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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2:1–10

    今日默想:士師記2:1-10

    한경우··조회 33

    보김, 우는 자들

    사사기 1장은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 장이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이라는 문장으로 끝났다. 이처럼 유다 지파도, 요셉 지파도, 결심이 없는 백성은 남쪽도 북쪽도 다 실패했다. 그런데 1장은 이스라엘의 실패라는 현상을 서술한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 스스로는 가나안 족속에게 철 병거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아직 강성하지 못해서, 그리고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는 편이 나아서 그랬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 실패를 어떻게 판정하셨을까. 오늘 본문이 그 답이다.

    삿 2: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오늘 이 본문에서 먼저 살펴 볼 것은 '올라와'라는 단어이다. 사사기 1장을 보면 내내 '올라가다'는 이스라엘의 동사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라고 물었고, 유다가 올라갔고, 요셉이 올라갔다. 그런데 2장에서 올라오는 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이다. 이 반복을 저자의 의도로 읽는다면, 정복하러 올라가야 했던 이스라엘이 멈춘 자리에 이제 하나님이 판정의 말씀을 가지고 올라오시는 장면이 된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따지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의 출발점이 길갈이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처음 발을 디딘 곳이고, 이스라엘이 열두 돌을 세운 곳이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못 했던 할례를 받고 첫 유월절을 지킨 곳이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새로워진 자리다. 그 자리에서 올라오신 하나님이 먼저 하시는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회고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했다. 내가 너희를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했다.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겠다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쪽의 신실함을 먼저 세 번 확인하신 뒤에야 이스라엘 쪽을 물으신다.

    삿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여기에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이 있다. 하나님은 철 병거를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강성하지 못했던 것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지난 며칠 우리가 본문에서 읽어 낸 것, 즉 이스라엘의 실패는 힘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였다는 것을 하나님이 직접 확인해 주시고 계신다. 게다가 '언약'이라는 말이 1절과 2절에 나란히 나온다. 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어기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2절에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었다. 사실 본문이 이스라엘이 가나안과 직접 언약을 맺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벧엘에서 요셉 자손이 가나안 사람에게 한 약속(1:22–26)은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했던 언약의 언어를 그대로 빌려 쓴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자는 요셉 자손의 그 일을 금지된 언약의 한 사례로 읽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는 하나님의 단순한 꾸중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언약 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라고 볼 수 있다.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선고는 셋이다. 첫째,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이스라엘 앞에서 더 이상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초에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마음이 없었으니 이 선고가 당장은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하지만 그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의 옆구리에 가시가 된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며 부리고 있지만, 오늘 이스라엘의 값싼 노동력이 내일 이스라엘의 압제자가 된다는 말이다. 셋째, 가나안 족속의 신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된다. 올무는 새를 잡는 덫이다. 먹이만 보고 달려드는 새처럼 이스라엘이 풍요의 신들에게 걸려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새로운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기 23장에서 이미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고 하셨던 경고가 이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지찬 교수가 지적하듯이, 사사기의 첫 번째 서론은 이 3절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로 끝나고, 두 번째 서론도 2:21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로 끝난다. 두 서론이 한 목소리로 같은 결론을 낸다. 사사기 전체가 이 문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선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을까.

    삿 2:4–5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보김(בֹּכִים)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었고, 그 자리에 이름까지 붙였고, 여호와께 제사까지 드렸다. 겉으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회개의 장면이 없다.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백성의 울음과 제사는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심판 선언을 철회하셨다는 말씀은 없다. 그리고 6절부터 저자는 시계를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되돌려, 이 눈물이 다음 세대의 신실함으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보김에서 운 세대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고, 그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사기의 서술은 결국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로 넘어간다.

    삿 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그래 이스라엘은 보김에서 울었고,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결국 바알을 섬기게 되었다. 이처럼 울음과 제사는 있었는데 돌이킴이 없었던 것이다. 한 신학자는 사사기는 어떤 면에서 통곡의 책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처음에 보김에서 울었고, 끝에는 동족 베냐민과 싸우면서 벧엘에서 또 울었다(20:23, 26; 21:2).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못해서 울었는데,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죽이고 울었다. 이처럼 수많은 통곡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스무 장 동안 이스라엘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처럼 통곡이 돌이킴을 대신할 때 그 눈물은 회개가 아니라 신세타령이 된다. 안다. 물론 이스라엘의 슬픔은 진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은 회개의 시작이지 회개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 울기만 해선 안된다. 반드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6절부터 저자는 시계를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되돌린다. 첫날 묵상에서 본 그 두 번째 보도다. 저자는 여호수아 24장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오되 순서를 바꿔서, 여호수아의 죽음 바로 뒤에 10절을 붙여 놓는다.

    삿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알다'(야다)라는 단어는 단순한 정보의 인지를 넘어, 여호와를 언약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험하는 관계적 앎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이 세대가 여호와의 이름을 못 들었을 리 없다. 이 세대도 제사를 드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이 이 세대에게는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앞뒤가 맞물린다. 앞에서는 울었으나 돌이키지 않은 백성이 있고, 뒤에서는 제사는 드리나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있다. 감정은 있는데 관계가 없고, 종교는 있는데 순종이 없다. 이것이 사사기가 시작되는 자리이다.

    오늘 새벽에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나는 보김이라는 이름의 뜻을 다시금 묵상해 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보김이 여러 곳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울었던 자리, 우리가 기도하다가 무너졌던 자리, 우리가 이번에는 정말 달라지겠다고 했던 자리들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돌아보면 우리는 그 눈물 뒤에 쫓아낸 것이 별로 없다. 울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가벼움을 회개로 착각하고 그냥 일어나서 똑같이 살아왔다. 안다. 보김에서 흘린 이스라엘의 눈물은 진짜였다. 우리의 눈물도 역시 진짜였다. 그런데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기다리신 것은 눈물이 아니라 돌이킴이었다. 그러니 오늘 나는 내가 흘리는 눈물의 이유를 명확히 알고, 그 돌이켜야 하는 삶의 모습을 잊지 않는 참되 회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길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 역시 모두 진정한 회개, 그저 눈물의 후회가 아닌 돌이킴의 삶을 살아낼 수 있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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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波金,哭泣的人

    士師記第一章以神的話語「我已將這地交在他們手中」開始,卻以「亞摩利人的境界」這樣的句子結束。就這樣,無論是猶大支派,還是約瑟支派,那沒有決心的百姓,南方也好,北方也好,全都失敗了。然而第一章所描述的,只是以色列失敗這件事的現象而已。也就是說,以色列自己大概會說,是因為迦南人有鐵車,是因為以色列還不夠強盛,又或者是讓迦南人服勞役對自己更有利,所以才會如此。那麼,神對以色列這次的失敗,究竟是如何判定的呢?今天的經文,就是答案。

    士2:1 耶和華的使者從吉甲上到波金,對以色列人說:我使你們從埃及上來,領你們到我向你們列祖起誓應許之地。我又說:我永不廢棄與你們所立的約。

    在今天這段經文中,首先要留意的是「上到」這個字。因為在士師記第一章裡,「上去」始終是以色列的動詞。以色列曾問「誰當首先上去」,猶大上去了,約瑟也上去了。但到了第二章,上來的卻不是以色列,而是耶和華的使者。若將這樣的重複看作作者刻意的安排,那麼這便是:原本該上去征服卻停下腳步的以色列所停留的地方,如今神帶著判決的話語上來了。只是問題在於,神並非為以色列而戰而來,而是來與以色列理論、追究的。然而有趣的是,耶和華使者的出發點是吉甲。吉甲是以色列過約旦河後最先踏足之地,是以色列立起十二塊石頭的地方,也是以色列補行了在曠野未行的割禮、並守第一個逾越節的地方。也就是說,那是神與以色列之約更新的地方。從那裡上來的神,首先說的話並非責備,而是回顧。我使你們從埃及上來。我領你們進入我所起誓應許的地。我曾說,我與你們所立的約永不廢棄。如此,神先三次確認了自己那一方的信實,然後才追問以色列這一方。

    士2:2 你們也不可與這地的居民立約,要拆毀他們的祭壇。你們竟沒有聽從我的話!為何這樣行呢?

    這裡有神對以色列失敗所下的判決。神沒有提到鐵車。神也沒有提到以色列不夠強盛。「你們竟沒有聽從我的話!」這幾天我們從經文中所讀出的——以色列的失敗並非力量的問題,而是順服的問題——神親自在此為我們確認了這一點。而且,「約」這個字在第1節和第2節緊接著出現。第1節神說祂不會廢棄與以色列所立的約,而第2節裡,以色列卻忘記了與神所立的約,反倒與這地的居民立約。事實上,經文並未直接說以色列與迦南人立了約。只是,伯特利那裡約瑟的子孫向迦南人所作的承諾(1:22-26),正是原原本本借用了探子們對拉合所立之約的語言。因此,作者是要我們把約瑟子孫所做的這件事,看作被禁止之約的一個實例。所以,「為何這樣行呢」並非神單純的責問,而可以看作是神對以色列毀約所發出的責備。

    士2:3 因此我說:我必不將他們從你們面前趕出;他們必作你們肋下的荊棘,他們的神必作你們的網羅。

    神向以色列所下的宣判有三。第一,神不再將迦南人從以色列面前趕出去。以色列本來就無心趕出迦南人,所以這宣判當下應該不會令他們感到痛苦。第二,然而那迦南人卻將成為以色列肋下的荊棘。如今以色列驅使迦南人服勞役、利用他們,但今日以色列低廉的勞動力,明日將成為以色列的壓迫者。第三,迦南人的神將成為以色列的網羅。網羅是捕鳥的陷阱。意思是,以色列會像只顧著看食物就撲上去的鳥一樣,落入那些豐產之神的圈套。然而這句話並非新的咒詛。神在出埃及記23章早已警告過:「你若服事他們的神,這必成為你的網羅」,如今這警告成了現實。而正如金志燦教授所指出的,士師記第一段序言以第3節「我必不將他們從你們面前趕出」結束,第二段序言也以2:21「一個也不趕出」結束。兩段序言異口同聲得出同一個結論。整本士師記,正是立於這句話之上的。

    那麼,聽見這宣判的以色列百姓,做了什麼呢?

    士2:4-5 耶和華的使者向以色列眾人說這話的時候,百姓就放聲而哭。5 於是給那地方起名叫波金,眾人在那裡向耶和華獻祭。

    波金(בֹּכִים)的意思是「哭泣的人」。以色列百姓放聲大哭,甚至為那地方起了名字,還向耶和華獻了祭。表面看來,再沒有比這更完美的悔改場景了。然而仔細一看經文,卻有一個奇怪之處。百姓的哭泣與獻祭都記錄下來了,但卻沒有一句話說神收回了審判的宣告。而從第6節開始,作者將時鐘倒回到約書亞去世之時,向我們顯明這淚水並未延續成為下一代的信實。在波金哭泣的那一代,並沒有趕出迦南人,而下一代,則不認識耶和華。士師記的敘事,最終走向以色列拜巴力的地步。

    士2:11 以色列人行耶和華眼中看為惡的事,去侍奉巴力。

    是的,以色列在波金哭過,也獻過祭。但最終卻去服事了巴力。就這樣,有哭泣,有獻祭,卻沒有回轉。有一位神學家說,士師記在某種意義上是一本痛哭之書。原因是,以色列起初在波金哭泣,結尾卻又在與同族便雅憫爭戰時,在伯特利再次哭泣(20:23,26;21:2)。起初是因無法趕出迦南人而哭,最後卻是因以色列自相殘殺而哭。就這樣,書中記載了無數的痛哭。然而在這中間的二十章裡,以色列的生活卻絲毫沒有改變。就這樣,當痛哭取代了回轉,那眼淚便不再是悔改,而成了自憐自艾的哀嘆。我明白,以色列的悲傷也許確實是真實的。然而,那悲傷只是悔改的開始,並非悔改本身。所以,不能只是哭泣。必須要有回轉。

    而從第6節開始,作者將時鐘倒回約書亞去世之時。這正是我們在第一天默想時所見的第二段記述。作者原封不動地取用了約書亞記24章的記載,只是調換了順序,將第10節緊接在約書亞去世的記述之後。

    士2:10 那世代的人也都歸了自己的列祖。後來有別的世代興起,不知道耶和華,也不知道耶和華為以色列所行的事。

    這裡「知道」(雅達,יָדַע)這個詞,不僅僅是單純知悉某項資訊,更包含了承認並經歷耶和華為立約之神的那種關係性的認識。這一代人不可能沒聽過耶和華的名字。因為這一代人應該也曾獻過祭。然而,這一代人卻並不認識神。神為以色列所行的事,對這一代人來說,並不是「自己的故事」,而是「別人的故事」。所以,今天這段經文前後是相互呼應的。前面有哭過卻沒有回轉的百姓,後面則有獻祭卻不認識神的世代。有情感,卻沒有關係;有宗教,卻沒有順服。這,正是士師記開始的地方。

    今天清晨在解讀這段經文時,我再次默想「波金」這個名字的意義。因為我們自己也有許多個「波金」——那些我們曾在神的話語前哭泣的地方,那些我們禱告到崩潰痛哭的地方,那些我們曾說「這次我真的要改變」的地方。然而說實話,回頭一看,我們在那眼淚之後,其實並沒有趕出什麼。哭過之後心裡會覺得輕鬆,於是我們便將那種輕鬆誤認作悔改,然後站起來,繼續過著和從前一樣的生活。我明白,以色列在波金流下的眼淚是真實的。我們的眼淚也同樣是真實的。然而,神在以色列身上、也在我們身上所等候的,並不是眼淚,而是回轉。所以,今天我盼望自己能清楚明白自己流淚的原因,不忘記那必須回轉的生命樣式,活出真實悔改的生命。同時,我也為我們的信仰群體禱告,願我們都能活出真正的悔改——不僅僅是眼淚中的懊悔,而是真實回轉的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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