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창세기 43:1-15
今日默想:創世記 43:1-15
가나안의 기근은 그치지 않았다. 애굽에서 사 온 곡식이 다 떨어지자 야곱은 다시 양식을 사러 가라고 아들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유다는 단호하다. 베냐민이 함께 가지 않으면 우리는 내려갈 수 없다고. 그 사람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야곱은 화를 낸다.
창 43:6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그래, 야곱은 베냐민만큼은 보내고 싶지 않다. 라헬에게서 얻은 두 아들 중 요셉을 이미 잃었다고 믿는 그에게, 베냐민은 마지막 남은 라헬의 흔적이다. 그래서 이 아이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이전에 성파시간에 성도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나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라면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애굽 사람들은 베냐민의 얼굴을 모를 테니, 다른 사람을 베냐민이라 속여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내 머리가 가장 먼저 굴러가는 길이다. 그런데 야곱과 그 아들들은 그렇지 않다. 진짜 베냐민을 데리고 가려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결국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래서 내 눈에는 그들이 나보다 훨씬 정직해 보인다. 물론 문화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항상 이 본문 앞에서 나의 생각이 너무... 여튼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정직하게 만들었을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는 마음이, 이들의 삶에 어느덧 습관이 된 것일까? 모르겠다. 신학자나 설교자들 중에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있는지도 가끔 궁금하다. 다만 내가 이런 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정직하지 못한 삶을 조용히 책망한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습은 잠시 내려놓고, 본문을 좀 더 묵상해 보자. 성경이 이 자리에서 말하려는 것은 결국 두 가지다. 하나는 야곱의 고집을 꺾는 환경이다. 또 하나는 유다의 선언이다. 한때 요셉을 은 이십에 팔자고 한 그 입(창 37:26-27)에서, 이제는 동생을 위해 자기 자신을 담보로 내어놓겠다는 말이 나온다.(이 부분은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봐야 한다) 그래 어찌되었든 이 모든 변화—야곱의 손이 풀리는 것과 유다의 입에서 담보의 약속이 나오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마침내 야곱이 입을 연다.
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야곱이 벧엘로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바로 그 이름이다(창 35:11). 그 하나님 앞에 야곱은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려놓는다. 그렇기에 '잃으면 잃으리라'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항복이면서 동시에 신뢰다. 그가 평생 붙들어 온 모든 것을,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자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오늘 나의 역사도 주관하고 계신다. 야곱의 고집을 환경으로 꺾으신 그 하나님이, 유다의 입술을 담보의 자리까지 빚어내신 그 하나님이, 나의 굽은 생각도 정직한 자리로 이끌어 가시기를 소망한다. 그래 나는 여전히 매일 실패한다. 오늘도 어느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정직보다 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다시 노력한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길 소망하며... 그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공동체를 섬길 수 있길...
오늘도 주일을 섬기며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길...
迦南的饑荒仍未止息。從埃及買回的糧食耗盡之後,雅各再次吩咐兒子們下去買糧。然而猶大態度堅定:若便雅憫不同行,我們就無法下去。因為那人曾明確地這樣說過。
於是雅各發怒了。
創 43:6 以色列說:「你們為甚麼告訴那人你們還有一個兄弟,使我受這樣的害呢?」
是的,雅各唯獨不願送走便雅憫。他深信自己早已失去了拉結所生的兩個兒子中的約瑟,而便雅憫,是拉結留給他最後的痕跡。所以他心中認定,唯獨這個孩子,絕對不行。
我曾在聖經課時與弟兄姊妹分享過,每次讀到這段經文,我都覺得自己內心的醜陋被揭露出來。因為若換作是我,我不會送出真正的便雅憫。我大概會這樣盤算:埃及人反正不認識便雅憫的臉,找個人冒充便雅憫送過去就行了。這是我腦中最先轉動的念頭。然而雅各和他的兒子們並非如此。他們為了帶真正的便雅憫前去而掙扎、痛苦,最終在艱難的處境中做出了別無選擇的決定。正因如此,在我眼中,他們比我誠實得多。當然,這或許也有文化差異的因素,但無論如何,我每次面對這段經文,都覺得自己的心思實在太……總之就是這樣。
那麼,究竟是什麼使他們如此誠實?是那顆渴望在全能的神面前活得無愧的心,在歲月中已悄然成為他們生命的習慣了嗎?我不確定。有時我也好奇,神學家或講道者中,是否有人像我一樣思考過這樣的問題。只是,我第一個浮現的竟是這樣的心計,這件事本身,已在無聲地責備我那不夠誠實的生命。
然而,暫且放下對自己的審視,讓我們更深地默想這段經文。聖經在這裡所要說的,歸根究底有兩件事:其一,是折服雅各固執的環境;其二,是猶大的宣告。曾經那個開口提議將約瑟以二十塊銀子賣掉的嘴(創 37:26-27),如今卻說出了願以自身為弟弟作擔保的承諾。(這部分需要與創世記三十八章猶大與他瑪的故事連結來看。)是的,無論如何,為了成就這一切的改變——雅各鬆開緊握的手,以及猶大口中發出擔保的應許——神正在掌管著這段歷史。
終於,雅各開口了。
創 43:14 但願全能的神使那人對你們施憐憫,釋放你們的那個兄弟和便雅憫回來。我若喪失兒子,就喪失吧!
全能的神(El Shaddai)。這正是雅各上到伯特利時,神向他所啟示的那個名字(創 35:11)。在這位神面前,雅各連最後一絲的自尊也放下了。因此,「若喪失,就喪失吧」——這不是認命,而是降服,同時也是信靠。這是他將畢生緊握的一切,如今交託在全能之神手中的時刻。
而那位神,今天也掌管著我的歷史。那位以環境折服雅各固執的神,那位將猶大的嘴唇塑造到甘願擔保之地步的神,我也盼望祂能引導我那彎曲的心思,走向誠實的地方。是的,我仍然每天失敗。或許今天某個時刻,我腦中最先浮現的依然是心計,而非誠實。但即便如此,我仍要再次努力。我盼望能在神面前活出無愧的生命,誠實而忠實地生活……也盼望能以那份誠實與忠實,服事這個群體……
在今天主日服事的日子裡,盼望能在神與弟兄姊妹面前,活出無愧的一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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