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1:22–36
今日默想:士師記1:22–36
결심한 가나안 족속
어제까지 우리가 묵상한 본문은 유다 단락이라고 불리는 부분이다. 유다의 승리로 시작해서 베냐민의 실패로 끝나는 스물한 절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짜임을 그대로 한 번 더 반복한다. 즉 요셉의 승리로 시작해서 단의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이 두 지파, 베냐민과 단이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무대 한복판에 서게 된다. 단은 기업을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우상을 세우고, 베냐민은 동족의 칼에 육백 명만 남는다. 그러니까 저자는 사사기 1장에서 이미 사사기의 결말의 씨앗을 심어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사사기가 처음과 끝을 짝지어 놓는 방식이다.
본문을 보면 먼저 요셉 가문이 벧엘로 올라간다.
삿 1: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이 문장을 놓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19절) 하나님이 요셉과도 똑같이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즉 남쪽 지파든 북쪽 지파든 하나님의 함께하심에는 차별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제 본 유다 단락이 승리로 시작했다가 철 병거 앞에서 멈추고 베냐민의 실패로 끝났던 것처럼, 오늘 요셉 단락도 승리로 시작해서 똑같은 길을 간다. 아니, 더 깊이 내려간다. 하나님은 두 지파 모두와 함께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남쪽도 북쪽도 다 실패한 것이다.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저자는 벧엘 정복 장면에서 보여준다. 정탐꾼을 보내고, 성읍에서 나오는 사람을 붙들어 약속을 하고, 성을 친 뒤 그 사람과 가족을 살려 보낸다. 어디서 본 이야기다. 여호수아 2장, 여리고의 라합이다. 게다가 "선대하리라"로 옮긴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썼던 바로 그 단어다. 저자가 일부러 라합 이야기를 떠올리게 쓴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르다. 라합은 먼저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했고, 그 고백 뒤에 언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벧엘의 이 사람은 아무 고백이 없다. 요셉 자손이 먼저 다가가 입구만 알려 주면 잘해 주겠다고 제안했을 뿐이다. 신앙의 언약이 아니라 정보 거래였다. 하나님이 이미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결과도 다르다. 라합은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 사람은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벧엘의 옛 이름 루스라고 붙였다. 요셉은 벧엘을 얻었지만 루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나안이 다른 곳에 고스란히 복제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여섯 지파의 목록이 이어진다.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순서 그대로다. 그런데 이 목록의 첫 문장을 잘 보아야 한다.
삿 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여기 '결심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알(יָאַל)은 '기꺼이 하다, 마음을 굳히다, 뜻을 정하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는 두 주체가 있는데, 쫓아내야 할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동사가 없고, 쫓겨나야 할 가나안 족속에게는 '결심하다'라는 동사가 붙어 있다. 나가야 할 쪽은 결심했고, 내보내야 할 쪽은 결심이 없었다. 본문의 대조가 보이는가? 그렇다.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에게는 결심이 없었을까. 바로 다음 절이 그 이유를 슬쩍 흘려 놓는다.
삿 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이 절은 두 시기를 나누고 있다. 강성하기 전과 강성한 후다. 강성하기 전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따로 말하지 않는다. 아마 이스라엘 스스로는 아직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하나님은 22절에서 분명히 요셉과 함께하셨고, 여호수아는 이미 이 요셉 자손에게 철 병거를 가진 자들이라도 능히 쫓아낼 수 있다고 말해 두었다(수 17:18).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강성한 뒤의 행동이 증명한다. 힘이 생겨서 쫓아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한 일은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노역을 시키는 것이었다. 즉 약할 때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안 했고, 강할 때는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안 했다. 이유는 바뀌었는데 결과는 같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결심이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 대신 자기 계산을 따르겠다는 결심이다. 스불론도, 납달리도 똑같이 '노역을 하였더라'로 끝난다. 그리고 납달리가 남겨 둔 벧세메스는 '태양신의 집'이고, 벧아낫은 '아낫 여신의 집'이다. 가나안 종교의 본거지를 노동력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다.
그런데 이 '결심하다'라는 동사가 본문에 한 번 더 나온다.
삿 1:34–35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여기서 1장 전체가 뒤집힌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이야기였는데, 단에 와서는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을 쫓아낸다.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것이다. 유다는 철 병거 때문에 골짜기를 못 얻었는데, 단은 골짜기는커녕 산지로 밀려 올라가 갇혔다. 그리고 아모리 족속은 또 '결심하고' 거주한다. 결심한 쪽이 땅을 차지하고, 결심하지 않은 쪽이 밀려난다. 이것이 사사기가 보여주는 냉정한 현실이다.
그래서 1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삿 1: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로 시작한 장이 아모리 족속의 국경선을 표시하며 끝난다. 하나님이 주신 땅 안에 남의 나라 경계가 그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단 지파가 18장에서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통째로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미가의 신상을 세운다. 사사기 마지막의 그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의 결과가 사사기의 마지막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22절에서 분명히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기록한다. 유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유다도 요셉도, 결심이 없는 백성에게는 그 함께하심이 온전한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함께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 안에서 결심하고 올라가는 것은 백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사기 기자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결심을 가나안 족속들이 함으로써 전혀 다른 결과를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결심하고'라는 단어가 나에게 질문하고 있다. 나는 받은 사명을 위해서 어떤 결심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오히려 오래된 습관, 익숙해진 타협,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허락해 둔 것들은 모두 결심하고 그 자리에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내보내야 할 나에게는 결심이 없다. 물론 나도 늘 뭔가를 결심한다. 그러나 솔직히 돌아보면 그 결심은 대부분 "나중에", "형편이 되면", "지금은 이대로도 괜찮으니까"라는 결심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강성해진 뒤에도 쫓아내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할 수 있게 된 뒤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나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내가 바른 결심을 하길 기도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하자. 언제나 하나님은 나에게 신실하셨고, 은혜를 주셨다. 그래서 이젠 내가 결심할 차례이다. 오늘은 타협하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그 한 걸음을 내딛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下定決心的迦南人
我們從昨天默想到今天的經文,屬於一般所稱的「猶大段落」。這段經文以猶大的勝利開始,卻以便雅憫的失敗告終,共二十一節。而今天的經文,再一次重複了同樣的結構。也就是說,這段以約瑟的勝利開始,卻以但支派的失敗結束。而這兩個支派——便雅憫和但——會在士師記最後的部分再度成為舞台的焦點。但支派放棄自己的產業,遷往北方去立起偶像;便雅憫則因同族的刀劍幾乎滅絕,只剩六百人。也就是說,作者早在士師記第一章,就已經埋下了士師記結局的種子。這也是士師記慣用的一種寫作方式——把開頭與結尾相互呼應。
看看經文,首先約瑟家上到伯特利。
士1:22 約瑟家也上去攻打伯特利,耶和華與他們同在。
這句話絕不能輕易略過。因為正如神與猶大同在一樣(19節),神同樣也與約瑟同在。也就是說,無論是南方支派還是北方支派,神的同在並沒有分別待遇。但問題出在接下來的發展。就像昨天我們看到的猶大段落,以勝利開始,卻在鐵車面前止步,最終以便雅憫的失敗收場;今天的約瑟段落,也是以勝利開始,卻走上同樣的路。不,甚至更深陷其中。神與這兩個支派都同在,但以色列無論南方或北方,最終都失敗了。
作者透過攻取伯特利的場景,向我們展示這失敗究竟從何處開始。他們派出探子,抓住從城裡出來的人,與他立約,攻下城池後放走那人及其全家。這故事我們似曾相識——約書亞記第二章,耶利哥的喇合。而且,經文中譯為「恩待」的希伯來文「חֶסֶד」(黑塞德),正是當年探子們對喇合所用的同一個詞。作者顯然是刻意讓讀者聯想到喇合的故事。然而,關鍵的不同之處在於:喇合先開口宣認「耶和華你們的神本是上天下地的神」,這宣認之後,才立下了約定。但伯特利的這個人,卻沒有任何信仰上的宣認。只是約瑟的子孫先主動接近,提議只要告訴他們城的入口,就會善待他。這不是信仰的立約,而是情報的交易。何況神早已吩咐不可與這地的居民立約。因此,結果也截然不同。喇合進入了以色列當中,名字被記在耶穌的家譜裡;而這個人卻去到赫人之地,建了一座城,起名叫路斯——正是伯特利的舊名。約瑟得了伯特利,但「路斯」並沒有消失。迦南,在別處原封不動地被複製了出來。
接下來,經文列出六個支派:瑪拿西、以法蓮、西布倫、亞設、拿弗他利、但。順序正是從南到北。而這份名單的第一句話,需要我們特別留意。
士1:27 瑪拿西沒有趕出伯‧善和屬伯‧善鄉村的居民,他納和屬他納鄉村的居民,多珥和屬多珥鄉村的居民,以伯蓮和屬以伯蓮鄉村的居民,米吉多和屬米吉多鄉村的居民;迦南人卻決意住在那地。
「迦南人卻決意住在那地」——這裡譯為「決意」的希伯來文「יָאַל」(雅阿爾),意思是「甘願去做、下定決心、立定心意」。也就是說,這句話裡有兩個主體:本該把人趕出去的以色列,句中卻沒有任何動詞;而本該被趕出去的迦南人,卻被冠上了「決意」這個動詞。該離開的那一方,下定了決心;該把人趕走的那一方,卻毫無決心。看見這段經文裡的對照了嗎?沒錯,這正是今天經文的核心。
那麼,為何以色列沒有那樣的決心呢?緊接著的下一節,悄悄地透露了原因。
士1:28 及至以色列強盛了,就使迦南人做苦工,並沒有把他們全然趕出。
這節經文劃分出兩個時期:強盛之前,與強盛之後。強盛之前,以色列無法把迦南人趕出去。經文並沒有特別說明原因,也許以色列自己以為,是因為當時還沒有足夠的力量。但事實真是如此嗎?神在22節明明清楚與約瑟同在,約書亞也早已對約瑟的子孫說過,即便對方擁有鐵車,也一定能夠把他們趕出去(書17:18)。所以不是沒有力量,而是沒有倚靠神。而這一點,也在他們強盛之後的行動中得到了印證:等到有能力可以趕出他們的時候,以色列所做的卻不是趕出,而是叫他們做苦工。也就是說,軟弱時,以「沒有力量」為藉口不去做;強盛時,又以「有利可圖」為理由不去做。理由變了,結果卻一樣。由此可見,這從一開始就不是力量的問題。並非沒有決心,而其實是另有所決心——一種寧願跟隨自己的算計、而非神的命令的決心。西布倫、拿弗他利也同樣以「使他們做苦工」作結。而拿弗他利所留下的伯示麥,意思是「太陽神之家」;伯亞納,意思是「亞納女神之家」。迦南宗教的大本營,就這樣因為勞動力的緣故被保留了下來。
而這個「決意」的動詞,經文中再度出現了一次。
士1:34–35 亞摩利人強逼但人住在山地,不容他們下到平原;34 亞摩利人卻決意住在希烈山和亞雅崙並沙賓,然而約瑟家勝了他們,就使他們做苦工。
在這裡,整章經文的形勢徹底翻轉。到目前為止,是以色列「無法趕出」迦南人的故事;但到了但支派這裡,卻變成迦南人把以色列趕了出去。主詞和受詞對調了。猶大因鐵車而無法得著平原,但支派卻連平原都談不上,反而被逼退到山地、困守其中。而亞摩利人,又一次「決意」住下。決心堅定的一方佔有土地,沒有決心的一方則被驅逐——這就是士師記所呈現的冷酷現實。
因此,第一章的最後一句是這樣的:
士1:36 亞摩利人的境界,是從亞克拉濱坡而上,從西拉延伸而上之地。
這一章,本是以「我已將這地交在他手中」開頭,如今卻以標示亞摩利人的邊界作結。在神所賞賜的地上,竟劃出了外邦人國度的界線。而正是這個但支派,會在第十八章徹底拋棄神所賜的產業,遷往北方,立起米迦的神像。士師記最後所描繪的那種墮落,正是從這裡開始的。也就是說,神的子民未能全心倚靠神,未能完成神所託付的使命,其結果,正是士師記最終所呈現的那幅景象。
是的,神在22節清楚記載祂與約瑟同在,就如同祂與猶大同在一樣。然而,無論是猶大還是約瑟,對沒有決心的百姓而言,神的同在並未能帶來完全的勝利。同在,是神的恩典;但在那恩典之中定意起身前行,卻是百姓自己該負的責任。然而士師記的作者向我們展現的是:神的百姓本該做出的那個決心,卻由迦南人替他們做了,因而導致了截然不同的結果。
於是今天清晨,在默想這段經文的過程中,「決意」這個詞不斷地向我發問:為了我所領受的使命,我究竟下了怎樣的決心?相反地,那些陳舊的習慣、早已習以為常的妥協、那些我自己允許「這種程度應該沒關係」的事物,卻都早已決意,安然住在那裡了。而真正該把它們趕出去的我,卻毫無決心。當然,我也常常在下決心。但誠實地反省,我大部分的決心,不過是「以後再說」、「等有餘力再說」、「反正現在這樣也還好」之類的決心。然而,正如以色列在強盛之後仍未趕出迦南人一樣,我在有能力去做之後,依然沒有去做。這就是我如今的樣子。因此,今天我禱告,願我能下一個正確的決心。願我倚靠神,立定不動搖的決心。神一直以來對我都是信實的,也一直賜下恩典。所以,如今輪到我下定決心了。願今天成為不妥協、不偏左右,堅定邁出那一步的一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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