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목록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시편 10:1–18

    今日默想:詩篇 10:1–18

    Kyoung Woo Han··조회 56

    제목 : 여호와께서 왕이시다

    어제도 이야기했듯이 시편 10편은 시편 9편과 함께 보아야 한다. 두 편을 이어 놓고 읽으면 히브리어 알파벳을 첫 글자부터 순서대로 따라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시편 9편이 알렙(א)에서 시작해 중간까지 가고, 10편이 그 뒤를 이어 마지막 글자 타우(ת)까지 마무리한다. 알렙부터 타우까지, 곧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노래하는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알파벳의 질서가 시편 10편에 오면 흔들린다. 시편 9편은 정연하게 진행되다가, 10편에서는 몇 글자가 빠지고 순서가 무너진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것을 우연한 손상이 아니라 의도된 장치로 본다. 왜냐하면 시편 10편이 노래하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악인이 판을 치고 하나님은 숨어 계신 듯한 세상, 질서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 그래서 시는 그 무너진 현실을 무너진 형식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가 흐트러졌는데 시의 형식만 반듯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자, 고아, 압제 당하는 자와 같이 힘없이 짓밟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고대 근동에서 왕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가 바로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시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신세 한탄이 아니다. "왕이신 하나님, 왕이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언약에 근거한 요청이 된다. 그래서 시는 탄식의 질문으로 문을 연다.

    시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계시는데 응답하지 않으시는 듯한 침묵, 그 침묵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런 상황을 보통 '얼굴을 가리신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어디로 사라지신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침묵하시는 것이 마치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눈이 악인에게로 향한다(2–11절). 악인은 교만하다. 탐욕스럽다. 약한 자를, 사자가 굴에 엎드려 먹이를 노리듯 은밀하게 사냥한다. 그런데 그 악인의 마음 한복판에 이 시의 신학적 심장이 있다.

    시 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철학적 무신론으로 읽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한다. 즉 악인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론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셔도 나를 보지 못하시고, 나를 심판하지 못하신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삶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지워 버린 자들이다. 이런 것을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이라 부른다. 성경이 말하는 불신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11절도, 13절에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나님이 잊으셨다", "감찰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래서 여기서 시인은 부르짖는다.

    시 10: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인은 숨어 계신 듯한 하나님을 향해, 이제 일어나 손을 드시고 왕의 직무를 행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바로 그 간구 속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시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악인은 '주께서 보지 아니하신다'(11절)고 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말을 정확히 뒤집는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이 한마디가 앞의 모든 절망을 반전시킨다. 그래.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연약한 자들을 결코 버려두시지 않는다. 왕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시는 절정에 이른다.

    시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그래 시인은 '여호와께서 왕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은 잠깐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왕의 다스림은 추상적인 권력이 아니다. 시인은 그 왕되신 여호와께서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17–18절).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약한 자를 편드는 구체적인 정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시가 그린 악인을 저 바깥의 흉악한 누군가로만 밀어내면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논증하며 바로 이 시편 10편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시편 10편의 악인이, 바울에게는 '모든 사람'의 자화상이 된다. 하나님 없이 사는 그 악인은 저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지운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우리 주변에는 입술로는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일이면 손을 들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 눈물도 흘린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 삶의 방식이 '하나님이 나를 보지 못하신다'고 여기는 사람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실천적 무신론이다. 안다. 나부터 그렇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면서, 정작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자주 잊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 10편은 분명히 말한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보고 계시고, 여전히 왕이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분명하다. 실천적 무신론이 아니라 실천적 유신론이다.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의식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한다. '코람데오'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되길...

    中文 AI翻譯

    題目:耶和華是王

    正如昨天所談,詩篇第10篇必須與第9篇一同閱讀。將兩篇連貫起來,便能看出其結構依循希伯來字母順序排列。詩篇第9篇從第一個字母「aleph(א)」開始,延伸至中段;第10篇則緊接其後,一路走到最後一個字母「tav(ת)」。從aleph到tav,也就是從始至終,可說是一首歌頌神的完整詩歌。

    然而有趣的是,這個字母的秩序到了詩篇第10篇開始動搖。詩篇第9篇規整地推進,到了第10篇,卻有幾個字母缺失,順序也隨之崩解。部分神學家認為,這並非偶然的損毀,而是刻意為之的設計——因為詩篇第10篇所描繪的世界,正是這樣一個世界:惡人橫行、神彷彿隱身,秩序似乎已然崩潰。因此,這首詩以崩解的形式呈現那崩解的現實。既然世界的秩序已然紊亂,詩的形式又怎能獨自端整如故。

    然而,在這首詩中,有幾類人物反覆出現:貧窮人、孤兒、受壓迫者——那些無力者、被踐踏者。據說在古代近東,王最重要的職責之一,正是「保護孤兒與寡婦」。因此,這首詩的呼求絕非單純的哀嘆自憐,而是在說:「身為王的神啊,求祢行王所當行之事。」正因如此,這乃是一個立基於聖約的祈求。所以,這首詩以哀嘆的問句開門。

    詩 10:1 耶和華啊,你為何站在遠處?在患難的時候,為何隱藏?

    詩人在此並非說神不存在。他所wrestle的,是神明明在卻似乎不回應的那份沉默。在舊約中,這樣的處境通常以「掩面」來表達——不是神消失了,而是此刻的沉默,讓人感覺彷彿祂並不在看顧我們。

    接著,詩人的目光轉向惡人(第2–11節)。惡人傲慢,貪婪,像獅子伏在洞中窺伺獵物般,暗中獵取軟弱者。而在那惡人心中,藏著這首詩神學意涵的核心。

    詩 10:4 惡人面露驕傲,說:「耶和華必不追究。」他一切所謀的,都以為沒有神。

    神學家指出,「沒有神」不應被理解為哲學意義上的無神論。換言之,惡人並非在理論上主張「神不存在」,而是以「即便神存在,也看不見我、不能審判我」的心態生活。這樣的人,嘴唇上從不否認神,卻以生命的方式將神抹去。這稱為「實踐性無神論(practical atheism)」。聖經所說的不信,正是如此。因此詩人在第11節、第13節再次重複同樣的話:「神忘記了」、「必不追究」。

    於是,詩人在此發出呼喊:

    詩 10:12 耶和華啊,求你起來!神啊,求你舉手!不要忘記困苦人。

    詩人向那彷彿隱藏的神呼求,請祂起身舉手,履行王的職責。而就在這呼求之中,轉折發生了。

    詩 10:14 你確實看見了;因為你察看勞苦和悲痛,要用你的手報應。困苦人把自己交託你;你是幫助孤兒的。

    惡人說「祢必不看見」(第11節),但詩人將這句話徹底翻轉:「你確實看見了」——這一句話,逆轉了前面所有的絕望。是的,神看見了。祂絕不遺棄軟弱者。祂正在盡行王的職分。

    然後,這首詩走向高潮:

    詩 10:16 耶和華是永遠長存為王!外邦人從他的地上滅沒了。

    是的,詩人宣告:「耶和華是王。」詩人說,惡人的亨通不過片刻,而神的統治卻是永恆的。然而這位王的掌權,並非抽象的權力。詩人以這樣的宣告作結:那位為王的耶和華,要為孤兒和受壓迫者伸冤,使地上的人不再施加威嚇(第17–18節)。身為王的神的統治,始終以具體的公義顯現——永遠站在軟弱者那一邊。

    然而,在這裡有一件事我們必須謹慎:不可將這首詩所描繪的惡人,推到外面某個凶惡之人身上了事。因為保羅在羅馬書中,論證所有人的罪時,正是引用了詩篇第10篇。

    羅 3:14 他們滿口是咒罵苦毒。

    詩篇第10篇的惡人,在保羅筆下成了「所有人」的自畫像。那個活在沒有神中的惡人,並非遠在天邊的某人,而可能正是我們自己——那個將神抹去、繼續生活的我們。

    是的,我們身邊有許多人,嘴唇上分明讚美著神。主日裡舉手敬拜,禱告時也流下眼淚。然而,走出禮拜堂的那一刻,生命的方式有時與那些以為「神看不見我」的人並無多大差異。這正是實踐性無神論。我明白,我自己首先如此。在講台上宣告神的王權,卻在無人注意的角落,時常忘記神正在看顧。然而,詩篇第10篇清楚地說:「你確實看見了。」神至今仍在看顧,仍然是王。既然如此,我們當活的生命便清晰可見——不是實踐性無神論,而是實踐性有神論:意識到神正在看顧,在無人注目之處,也以生命來敬拜神。所以,今日仍要禱告:願我們成為一個「Coram Deo」——活在神面前的群體……

    댓글 / 留言 (0)

    로딩 중...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 留言需要先登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