弟兄。審判者只有一位。所以雅各問:你是誰……
今天默想這段經文,我省察自己。「與世俗為友」這句話,起初聽來像是離我很遠的事。然而正如一位神學家所說,與世俗為友,就是把自己交給世界的敗壞,作它的奴僕。我向世界傾斜多少,就離神多遠。這樣看來,雅各所說的世界並不在遙遠的地方。以外表衡量人的眼光、與人比較的心、盼望凡事照我意思成就的貪心,這一切都是被世界價值觀浸染的我。而那個世界早已進到我裡面了。但這也不是要我們為了躲避世界而遠離人群。我們群體的肢體們,每天都走進世界的中心——走進校園、走進職場、走進台灣這片陌生土地上的生活。神不把我們從人群中分隔出來,而是要我們在人群中,卻不被世界的價值所沾染。我知道,這有多麼困難。所以今天我再次抓住「更多的恩典」,抓住那再次呼喚曾向世界傾斜的我的恩典……今天,我也要親近神,與我們的肢體一同走進世界之中。作一個身在世界、卻不被世界沾染的神的朋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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