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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4:1–10

    今日默想:士師記 4:1–10

    한경우··조회 58

    제목 :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에훗이 죽자 순환이 다시 돈다. 이스라엘이 또 악을 행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고, 압제가 이십 년 이어졌고,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 여기까지는 옷니엘과 에훗 이야기의 서두와 같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다르다. 옷니엘과 에훗 이야기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다'(3:9, 15)는 문장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는 그 문장이 없다. 앞의 두 사사에게 있던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으므로'도 없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있다. 이미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여선지자 드보라와, 드보라가 불러낸 바락이다. 이번 구원에서는 드보라의 예언자적 지도력과 바락의 군사적 지도력이 함께 쓰인다.

    삿 4:2–3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먼저 압제의 무게를 보아야 한다. 하솔은 여호수아 11장에서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고 여호수아가 진멸하고 불태운 성이다. 그런데 그 하솔의 왕권이 다시 이스라엘을 누르고 있다. 그리고 철 병거가 나온다. 사사기 1:19에서 이스라엘을 두렵게 했던 그 철 병거가 이제 4장에서는 구백 대라는 압도적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압제 기간도 옷니엘 때 팔 년, 에훗 때 열여덟 해, 이번에는 이십 년으로 길어졌고, 저자는 야빈이 이스라엘을 '심히' 학대했다고 덧붙인다. 야빈은 배경 인물이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누른 사람은 군대 장관 시스라다.

    삿 4:4–5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가 여선지자이자 사사라는 사실을 저자는 처음에는 담담하게 제시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9절의 '여인의 손'과 뒤에 나올 야엘의 등장으로 이어지면서 4장 전체의 중요한 문학적 모티프가 된다. 그리고 사사기의 다른 사사들은 대부분 전쟁 지도자였는데, 실제로 재판을 했다고 기록된 사사는 드보라뿐이다. 앞으로 나올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이 모두 심각한 결점을 가진 사람들인 데 비해, 저자는 드보라에게 어떤 부정적인 말도 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드보라의 자리를 보아야 한다. 군사적 압제의 중심은 북부 하솔이었는데, 하나님은 중앙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에서 재판하고 있던 드보라를 통해 북쪽의 바락을 부르신다.

    삿 4:6–7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의 첫 말이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이다. 이 수사 의문문을 바락이 이미 알고 있던 명령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있지만, 드보라가 지금 여호와의 명령을 권위 있게 전달하는 예언자의 어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바락이 이전부터 명령을 알고도 불순종하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명령의 출처가 드보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드보라는 중앙 산지에서 이미 사사이자 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었고, 북쪽의 압제를 깨뜨릴 군사적 사명은 바락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만일 4:6의 수사 의문문을 이미 주어진 부르심의 상기로 읽는다면, 바락은 그 사명을 알고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며,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세운 셈이 된다. 어느 쪽으로 읽든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이면서도 이 전쟁의 군사적 실행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바락이다. 히브리서 11:32가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바락의 이름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보라. 명령은 구체적이고 승리는 미리 약속되어 있다. 바락이 만 명을 데리고 다볼 산으로 가면, 하나님이 시스라와 병거와 군대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바락의 손에 넘겨 주시겠다는 것이다. 다볼 산의 산악 지형은 병거를 운용하기에 불리했고, 기손 강 일대의 평야는 비에 젖으면 병거의 기동력이 크게 떨어지는 곳이었다. 사사기 5:20–21의 노래가 이것을 '하늘에서 별들이 싸우고 기손 강이 그들을 표류시켰다'고 노래한다. 즉 하나님은 철 병거의 강점이 무력화되는 자리로 시스라를 끌어내시겠다는 것이다. 바락이 할 일은 산으로 가는 것이고, 적을 끌어내는 것과 넘겨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옷니엘 때 저자가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3:10)라고 썼던 그 문장이, 바락에게는 전쟁 전에 미리 약속으로 주어졌다.

    삿 4: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승리가 약속된 명령을 받은 바락이 조건을 단다. 바락의 이 말을 어떻게 읽을지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를 달리 한다. 바락이 두려워했다는 해석이 있고, 바락이 드보라의 인지도를 이용해 군사를 모으려 했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님이 드보라와 함께하시니 드보라를 데려가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장받는다고 바락이 생각했다는 해석이 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네 손에 넘겨 주리라'고 하셨는데 바락은 그 말씀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락에게는 말씀에 더해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들리는 것이었고, 드보라는 보이는 것이었다. 바락은 들리는 것만으로는 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바락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락은 결국 만 명을 소집하고, 다볼 산에 올라가고, 드보라의 출전 명령에 즉시 내려가 시스라의 군대를 추격한다(4:14–16). 다만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즉시 움직이는 온전한 담대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삿 4: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드보라의 답은 둘이다. 먼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드보라는 바락의 조건을 거절하지 않는다. 저자는 드보라가 바락과 함께 갔다는 말을 9–10절에서 세 번 반복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조건을 단 바락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대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어서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고대 전쟁에서 가장 큰 영광은 적장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는데, 시스라는 바락의 손이 아니라 '여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독자는 그 여인이 드보라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제로 시스라를 죽이는 여인은 전혀 다른 사람,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다(4:21). 바락은 승리에 참여했다. 그래 시스라의 군대는 실제로 바락의 손에 무너졌다. 그러나 적장을 쓰러뜨리는 최종적인 영광은 바락의 몫이 되지 않았다. 바락의 주저함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락의 주저함은 바락이 그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여기서 '파시다'라는 동사가 다시 나온다. 2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는데, 9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파신 그 손으로 압제자도 파신다.

    오늘은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나는 바락의 조건을 좀 더 깊이 묵상한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바락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말씀에 늘 조건 하나를 덧붙인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순종하겠다고 하고, 실패하지 않을 확신이 생기면 가겠다고 하고, 누군가 함께해 주면 시작하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는 부족해서 우리는 사람의 동의와 눈에 보이는 증거와 안전장치를 하나씩 더 요구한다. 나도 그렇다. 나는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옆에서 "맞아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해 주어야 움직이고, 말씀 앞에서 마음에 찔림이 있었는데도 보이는 징표 하나를 더 달라고 하나님께 조건을 붙인다. 그런데 이 본문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 바락도 결국 다볼 산에 올라갔고 하나님은 바락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바락의 주저함은 바락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흔적을 남겼다. 그래 우리가 조건을 붙인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불안 때문에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그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은 "가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이것까지 해 주시면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은 "내가 네 손에 넘겨 주겠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먼저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찾는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으로 움직이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믿음은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 걷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아도 말씀하신 분이 신실하시기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징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에 대한 더 온전한 순종이다. 그렇기에 우리 공동체가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가겠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標題:你若與我同去

    以笏死後,循環再次開始運轉。以色列人又行了耶和華眼中看為惡的事,耶和華將以色列人交在耶賓手中,壓迫持續了二十年,以色列人向耶和華呼求。到這裡為止,與俄陀聶和以笏故事的開頭如出一轍。然而接下來卻不一樣了。在俄陀聶和以笏的故事中,都有「耶和華為他們興起一位拯救者」(3:9,15)這樣的句子,但今天的經文中卻沒有這句話。前兩位士師身上出現過的「耶和華的靈臨到他身上」這句話,也同樣缺席。取而代之的,是另外的東西——已經在治理以色列的女先知底波拉,以及底波拉所召喚出來的巴拉。在這一次的拯救中,底波拉的先知性領導與巴拉的軍事性領導共同被神使用。

    士 4:2–3 耶和華就把他們交在在夏瑣作王的迦南王耶賓手中;他的將軍是西西拉,住在外邦人的夏羅設。 3 耶賓王有鐵車九百輛,他大大欺壓以色列人二十年,以色列人就呼求耶和華。

    首先要看的是壓迫的份量。夏瑣在約書亞記十一章中曾是「這一切國的元首」,是約書亞徹底毀滅並焚燒的城。然而如今夏瑣的王權再次壓在以色列身上。而且鐵車出現了。士師記1:19中曾使以色列人畏懼的那些鐵車,如今在第四章中又以九百輛這種壓倒性的姿態重新登場。壓迫的期間也在延長——俄陀聶時是八年,以笏時是十八年,這一次拉長到二十年,作者還補充說耶賓「大大」欺壓以色列人。耶賓是背景人物,真正壓制以色列的是他的將軍西西拉。

    士 4:4–5 有一位女先知底波拉,是拉比多的妻,當時作以色列的士師。 5 她住在以法蓮山地拉瑪和伯特利中間,在底波拉的棕樹下;以色列人都上她那裡去聽判斷。

    作者一開始平淡地陳述底波拉是女先知也是士師這一事實。然而這個事實,連結到第9節的「婦人之手」,並延伸到後面雅億的出現,成為第四章整體重要的文學母題。士師記中其他的士師大多是戰爭領袖,而真正記載有進行審判的士師,唯獨底波拉。相較於接下來出現的基甸、耶弗他、參孫都是帶有嚴重缺點的人物,作者對底波拉沒有添加任何負面的字眼。此外還要留意底波拉所在的位置。軍事壓迫的中心在北方的夏瑣,神卻是藉著正在中央山地拉瑪與伯特利之間審判的底波拉,呼召了北方的巴拉。

    士 4:6–7 她打發人從拿弗他利的基低斯將亞比挪菴的兒子巴拉召了來,對他說:「耶和華以色列的神吩咐你說:『你率領一萬拿弗他利和西布倫人上他泊山去。 7 我必使耶賓的將軍西西拉率領他的車輛和全軍往基順河,到你那裡,我必將他交在你手中。』」

    底波拉的第一句話是「耶和華以色列的神豈沒有吩咐你嗎?」。有一種見解認為,這個反問句是在提醒巴拉他早已知曉的命令;但也可以把它理解為底波拉此刻正以先知的語氣、以權威傳達耶和華的命令。因此難以斷定巴拉是早已知曉命令卻一直不順服。但可以確定的是,這道命令的來源不是底波拉,而是耶和華神自己。底波拉在中央山地早已以士師兼先知的身分教導神的旨意,而打破北方壓迫的軍事使命則交託給了巴拉。不過,若將4:6的反問句理解為對早已賜下之呼召的提醒,那麼巴拉便是明知使命卻遲遲未動,而底波拉召喚巴拉,便是將他重新帶到神的話語面前。不論從哪個角度理解,底波拉雖是以色列的士師,但被呼召在這場戰爭中作軍事執行者的,是巴拉。希伯來書11:32將巴拉的名字列在信心偉人之中,原因也在於此。

    再看看神的命令。命令具體,勝利也已預先應許。只要巴拉率領一萬人上他泊山,神就會把西西拉、戰車和軍隊「引到」基順河,交在巴拉手中。他泊山的山地地形不利於戰車運作,而基順河一帶的平原一旦被雨水浸濕,戰車的機動力就會大幅下降。士師記5:20–21的詩歌正是歌詠此事:「星宿從天上爭戰……基順河把敵人沖沒」。也就是說,神要把西西拉引誘到鐵車的優勢被瓦解之處。巴拉要做的,只是上山;把敵人引出來、交在他手中,則是神的作為。作者在俄陀聶的故事中所寫下的「耶和華將古珊利薩田交在他手中」(3:10)這句話,在巴拉這裡,則是在戰爭發生之前就已預先作為應許賜下。

    士 4:8 巴拉說:「你若同我去,我就去;你若不同我去,我就不去。」

    領受了應許著勝利之命令的巴拉,卻附加了條件。學者們對於該如何解讀巴拉這句話,見解略有分歧。有人解釋為巴拉心生懼怕;有人解釋為巴拉想利用底波拉的名望來召集軍隊;也有人解釋為巴拉認為神既與底波拉同在,把底波拉也帶去,才能確保神的同在。不論採取哪一種解釋,有一點是明確的——神已經應許「我必將他交在你手中」,但巴拉光憑這句話並沒有行動。巴拉需要的,除了話語,還需要一個看得見的人。神的應許是聽得見的,底波拉則是看得見的。巴拉光靠聽見的,無法邁出腳步。但這並不代表巴拉沒有信心。巴拉最終召集了一萬人,登上他泊山,並在底波拉下令出戰時立刻下山追擊西西拉的軍隊(4:14–16)。只是,巴拉未能達到單憑神的話語便立刻行動的那種完全的膽量。

    士 4:9 底波拉說:「我必與你同去,只是你在所行的路上得不著榮耀,因為耶和華要將西西拉交在一個婦人手裡。」於是底波拉起來,與巴拉一同往基低斯去了。

    底波拉的回答有兩層。首先是「我必與你同去」。底波拉並沒有拒絕巴拉的條件。作者在9到10節中三次重複底波拉與巴拉「同去」這句話。神就是這樣不撇棄那附加了條件的巴拉,依然使用了他。然而,接下來卻說:「只是你在所行的路上得不著榮耀。」古代戰爭中最大的榮耀,就是親手擊倒敵方的將領,而神卻宣告西西拉將不是死在巴拉手中,而是交在「一個婦人手裡」。讀到這裡,讀者很容易以為那婦人就是底波拉,然而實際上殺死西西拉的,卻是完全不同的另一位婦人——基尼人希百的妻子雅億(4:21)。巴拉參與了勝利,西西拉的軍隊也的確在巴拉手中潰敗。然而擊倒敵將這最終的榮耀,卻不屬於巴拉。巴拉的猶豫並沒有使神的拯救計畫失敗,但巴拉的猶豫,卻在他參與那拯救的方式上留下了痕跡。這裡「交」這個動詞再次出現。第2節中耶和華將以色列交在耶賓手中,第9節中耶和華將把西西拉交在婦人手中。神用那交出以色列的同一隻手,也交出了那壓迫者。

    今天在註釋這段經文的過程中,我更深地默想巴拉所附加的條件。因為今日我們的信仰,實在與巴拉太過相似。我們不會說自己不相信神的話語,只是我們總會在那話語之上,再添加一個條件。等到境況稍微好轉一點才願意順服,等到確信不會失敗才肯前去,等到有人願意同行才肯開始。神的應許本身不夠,我們還要求人的同意、看得見的證據、以及各種保障,一項一項地添加上去。我也是如此。我一邊禱告、一邊自認為已經得著答案,卻仍需要有人在旁邊說一句「對,就這麼做吧」才肯行動;明明在神的話語面前心裡已經受了責備,卻仍向神索求再多一個看得見的印證作為條件。然而,這段經文對我說出了一件事——巴拉最終還是登上了他泊山,神也的確使用了巴拉。可是巴拉的猶豫,卻在他參與神的拯救的方式上留下了痕跡。因此,即便我們附加條件,神的能力也不會因此減弱;神的旨意,也不會因我們的不安而失敗。只是我們自己,無法將自己完全交託給神想要藉著我們彰顯的那份能力。神說「去吧」,我們卻回答「等你為我做了這件事,我才要去」;神說「我必將他交在你手中」,我們卻先去尋找能夠成功的證據。就這樣,我們雖然相信神,卻無法享受單憑神一句話語便能行動的自由。信心並不是等到一切懼怕都消失之後才邁出的腳步,而是即便尚未看見,也因為那說話的那一位信實可靠,便願意踏出這一步。因此今天我所需要的,不是更多的印證,而是對已經賜下的話語更完全的順服。願我們的群體今天不是回應說「你若與我同去,我就去」,而是回應說「主既已說了,我就去」,願這成為我們今天禱告的方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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