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2:11–23
今日默想:士師記 2:11–23
바알을 옆에 두었을 뿐
어제 묵상한 본문 2:10에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났다. 오늘 본문은 그 세대가 무엇을 했고, 하나님이 그 세대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요약한다. 그런데 이 단락은 어느 한 시점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3장부터 16장까지 이어질 사사들의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틀로 미리 압축해서 독자에게 보여 준다. 말하자면 저자가 독자에게 "사사기는 이 순서로 읽어라"라고 안경을 씌워 주는 대목이다. 첫날 묵상에서 말했던 그 순환, 즉 이스라엘의 범죄, 하나님의 진노, 대적의 압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하나님의 구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재범죄가 바로 여기서 제시된다. 물론 이 틀은 책이 진행될수록 무너져서 삼손에 이르면 이스라엘이 제대로 부르짖지도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악순환의 첫 단계, 이스라엘이 무엇을 했는가에 머물러 보려 한다.
삿 2:11–1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본문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아야 한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 그렇다. 사사기 저자는 이스라엘이 버린 분이 어떤 분인지를 굳이 길게 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냥 신을 바꾼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노예에서 건져 내신 분을 버렸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의 죄는 잘못된 종교 선택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배신이다. 그리고 바알은 비와 폭풍을 다스리며 농경의 풍요를 약속하던 가나안의 주신이고, 13절의 아스다롯은 바알과 함께 숭배되던 사랑과 전쟁과 생식의 여신이다. 즉 이스라엘이 따라간 신들은 농사와 자식과 안전, 곧 먹고사는 문제를 책임진다고 약속하는 신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정확히 보아야 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렸다고 두 번이나 말한다(12, 13절).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정말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여호와의 제단을 허물고, 여호와의 이름을 지웠을까. 본문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르고 절하고 섬겼다고 말하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제사를 그쳤다고는 어디에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지찬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스라엘 자신의 생각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다고 표현한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겼다. 여호와는 출애굽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시고, 바알은 비와 곡식의 주인이라고 영역을 나누어 섬긴 것이다. 그리고 사사기 자체가 그 증거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바알의 제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들에게 여호와 신앙의 이름을 붙였고(6:25–32), 미가는 신상을 세워 놓고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17:13)라고 했다. 사실 이 문제는 사사 시대로 끝나지 않는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한 손으로 이방 신들의 산당을 지었고(왕상 11장),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고 외쳤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것을 "여호와를 버렸다"고 판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십계명의 이 첫 계명에서 '나 외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내 얼굴 앞에'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첫 계명은 단순히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으로 갈아타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다. 첫 계명은 여호와의 면전에 어떤 경쟁하는 신도 두지 말라는 배타적 충성을 요구한다. 즉 여호와 신앙은 전쟁은 여호와, 비는 바알, 출산은 아스다롯이라는 식으로 신들의 영역을 나누는 다원주의 신앙체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옆에 바알을 두는 순간, 하나님 편에서 그것은 이미 여호와를 버린 것이다. 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은 다만 바알을 옆에 두었을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삿 2: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본문에서 '팔아 넘기다'라는 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 동사는 사사기에서 계속 반복된다(3:8; 4:2; 10:7).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물건처럼 대적에게 팔아 넘기셨다는 것이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이 종살이로부터 구속하신 백성을, 이제 하나님이 다시 대적의 손에 파신다는 역설이 여기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자기가 건짐받기 전의 자리로 스스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17절은 이스라엘의 이 배반을 '음행'이라고 부른다.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이 동사는 예언서에서 다른 신을 좇는 이스라엘의 언약적 배신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은유가 된다. 호세아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시내산 언약을 혼인으로 읽으면서, 우상숭배를 남편을 둔 아내가 다른 남자를 옆에 두는 일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 옆에 다른 남자를 두는 것은 남편을 반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혼합주의를 배교로 판정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이 어두운 본문 한가운데 뜻밖의 문장이 있다.
삿 2: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본문을 잘 봐라. 이스라엘이 회개해서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신 것이 아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돌이켜서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아파서 부르짖었다. 실제로 이 단락에서 '돌아오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19절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켜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돌아선 방향은 하나님 쪽이 아니라 우상 쪽이었다. 그런데 18절에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נָחַם, 나함)고 한다. 우리말로는 같은 '돌이키다'이지만 히브리어는 다른 단어이고, 나함이란 단어는 계획을 바꾸셨다는 뜻보다 불쌍히 여겨 마음을 누그러뜨리셨다는 뜻이 강하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적어도 이 단락 안에서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한 상이 아니라, 회개도 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에서 주어진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 은혜 뒤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
삿 2: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첫날 묵상에서 말한 것이 여기 있다. 이 순환은 제자리를 도는 원이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이스라엘은 한 바퀴 돌 때마다 조금씩 더 내려앉는다. 여호수아 세대는 여호와의 큰 일을 보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2:10). 그런데 그 다음 세대는 사사를 통해 여호와의 구원을 직접 보고서도 조상들보다 더 타락했다(2:19). 보지 못해서 몰랐던 세대보다, 보고서도 돌아선 세대가 더 아래에 있다. 이것이 나선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21절에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첫 서곡이 2:3의 이 문장으로 끝났듯 둘째 서곡도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다만 여기에는 '나도'라는 말이 하나 더 붙어 있다. 그런데 이 '나도'를 오해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으니 하나님도 언약을 어기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2:1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시는 것은 언약 파기가 아니라, 언약 안에 이미 경고되어 있던 심판을 하나님이 언약대로 시행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불성실했고, 하나님은 그 불성실을 심판하시는 데에서도 언약에 신실하셨다. 그리고 22절에서 하나님은 남겨진 그 민족들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길을 지키는지 시험하는 도구로 삼으신다. 이스라엘 곁에 남은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의 실패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시험이 되었다.
오늘 새벽에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신학자들이 이야기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바알을 옆에 두었을 뿐이다'라는 문장을 깊이 묵상해 본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교회의 모습이고, 목사인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예배를 그친 적이 없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운 적도 없다. 다만 교회는 그 옆에 성장을, 숫자를, 안정을 나란히 두었을 뿐이다. 물론 성장과 숫자와 안정은 그 자체로 바알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교회의 선택을 좌우하는 최종 기준이 되는 순간 그것들은 바알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나는 그 옆에 사람들의 인정을 두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이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보다 사람들이 이 설교를 어떻게 들을까를 먼저 계산할 때가 있다. 나는 내가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가도 그렇게 생각했고 솔로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내 얼굴 앞에 다른 것을 두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오늘 나는 내가 여호와 옆에 나란히 세워 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只是把巴力擺在旁邊而已
昨天默想的經文2:10中,出現了不認識耶和華的一代。今天的經文總結了那一代人做了什麼,以及神如何對待那一代人。然而,這段經文並非記錄某一時間點的歷史。作者將從第3章延續到第16章的士師故事整體,預先壓縮成一個框架,呈現給讀者看。可以說,這是作者為讀者戴上眼鏡,告訴讀者「士師記要按這個順序來讀」的段落。第一天默想時提到的那個循環——以色列犯罪、神發怒、敵人壓迫、以色列哀求、神拯救,然後以色列再次犯罪——正是在這裡被提出的。當然,這個框架會隨著書卷的推進而逐漸崩解,到了參孫的時候,以色列甚至連好好地哀求都沒有了。不過今天,我想停留在這個惡性循環的第一階段,也就是以色列做了什麼。
士2:11–12 以色列人行耶和華眼中看為惡的事,去事奉諸巴力,12 離棄了領他們出埃及地的耶和華、他們列祖的神,去叩拜別神,就是四圍列國的神,惹耶和華發怒。
在經文中,我們要留意耶和華是如何被稱呼的。「領他們出埃及地的、他們列祖的神耶和華。」是的,士師記的作者刻意用較長的篇幅,描述以色列所離棄的那一位究竟是誰。因為以色列並不只是單純換了個神明信仰,而是離棄了那位將他們從奴隸境地中拯救出來的那一位。也就是說,以色列的罪不是宗教選擇上的錯誤,而是對那位救贖了自己的神的立約背叛。而巴力是掌管雨水與風暴、應許農耕豐收的迦南主神;13節中的亞斯她錄,則是與巴力一同被敬拜、掌管愛情、戰爭與生育的女神。也就是說,以色列所追隨的那些神明,是應許負責農作、生育與安全,即負責溫飽問題的神明。
然而在此有一點需要準確地看清楚。作者兩次(12、13節)都說以色列離棄了耶和華。那麼,以色列真的背棄了耶和華、拆毀了耶和華的祭壇、抹去了耶和華的名嗎?經文只說以色列跟從、叩拜、事奉別的神,卻沒有任何地方說以色列停止向耶和華獻祭。因此金志燦教授在他的書中表示,就以色列自己的想法而言,他們從未離棄過耶和華。也就是說,以色列既事奉耶和華,也事奉巴力。他們把耶和華當作出埃及的神、歷史的主宰,把巴力當作雨水與穀物的主宰,劃分領域來分別事奉。士師記本身就是明證。基甸的父親約阿施擁有巴力的祭壇,卻給兒子取了帶有耶和華信仰意涵的名字(6:25–32);米迦立起神像後卻說:「現在我知道耶和華必賜福與我」(17:13)。事實上,這個問題並沒有隨士師時代結束。所羅門用奉獻聖殿的雙手,為外邦神明建造邱壇(王上11章);以利亞在迦密山上呼喊:「你們心持兩意要到幾時呢?」(王上18:21)。在以色列的歷史中,幾乎沒有人認為自己離棄了神。然而士師記的作者卻判定那就是「離棄了耶和華」。這是為什麼呢?
出20:3 除了我以外,你不可有別的神。
在十誡的這第一條誡命中,被翻譯為「除了我以外」的希伯來文,字面意思是「在我面前」。因此第一條誡命不僅僅是說不要離棄耶和華、改換其他神明而已。第一條誡命要求的是排他性的忠誠——不可在耶和華面前擺放任何與祂競爭的神明。也就是說,對耶和華的信仰不允許戰爭歸耶和華、雨水歸巴力、生育歸亞斯她錄這種劃分神明領域的多元主義信仰體系。因此,當以色列把巴力擺在耶和華旁邊的那一刻,從神的角度來看,那已經等同於離棄了耶和華。我明白,以色列從未認為自己離開了耶和華。以色列只是把巴力擺在旁邊而已。
那麼神如何對待這樣的以色列呢?
士2:14 耶和華的怒氣向以色列人發作,就把他們交在搶奪他們的人手中,又將他們付與四圍仇敵的手中,甚至他們在仇敵面前再不能站立得住。
經文中「付與」一詞值得留意。這個動詞在士師記中反覆出現(3:8;4:2;10:7)。神像對待物品一樣,把以色列「賣」給了敵人。在出埃及記中,神救贖脫離為奴之地的百姓,如今卻又被神再次「賣」到敵人手中——這裡有著這樣的一種弔詭。以色列因背叛神,自己回到了被拯救之前的境地。而17節將以色列的這種背叛稱為「行淫」。這個指涉性方面不貞的動詞,在先知書中成為描繪以色列追隨別神、背叛立約的代表性隱喻。何西阿、耶利米、以西結將西奈山之約解讀為婚姻,將拜偶像描繪成有丈夫的妻子在身邊安置了另一個男人。而妻子在丈夫身旁安置另一個男人,並不是對丈夫愛得少一半,而是離棄了丈夫。這正是神將以色列的混合主義判定為背教的原因所在。
然而在這段黑暗的經文正中央,卻有一句出人意料的話。
士2:18 耶和華為他們興起士師,就與那士師同在。士師在世的一切日子,耶和華拯救他們脫離仇敵的手;他們因受欺壓擾害,就哀聲歎氣,所以耶和華後悔了。
請仔細看這段經文。並非以色列悔改了,神才興起士師。經文說是因他們「受欺壓擾害,就哀聲歎氣」。以色列不是回轉之後才哀求的,而是因痛苦而哀求。實際上,在這段經文中,「回轉」這個希伯來文動詞只出現了一次,就在19節,而且那句話並不是說以色列回轉歸向神,而是說「他們回轉,比他們列祖更加敗壞」。以色列回轉的方向不是朝向神,而是朝向偶像。然而在18節中,神卻「後悔了」(נָחַם,納罕)。中文都譯作「回轉/後悔」,但希伯來文用的是不同的詞,「納罕」這個詞所表達的,與其說是改變計畫,不如說更強烈地帶有憐憫而心軟的意思。所以換句話說,弔詭的是,以色列並沒有回轉歸向神,而是神看見以色列的痛苦,自己心意回轉、憐憫了他們。至少在這段經文中,士師並不是對以色列悔改的獎賞,而是神憐憫那毫無悔改之心的百姓,所賜下的拯救。
而在那恩典之後,以色列又做了什麼呢?
士2:19 及至士師死後,他們就轉去行惡,比他們列祖更甚,去事奉叩拜別神,總不斷絕頑梗的惡行。
第一天默想中所提到的,正在這裡呈現。這個循環並不是原地打轉的圓圈。「比他們列祖更加敗壞」——以色列每繞一圈,就往下沉一些。約書亞那一代人親眼見證耶和華的大能作為,因而事奉耶和華。下一代卻不認識耶和華(2:10)。而再下一代,儘管透過士師親眼目睹了耶和華的拯救,卻比列祖更加敗壞(2:19)。比起因未曾目睹而不認識的那一代,親眼看見卻仍然背離的那一代,處境更加低下。這就是螺旋式下墜。
因此神在21節說:「約書亞死的時候所剩下的各族,我必不再從他們面前趕出。」正如第一段序曲以2:3這句話結束,第二段序曲也以同樣的話結束。只是這裡多加了「我也」這個詞。然而這個「我也」不可被誤解。這並不是說以色列既已違背了約,神也要違背約。神在2:1中曾說:「我永不廢棄與你們所立的約。」神留下迦南各族,並非廢棄了約,而是把約中早已警告過的審判,按著約如實施行出來。以色列對約不忠信,而神即便是在審判這種不忠信時,也仍對約信實。並且在22節中,神將那些留下的民族,當作試驗以色列是否謹守耶和華道路的工具。留在以色列身邊的迦南各族,既是以色列失敗的結果,同時也成了神的試驗。
今天清晨在注解這段經文時,我深深默想著神學家們所說的那句話:「以色列從未認為自己離開了耶和華,只是把巴力擺在旁邊而已。」因為這不僅僅是士師時代以色列的景況,也是今日教會的樣貌,更是身為牧師的我自己的樣貌。今日的教會從未停止敬拜。今日的教會也從未抹去神的名。只是教會把增長、數字、穩定,並排擺在了神的旁邊。當然,增長、數字、穩定本身並不是巴力。然而,當這些東西成為左右教會抉擇、凌駕於神旨意之上的最終標準時,它們就佔據了巴力的位置。而我,把人們的認可擺在了旁邊。在預備講道時,有時我計算的,是人們會如何聽這篇講道,而不是神在這段經文中要說什麼。我曾以為自己從未離棄過耶和華。米迦也是這樣想的,所羅門也是這樣想的。然而神卻對我說:「你在我面前擺上了別的東西。」因此,願今天成為這樣的一天:讓我準確地正視自己在耶和華身旁並排擺放了什麼,並將這一切都放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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