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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사사기 12:1–15

    今日默想:士師記 12:1–15

    한경우··조회 66

    제목 :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어제 우리는 입다가 자기 서원 때문에 외동딸을 잃는 장면을 보았다. 암몬을 이긴 승리의 날이 입다에게는 가장 큰 상실의 날이 되었다. 그런데 입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적이 밖에서 오지 않는다. 형제 지파 에브라임이 요단을 건너온다.

    삿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어디서 들어 본 말이다. 에브라임은 기드온에게도 똑같이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고 따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마디가 더 붙었다.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암몬을 물리친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자기들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것을 문제 삼는다. 이스라엘의 승리보다 에브라임의 체면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자 입다가 대답한다.

    삿 12:2–3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입다는 불렀는데 오지 않은 것은 너희였다고 말한다. 11장에는 입다가 에브라임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어서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입다는 이번에도 승리를 여호와께 돌린다. 그런데 기드온 때와 비교해 보라. 기드온은 같은 항의 앞에서 에브라임을 높여 주었고, 그러자 '그들의 노여움이 풀렸다.' 입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입다의 말은 노여움을 풀지 못했다. 암몬 왕에게는 그토록 길고 정교하게 말하던 입다가, 형제 앞에서는 그만한 인내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들을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들'이라고 깎아내렸다. 결국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과 싸운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삿 12:5–6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는 전술은 처음이 아니다. 에훗은 모압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루턱을 막았고, 기드온 때에는 바로 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루턱을 막아 미디안을 쳤다.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적을 막던 나루였다. 그런데 이제 그 나루가 형제를 가려 죽이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형제를 가려낸 방법이 '쉽볼렛'이다. 이 말은 '시내'나 '이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뜻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리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 말을 길르앗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발음했다. 정확히 어떤 소리였는지는 지금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조상 요셉에게서 나온 형제인데 억양 하나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국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었다. 본문은 그렇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이 사만 이천 명이었다고 기록한다. 이스라엘이 암몬과 싸운 이야기는 두 절로 끝났는데, 형제끼리 죽인 이야기는 이렇게 자세하다.

    삿 12: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입다는 여섯 해를 사사로 있다가 죽었다. 큰 사사들 가운데 가장 짧다. 그리고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는 말도 없다. 입다는 밖의 적은 이겼지만, 이스라엘 안에 평화를 남기지 못했다.

    그 뒤에 본문은 세 명의 사사를 짧게 소개한다. 베들레헴의 입산은 아들 서른과 딸 서른을 두었는데, 딸들은 씨족 밖으로 시집보내고 아들들을 위해서는 밖에서 며느리를 데려왔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서로 다른 집안을 넓게 이어 공동체를 묶으려 한 노력으로 본다. 형제를 억양으로 가려 죽인 이야기 바로 뒤에, 서로 다른 가문을 혼인으로 잇는 사사가 나오는 것이다. 스불론의 엘론은 십 년, 에브라임 땅 비라돈의 압돈은 팔 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렇다. 사만 이천 명을 잃은 에브라임에서도 다시 사사가 나왔다. 에브라임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 세 사람의 시대에도 '그 땅이 평온하였다'는 말은 다시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이 쉽볼렛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에브라임은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은 것을 참지 못했고, 길르앗은 모욕을 참지 못했다. 서운함과 자존심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작은 차이가 칼이 되었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큰 교리 때문만이 아니다. 억양, 출신, 습관 같은 작은 차이를 '다름'이 아니라 '너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표지로 삼는 순간 분열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한다.

    엡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됨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셨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고, 그 방법은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는 것이다.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품을 때, 더 큰 하나됨이 나타난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나를 돌아본다. 이 땅에서 나는 늘 억양으로 먼저 알려지는 사람이다. 내가 입을 열면 사람들은 내가 이 땅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안다. 그런데도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받아 주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서 나는 작은 차이로 사람을 먼저 나누어 볼 때가 있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교회 배경을 가졌는지, 어느 세대인지, 말투가 어떤지를 보고 마음속에 '우리'와 '그들'의 선을 긋는다. 입 밖으로 쉽볼렛을 외치지는 않았어도, 마음속 나루턱에서 이미 사람을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이 떠오른다. 한국과 대만, 한국어와 중국어, 여러 세대와 여러 삶의 자리에서 모인 지체들이다. 서로 다른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다름 때문에 우리는 더 큰 교회가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른 억양을 가려내는 자가 아니라, 다른 억양을 반기는 자로 공동체를 섬기며 살아간다. 주님,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이 공동체를 오늘도 서로 용납함으로 지켜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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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標題:發音「示播列」

    昨天我們看到耶弗他因自己的誓言而失去獨生女兒的場景。戰勝亞捫的得勝之日,對耶弗他而言卻成了最大的喪失之日。然而,耶弗他的故事並未就此結束。這一次,敵人不是從外面來的。而是弟兄支派以法蓮渡過約旦河而來。

    士12:1 以法蓮人聚集,到了北方,對耶弗他說:「你去與亞捫人爭戰,為甚麼沒有招我們同去呢?我們必用火燒你和你的房屋。」

    這句話似曾相識。以法蓮人也曾對基甸提出同樣的質問:「你為甚麼沒有招我們去呢?」但這一次多了一句話——「我們必用火燒你和你的房屋。」他們不是為戰勝亞捫而一同歡喜,反倒是計較自己的名字沒有在其中被提起。對以法蓮而言,自己的顏面比以色列的勝利更重要。於是耶弗他回答道:

    士12:2–3 耶弗他對他們說:「我和我的民與亞捫人大大爭戰的時候,我招你們來,你們竟沒有來救我脫離他們的手。3 我見你們不來救我,我就拚命前去攻擊亞捫人,耶和華將他們交在我手中。你們今日為何上我這裡來攻打我呢?」

    耶弗他說,是他呼召了,卻是你們沒有來。第11章並沒有記載耶弗他曾呼召以法蓮的事,因此這番話是否屬實,我們無從得知。只是耶弗他這一次仍將勝利歸給耶和華。然而,請與基甸的情形相比較。基甸面對同樣的抗議時,選擇高舉以法蓮,於是「他們的怒氣就消了」。耶弗他的話並沒有錯,但耶弗他的話卻未能平息怒氣。在亞捫王面前能說出那般冗長而精緻言辭的耶弗他,在弟兄面前卻沒有展現出同等的忍耐。更何況,以法蓮人還貶低基列人,稱他們為「以法蓮逃亡的人」。結果,耶弗他召集基列人與以法蓮交戰。那場戰爭的結局,出現了這樣的場景:

    士12:5–6 基列人把守約旦河的渡口,不容以法蓮人過去。以法蓮逃走的人若說:「容我過去。」基列人就問他說:「你是以法蓮人不是?」他若說:「不是。」6 就對他說:「你說『示播列』。」以法蓮人因為不能捲舌發此音,便說「西播列」,基列人就將他拿住,殺在約旦河的渡口。那時以法蓮人被殺的有四萬二千人。

    這裡是不容錯過之處。把守約旦河渡口的戰術並非首次出現。以笏曾堵住渡口,不讓摩押人逃脫;而在基甸的時代,正是這些以法蓮人堵住渡口攻打米甸人。渡口,本是為了保護以色列、攔阻敵人而存在的。然而如今,這渡口卻成了分辨並殺害弟兄的場所。

    而分辨弟兄的方法,就是「示播列」這個詞。這個字的意思是「溪流」或「麥穗」。但在這裡,字義並不重要,重要的是發音。以法蓮人把這個字發音的方式,與基列人略有不同。至於當時究竟是怎樣的聲音差異,我們如今已無從完全得知。但可以確定的是,同樣敬拜同一位神、同樣出自共同先祖約瑟的弟兄,卻因一個口音上的差異,成了區分「我們」與「他們」的標記。而那微小的差異,最終竟成了殺人的工具。經文記載,如此喪命的以法蓮人多達四萬兩千人。以色列與亞捫爭戰的故事只用了兩節經文,而弟兄相殘的故事卻如此詳盡地被記錄下來。

    士12:7 耶弗他作以色列的士師六年。基列人耶弗他死了,葬在基列的一座城裡。

    耶弗他作士師六年後去世,是眾大士師中任期最短的一位。經文也沒有記載「那地便得平安」這句話。耶弗他雖然戰勝了外敵,卻沒有在以色列內部留下和平。

    其後,經文簡短地介紹了三位士師。伯利恆的以比讚有三十個兒子、三十個女兒,女兒都嫁到宗族之外,兒子們則從外面娶了媳婦。有人認為,這是一種努力,藉著廣泛聯結不同家族,來凝聚整個群體。就在弟兄因口音之差而相互殘殺的故事之後,緊接著出現了一位藉由婚姻聯結不同家族的士師。西布倫的以倫作士師十年,以法蓮地比拉頓人押頓作士師八年。是的,即便在損失了四萬兩千人的以法蓮之中,仍然興起了士師。以法蓮並沒有消失。然而,在這三人任內,我們依然再也聽不到「那地便得平安」這句話。

    那麼,這個「示播列」究竟從何開始?以法蓮無法忍受自己的名字沒有被提起,基列無法忍受被羞辱。委屈與自尊心先出現,隨後微小的差異便化為刀劍。群體的崩解,並非總是因為重大的教義分歧。當口音、出身、習慣這類微小的差異,不再被視為「不同」,而被當作「你不是我們的一分子」的標記時,分裂便由此開始。因此保羅這樣勸勉:

    弗4:2–3 凡事謙虛、溫柔、忍耐,用愛心互相寬容,3 用和平彼此聯絡,竭力保守聖靈所賜合而為一的心。

    合一並非我們自己創造出來的。聖靈早已使我們合而為一。我們要做的,是持守這份合一,而持守的方法,就是彼此包容彼此的不同。並非消除差異,而是當我們懷抱差異時,更大的合一才得以彰顯。

    今天默想這段經文,也反思自己。在這片土地上,我始終是一個先被口音認出來的人。我一開口,人們便立刻知道我不是本地人。儘管如此,這裡許多人仍然接納了我。然而,在教會裡面,我卻有時會先因微小的差異而將人分類。看一個人從哪裡來,有怎樣的教會背景,屬於哪個世代,說話的腔調如何,便在心裡劃出「我們」與「他們」的界線。雖然我沒有真的用口喊出「示播列」,但在心中的渡口,我早已在暗中篩選著人。想到這裡,我便想起我們群體中的肢體們——來自韓國與台灣、使用韓語與華語、跨越不同世代與不同人生處境而聚集在一起的肢體。彼此之間有太多的不同。然而,正因這些不同,我們才成為更大的教會。所以今天,我願不再作分辨不同口音的人,而是作歡迎不同口音的人,以此服事這個群體、活出信仰。主啊,求祢使我們今天也能藉著彼此包容,持守這個由聖靈使之合一的群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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