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6:11–24
今日默想:士師記6:11-24
제목 : 여호와 살롬
어제 본문에서 이름 없는 선지자가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구원의 약속 없이 책망만 남겼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인 오늘 본문 11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난다. 어제 말한 그 두 층위가 여기서 맞물린다. 선지자의 말에는 구원이 없었지만 이야기에는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기드온을 부르시는 장면인데, 송병현 교수의 구조 분석에 따르면 기드온 이야기의 중심부는 두 제단 이야기다. 첫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이 쌓는 '여호와 살롬' 제단이고, 두 번째는 내일 본문에서 기드온이 헐어야 할 아버지의 바알 제단이다.
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독자가 기드온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이것이다. 밀 타작은 바람이 잘 통하는 넓은 타작마당이 필요한 일이다. 도리깨로 내리쳐 줄기와 알곡을 나누고 바람에 날려 겨를 걸러 내야 한다. 그런데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그 일을 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포도주 틀은 바위를 파서 만든 좁은 웅덩이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거기 들어가 몰래 밀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어제 본문 2절에서 이스라엘이 산과 굴과 산성에 숨었다고 했는데, 기드온 역시 그 숨은 백성의 한 사람이다. 사사기에서 가장 길고 상세한 사사 이야기이자 책의 구조적 전환점에 놓인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된다. 숨어서, 두려워하면서...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이 모습이 본문이 주는 해학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그렇기에 숨어서 타작하는 사람에게 '큰 용사여'라고 부르신다. 이처럼 지금 포도주 틀에 숨어 곡식을 타작하고 있는 사람과 이 호칭 사이에는 분명한 긴장이 있다. 그런데 그 긴장은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해소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하시지 않는지가 우리의 호칭이 바뀌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이 한 문장이 오늘 본문의 열쇠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모든 반론이 이 문장을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고, 하나님의 모든 대답도 이 문장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삿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기드온의 첫마디는 감사가 아니라 항변이다. 그리고 그 항변은 논리가 정연하다. 함께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조상들이 말하던 그 이적들은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첫째, 기드온은 출애굽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이르기를"이라고 말한다. 출애굽이 그에게는 직접 경험된 구원의 기억이라기보다 조상에게서 전해 들은 신앙 전승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둘째, 기드온의 말은 사실 자체로는 틀리지 않았다. 6:1이 분명히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넘기신 것은 맞다. 다만 기드온은 왜 넘기셨는지를 보지 못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재를 문제 삼았고,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문제 삼았다. 기드온은 절반만 본 것이다.
삿 6: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기드온의 질문에 이 자리에서 다시 설명하지 않으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답은 이미 어제 선지자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은 설명 대신 사명을 주신다. 가라. 그리고 문장의 끝이 다시 질문이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낸다'고 하신다. 버림을 말하는 사람에게 파송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자 기드온이 또 물러선다. 우리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15절). 겸손한 자기 인식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기드온은 여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기 자원과 능력의 크기로 계산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또 같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16절). 기드온이 자기가 작다고 하자 하나님은 기드온을 크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내가 함께 있겠다고만 하신다.
그래도 기드온은 확신이 서지 않아 표징을 구한다(17절).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이 놀랍다.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18절). 기드온이 염소 새끼를 잡고 밀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어 오는 동안 하나님은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계신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고기와 무교병에 대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그것을 살랐다(21절).
삿 6:22–24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불이 타오르자 기드온은 이제야 이분이 누구신지 안다. 그런데 그의 첫 반응이 기쁨이 아니라 공포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출 33:20). 방금까지 하나님께 따지고 조건을 달던 사람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자 하나님이 세 마디로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히브리어로는 '샬롬 레카', 곧 '너에게 평화가 있다'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기드온은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יְהוָה שָׁלוֹם), 곧 '여호와는 평화'라고 이름 붙인다. 하나님이 하신 첫마디를 받아서 지은 이름이다. 그러니 이 제단의 뜻은 이것이다. 여호와는 나를 죽이러 오신 분이 아니라 나에게 평화를 선언하신 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제단이 세워진 때가 언제인지를 보아야 한다. 미디안은 여전히 이스라엘 땅을 짖밟고 있었다.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삼백 명도 아직 없고, 승리도 없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는 평화라고 이름 붙였다. 김지찬 교수의 표현대로 사사기가 '엔 샬롬', 곧 샬롬 없는 시대의 기록이라면, 그 한복판에서 한 사람이 여호와가 샬롬이심을 고백하는 제단을 세운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놓치면 안 된다. 이 제단을 쌓은 뒤에도 기드온은 계속 흔들린다. 그는 양털을 놓고 두 번이나 표징을 구하고(6:36–40), 삼백 명이 세워진 뒤에도 두려워서 밤에 적진으로 내려가 남의 꿈 이야기를 엿듣는다(7:9–14). 그러니까 여호와 살롬 제단은 기드온이 그날부터 평안한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흔들릴 사람이 흔들릴 때마다 돌아갈 이름 하나를 얻었다는 표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계속 흔들리는 기드온을 끝까지 쓰셨다.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해 주셨던 것이다.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본문을 주해하고 묵상을 한다. 이것이 그냥 나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나에게 항상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그래 기도온의 환경에서 미디안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기드온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는 여호와 살롬이라는 이름의 제단을 세웠다. 그렇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먼저 미디안을 없애 주지 않으셨다. 기드온의 질문에 모든 설명을 주시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평안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기드온은 그 말씀 위에 제단을 쌓았다. 그렇다고 그 제단 이후에 기드온이 흔들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는 계속 표징을 구했고 계속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도 오늘 억지로 괜찮다고 말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려 한다. 다만 답이 없는 이 자리에서도 돌아갈 제단 하나는 쌓아 두려 한다. 내 상황이 먼저 평안해져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아직 그대로인 오늘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나는 아직 답 없는 양털 앞에 앉아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를 나의 샬롬이라 부르며, 앞으로 또 흔들릴 때마다 이 이름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標題:耶和華沙龍
昨天的經文中,一位無名的先知說「你們竟沒有聽從我的話」之後就消失了。他只留下了責備,沒有留下拯救的應許。然而,就在下一節,也就是今天經文的第11節,耶和華的使者向基甸顯現了。昨天提到的那兩個層次,在這裡交會了。先知的話語中沒有救恩,但故事本身有。今天的經文正是呼召基甸的場景,根據宋炳鉉教授的結構分析,基甸故事的核心是兩座祭壇的故事。第一座是今天經文中基甸所築的「耶和華沙龍」祭壇,第二座則是明天經文中基甸必須拆毀的、他父親的巴力祭壇。
士6:11 耶和華的使者到了俄弗拉,坐在亞比以謝族人約阿施的橡樹下。約阿施的兒子基甸正在酒醡那裡打麥子,為要防備米甸人。
這是讀者第一次見到基甸的場景。打麥子需要一個通風良好的寬闊打穀場。要用連枷擊打,把麥稈和麥粒分開,再用風把糠皮吹散篩去。然而基甸卻在酒醡裡做這件事。當時大多數的酒醡都是在岩石上鑿出的狹窄凹坑。基甸為了不被米甸人發現,躲進裡面偷偷地打麥子。昨天經文第2節提到以色列人躲藏在山洞、山穴和保障中,基甸也是這些躲藏的百姓中的一員。士師記中篇幅最長、描述最詳盡的士師故事,也是全書結構轉折點的故事,就這樣開始了。躲藏著,恐懼著……
士6:12 耶和華的使者向基甸顯現,對他說:「大能的勇士啊,耶和華與你同在!」
這一幕正是本文所帶出的幽默感,也是神看見我們所看不見之事的視角。正因如此,祂對著一個躲藏著打麥子的人,稱他為「大能的勇士」。這位躲在酒醡裡偷偷打穀的人,和這個稱呼之間,顯然存在著明顯的張力。然而,這個張力在緊接著的話語中得到了化解。「耶和華與你同在。」是的,神看我們,看的不是我們現在的處境。神是否與我們同在,才是我們的稱呼被改變的關鍵所在。因此,這一句話正是今天經文的鑰匙。因為基甸所有的反駁,都源於不相信這句話,而神所有的回答,也都回到這句話上。
士6:13 基甸說:「主啊,耶和華若與我們同在,我們為何遭遇這一切事呢?我們的列祖不是向我們述說,耶和華領他們從埃及上來的一切奇妙作為嗎?現在他卻丟棄我們,將我們交在米甸人手裡。」
基甸的第一句話不是感恩,而是抗辯。而這抗辯的邏輯十分清楚。若與我們同在,為何會發生這樣的事?列祖所說的那些奇事在哪裡呢?耶和華已經丟棄了我們。這裡有兩點值得留意。第一,基甸知道出埃及的事。但他卻說「我們的列祖向我們述說」。對他而言,出埃及與其說是親身經歷過的救贖記憶,不如說是從祖先那裡口耳相傳下來的信仰傳統。第二,基甸所說的話,從事實本身來看並沒有錯。因為6章1節明明說「耶和華將他們交在米甸人手中七年」。神確實將他們交出去了,這是事實。只是基甸沒有看見神為何要將他們交出去。基甸質疑的是神的缺席,而先知質疑的是以色列的悖逆。基甸只看見了一半的真相。
士6:14 耶和華觀看基甸,說:「你靠著你這能力去從米甸人手裡拯救以色列人,不是我差遣你去的嗎?」
神並沒有在此重新解釋基甸的疑問。因為為何會發生這樣的事,答案早已在昨天藉著先知說明過了。現在,神不是給出解釋,而是賜下使命。去吧。而這句話的結尾又是一個問句:「不是我差遣你去的嗎?」基甸說「耶和華丟棄了我們」,神卻說「是我差遣你」。對一個訴說被丟棄的人,神以差遣來回應。於是基甸又退縮了。他說我家在瑪拿西支派中極其貧寒,我在我父家是至微小的(第15節)。這聽起來像是謙卑的自我認知,但同時,基甸仍然是以自己資源和能力的大小,來衡量神的呼召。然而神的回答依然一樣:「我必與你同在」(第16節)。基甸說自己微小,神並沒有說要使基甸變得強大。神只是說,我必與你同在。
儘管如此,基甸仍不確信,於是求問神蹟(第17節)。而神的回應令人驚訝。祂沒有拒絕,反而等候。「我必等你回來」(第18節)。當基甸去預備一隻山羊羔,並用一伊法麵粉做無酵餅時,神就坐在橡樹下等候。隨後,耶和華的使者用手中的杖頭觸碰肉和無酵餅,火就從磐石中出來,將它們燒盡了(第21節)。
士6:22-24 基甸見他是耶和華的使者,就說:「哀哉!主耶和華啊,我不好了,因為我覿面看見耶和華的使者了。」23耶和華對他說:「你放心,不要懼怕,你必不至死。」24於是基甸在那裡為耶和華築了一座壇,起名叫耶和華沙龍,〔就是耶和華賜平安的意思〕直到如今這壇還在亞比以謝族人的俄弗拉。
火焰燃起的那一刻,基甸才終於明白眼前這位是誰。然而他最初的反應不是喜悅,而是恐懼。因為他相信見到神就會死(出埃及記33:20)。方才還在向神爭辯、提出條件的人,此刻卻懼怕死亡。於是神用三句話說話。「你放心。」希伯來文是「沙龍 雷卡」,意思是「平安歸於你」。「不要懼怕。」「你必不至死。」於是基甸就在那裡築了一座壇,起名叫「耶和華沙龍」(יְהוָה שָׁלוֹם),意即「耶和華是平安」。這是承接神所說的第一句話而起的名字。因此,這座壇的意義就是:耶和華不是來殺我的那一位,而是向我宣告平安的那一位。
然而,我們必須留意這座祭壇是在何時建立的。米甸人此時仍在踐踏以色列的土地。戰爭尚未開始,三百人尚未召集,勝利也還未到來。什麼都還沒有改變。然而基甸卻在那個地方築了一座壇,將耶和華稱為平安。正如金志燦教授所言,如果士師記記載的是「恩沙龍」,也就是沒有平安的時代,那麼在那時代的正中央,有一個人築起了一座祭壇,見證耶和華就是平安。
只是有一點不能忽略。築了這座壇之後,基甸仍然繼續動搖。他兩次用羊毛求問神蹟(6:36-40);即便三百人已經選出,他仍因懼怕,在夜裡下到敵營偷聽別人的夢(7:9-14)。所以說,耶和華沙龍這座祭壇,並不是表示基甸從那天起就成了一個平安無懼的人。它所表示的,是一個往後仍會動搖的人,每當他動搖時,都有一個可以回去的名字。而神就這樣持續使用這個不斷動搖的基甸,直到最後。神就是這樣與基甸同在的。
我每天清晨起來,注解經文、默想經文。這對我來說,常常感覺不過是我的日常工作而已。然而,神卻常常藉著這段經文,對我說出安慰的話語。是的,在基甸所處的環境中,米甸人尚未退去。戰爭還沒開始,將來會發生什麼事,基甸也不知道。然而就在那個地方,他築起了一座名為耶和華沙龍的祭壇。是的,在今天的經文中,神並沒有先除去米甸人才對待基甸。神也沒有為基甸的疑問給出全部的解釋。祂只是說,我必與你同在,你要平安,不要懼怕。而基甸就在這句話之上,築起了一座壇。但這並不代表在那座壇之後,基甸就不再動搖了。他仍然繼續求問神蹟,繼續懼怕。所以,今天我也不想勉強說一切都沒事。尚未解決的事,我仍要帶著它未解決的樣子,來到神的面前。只是,即使在這個沒有答案的地方,我也願意築起一座可以回去的祭壇。並不是我的處境要先變得平安,我才能信靠神;而是即使今天處境依然如故,耶和華依然與我同在。所以今天,即使我仍坐在那尚未有答案的羊毛前,我仍願意在那個地方築起一座壇,稱耶和華為我的平安;願我在往後每一次動搖時,都能回到這個名字裡,願今天成為這樣的一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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