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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13:15–25

    今日默想:士師記 13:15–25

    한경우··조회 53

    제목 : 내 이름은 기묘자라

    어제 우리는 마노아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하고 묻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아이에 대한 새로운 말 대신, 아이를 품은 어머니가 지켜야 할 일을 다시 말해 주었다. 그런데 이 대화가 끝나자 마노아는 이 방문자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삿 13:15–16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마노아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려 한다. 옛날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서 세 손님을 대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자는 음식을 거절하고 마노아의 관심을 돌린다.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마노아의 마음은 약속을 전해 준 이 방문자에게 향해 있었다. 사자는 그 마음을 여호와께 드릴 예배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본문은 설명을 하나 덧붙인다.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아내는 처음부터 이 방문자가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노아는 아직 그를 하나님의 사람, 곧 선지자 정도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다.

    삿 13:17–18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마노아는 이름을 알고 싶어 했다.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이름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말 성경은 '내 이름은 기묘자라'고 옮겼지만, 원문은 '그것은 기이하다'에 가깝다. '기묘자'가 사자의 이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이름이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이하다는 뜻이다. 이 '기이하다'는 말은 훗날 이사야가 오실 왕을 '기묘자'라 부를 때 쓴 말과 같은 뿌리의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이름을 말해 주지 않은 그분이 곧바로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라.

    삿 13:19–20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마노아는 이제 사자의 말대로 제물을 여호와께 드린다. 그리고 '이적이 일어난지라.'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기이하게 행하셨다'는 말이다. 바로 앞에서 '내 이름은 기이하다'고 하신 분이, 곧이어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이다. 옛 번역본들 가운데는 이 구절을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께 드렸다'고 읽는 것도 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뜻은 같다.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하나님은 이름을 설명하시는 대신, 기이한 일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신지 보여 주셨다.

    마노아가 피운 제단의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고, 여호와의 사자가 그 불꽃에 휩싸여 함께 올라간다. 그제야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이 장면은 기드온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에게 예물을 준비했고, 사자가 지팡이 끝을 대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살랐으며, 사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제야 기드온도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두려워했다. 마노아도 같다.

    삿 13:21–22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마노아는 두려워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이 두려움은 엉뚱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른 반응이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기드온이 두려워했을 때는 여호와께서 직접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다르다.

    삿 13:2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아내는 차분하게 하나씩 짚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첫째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으셨을 것이다. 둘째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셋째 아들을 주시겠다는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다. 마노아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옳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와 약속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결론이 틀렸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근거로 남편의 두려움을 붙들어 준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먼저 만났고, 그 방문자가 범상치 않음을 먼저 알아보았던 이름 없는 여인이, 마지막에는 남편을 두려움에서 건져 준다.

    그리고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삿 13:24–25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아이의 이름을 지은 사람도 어머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해'라는 말과 연결된 이름으로 본다. 그리고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사기의 구원자들 가운데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기록된 사람은 삼손 한 사람뿐이다. 삼손은 기적으로 태어났고, 태에서부터 구별되었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자랐다. 사사들 가운데 누구보다 좋은 출발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여기서 '움직이다'는 조용히 머문다는 말이 아니라, 흔들어 깨우고 행동하도록 떠민다는 뜻의 드문 말이다. 그리고 '시작하셨다'는 말은 5절에서 사자가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할 때 쓴 바로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고, 이제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이다.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다. 훗날 삼손이 생을 마친 뒤 그의 시신이 묻히는 곳도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이 두 성읍 사이에서 시작해서, 같은 두 성읍 사이에서 끝난다.

    생각해 보라. 13장 내내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했고, 알지 못했고, 묻고 또 물었으며, 마지막에는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 장의 끝에서 주어는 하나님으로 넘어간다. 아이가 태어났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고, 여호와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기이한 일을 보여 주셨다. 아이의 미래를 알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복을 받은 한 아이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조용히 출발했다. 이제 우리는 이 좋은 출발이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마노아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나도 마노아처럼 말할 때가 있다. '이제 끝났구나.' 사역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 내 부족함이 드러날 때 그렇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곧장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가 버린다. 마노아처럼 나도 이미 받은 은혜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 곁에는 마노아의 아내 같은 사람이 있다. 바로 내 아내다. 내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아내는 차분하게 묻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려 하셨다면 왜 여기까지 이끄셨겠느냐고. 부족한 우리를 불러 이 땅에 보내 주셨고, 낯선 곳에서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손을 놓지 않으셨으며, 오늘도 말씀으로 약속을 주고 계시지 않느냐고. 그래 아내는 내가 잊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다시 세어 준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는 직접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노아에게는 아내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이 떠오른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이제 끝났다'는 두려움 앞에 서 있는 지체들... 그 마음을 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두려움이 올 때마다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을 먼저 센다. 그리고 아내가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두려워하는 지체 곁에서 그 은혜를 함께 세어 주며 살아간다. 약속대로 아이를 주시고 복을 주시고 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삶에서 약속하신 일을 계속하고 계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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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標題:我的名字是奇妙

    昨天我們看到瑪挪亞問道:「我們當怎樣待這孩子,他後來當怎樣呢?」而神的使者並沒有針對孩子說出新的話,而是再次重申了懷孕的母親當謹守的事。然而這段對話結束之後,瑪挪亞並不想就此讓這位訪客離去。

    士13:15–16 瑪挪亞對耶和華的使者說:「求你容我們款留你,好為你預備一隻山羊羔。」16 耶和華的使者對瑪挪亞說:「你雖然款留我,我卻不吃你的食物,你若預備燔祭就當獻與耶和華。」原來瑪挪亞不知道他是耶和華的使者。

    瑪挪亞想要款待這位貴賓,就如當年亞伯拉罕在帳棚門口款待三位客人那樣。然而使者卻拒絕了食物,並將瑪挪亞的注意力轉向別處——「你若預備燔祭,就當獻與耶和華。」瑪挪亞的心思一直放在這位傳達應許的訪客身上,而使者卻將這份心意引向對耶和華當獻的敬拜。經文還補充了一句說明:「原來瑪挪亞不知道他是耶和華的使者。」他的妻子從一開始就察覺這位訪客不同尋常,所以她說「他的相貌如神使者的相貌,甚是可畏」。但瑪挪亞此時仍只把他當作神人,也就是先知一類的人物。所以他這樣問道:

    士13:17–18 瑪挪亞對耶和華的使者說:「你名叫什麼,到你話應驗的時候,我們好尊敬你。」18 耶和華的使者對他說:「你何必問我的名,我名是奇妙的。」

    瑪挪亞想知道名字。他的意思是,等話語應驗之後,要尊崇這個名字。在那個時代,知道名字就意味著認識那位存在者。而使者又補充說——中文和合本譯作「我名是奇妙的」,但原文更接近「那是奇妙的」。「奇妙」並非指使者的名字本身,而是指這名字奇妙得超乎人所能測度。這個「奇妙」一詞與後來以賽亞稱那將要來的君王為「奇妙策士」時所用的詞,出自同一字根。人無法完全解釋神。然而,這位沒有告訴他名字的那一位,緊接著做了什麼事呢?請看:

    士13:19–20 於是瑪挪亞將山羊羔和素祭在磐石上獻與耶和華,使者行奇妙的事,瑪挪亞和他的妻觀看,20 見火焰從壇上往上升,耶和華的使者在壇上的火焰中也升上去了。瑪挪亞和他的妻看見,就俯伏於地。

    瑪挪亞如今照著使者所說,將祭物獻給耶和華。接著「使者行奇妙的事」。按原文直譯,是「行了奇妙的事」。方才自稱「我名是奇妙的」那一位,緊接著就行了奇妙的事。有些古代譯本將這一句讀作「獻給那行奇妙之事的耶和華」,無論怎麼讀,意思都是一樣的。面對詢問名字的瑪挪亞,神沒有解釋自己的名字,而是藉著行奇妙的事,向他顯明自己是誰。

    瑪挪亞所築祭壇上的火焰升騰而上,耶和華的使者也在那火焰中一同升上去。這時,瑪挪亞和他的妻子才俯伏在地。這一幕讓人想起基甸的故事。基甸也曾為耶和華的使者預備供物,使者用杖頭一點,火就從磐石中出來燒盡祭物,使者隨即消失不見。那時基甸才知道他是耶和華的使者,因而懼怕。瑪挪亞也是如此。

    士13:21–22 耶和華的使者不再向瑪挪亞和他的妻顯現,瑪挪亞才知道他是耶和華的使者,22 瑪挪亞對他的妻說:「我們必要死,因為看見了神。」

    瑪挪亞心生懼怕:「我們必要死,因為看見了神。」這樣的懼怕並非毫無來由。神曾對摩西說:「沒有人看見我的面還能存活。」在聖潔的神面前,人心生懼怕乃是正確的反應。以賽亞在聖殿中見到神時,也曾呼喊:「禍哉!我滅亡了!」然而當基甸懼怕時,耶和華親自對他說:「你放心,不要懼怕,你必不致死。」但在今天的經文裡,說出這句安慰之話的人卻不同。

    士13:23 他的妻卻對他說:「耶和華若要殺我們,必不從我們手裡收納燔祭和素祭,也不將這一切事指示我們,今日也不將這些話告訴我們。」

    妻子冷靜地一一分析。她說,神若真要殺我們,第一,就不會從我們手中收納燔祭和素祭;第二,就不會將這一切事都指示給我們看;第三,也不會將要賜下兒子的這番話告訴我們。的確如此,瑪挪亞的懼怕,出自對神聖潔的敬畏,這一點並沒有錯。但他的結論卻是錯的,因為他沒有將神已經賜下的恩典與應許算在內。妻子以神已經成就的事為根據,穩住了丈夫的懼怕。在這段故事裡,最先遇見神的使者、最先察覺這位訪客不尋常的,是這位無名的婦人;而到了最後,也是她將丈夫從懼怕中拯救出來。

    而應許終究照樣應驗了。

    士13:24–25 後來婦人生了一個兒子,給他起名叫參孫。孩子長大,耶和華賜福與他。25 在瑪哈尼‧但,就是瑣拉和以實陶中間,耶和華的靈才感動他。

    為孩子取名的人,也是這位母親。「參孫」這個名字,一般認為與「太陽」一詞有關。經文接著說:「孩子長大,耶和華賜福與他。」這句話不能輕易略過。在士師記所記載的眾拯救者當中,唯獨參孫被明確記載「耶和華賜福與他」。參孫是藉神蹟而生,從母腹中就被分別為聖,並且在神的祝福中長大。在眾士師當中,他擁有最好的開端。

    而最後一節說:「耶和華的靈才感動他。」這裡的「感動」一詞,並非指靜靜地停留,而是一個少見的用詞,意指搖動、喚醒、催逼人採取行動。而「才」這個字,正與第5節使者所說「他必起首拯救以色列人脫離非利士人的手」中所用的詞相同。神曾應許說「他必起首拯救」,如今神的靈開始感動他,應許正在開始應驗。而這事發生的地點,正是瑣拉和以實陶之間。後來參孫離世之後,他的屍身也埋葬在瑣拉和以實陶之間,他父親瑪挪亞的墳墓裡。參孫的故事,從這兩座城之間開始,也在同樣這兩座城之間結束。

    試想一下,整個第13章裡,人一直不能生育、不知道、一再詢問,最後心生懼怕。然而到了這一章的結尾,主詞轉換成了神:孩子誕生了,耶和華賜福了,耶和華的靈開始感動了。瑪挪亞想知道神的名字,神卻向他顯明了奇妙的作為;他想知道孩子的未來,神卻親自成就了應許。而神所應許的拯救,就在這位蒙福的孩子身上,隨著神的靈開始感動他,靜靜地展開了序幕。如今,我們將要看到,這美好的開端,會走上一條怎樣的道路。

    今天默想這段經文時,我在瑪挪亞身上看見了自己。當懼怕來臨時,我也常常像瑪挪亞那樣說:「這下完了。」事工不如己意時,前路看不見時,自己的軟弱顯露出來時,都是如此。神是聖潔的,我是不足的,這個念頭本身並沒有錯。可是這個念頭往往立刻導向一個結論——「所以神一定會離棄我」。就像瑪挪亞一樣,我也沒有把已經領受的恩典算進去。然而每當這種時候,我身邊總有一位像瑪挪亞妻子那樣的人,那就是我的妻子。當我陷入懼怕的時候,妻子總是冷靜地問我:如果神真要離棄我們,為何會將我們一路引領到這裡?祂呼召了不足的我們,差派我們來到這片土地,在異鄉度過的漫長歲月裡,祂從未鬆手,如今也仍在藉話語向我們賜下應許,不是嗎?是的,妻子一一數點出我已經遺忘的神的恩典。神對基甸是親自說「放心吧」,對瑪挪亞卻是藉著妻子說話——如今祂也是這樣待我。想到這裡,我便想起了教會裡的弟兄姊妹們,他們各自站在自己的位置上,面對著「這下完了」的懼怕……我明白那種心情。所以今天,每當懼怕來臨時,我便先數算神已經成就的事。並且,如同妻子曾為我做的那樣,我也願意在懼怕的弟兄姊妹身邊,與他們一同數算神的恩典,活出這樣的生命。因為那位照應許賜下孩子、賜下祝福、並藉聖靈開始動工的神,今日仍在我們的生命中,繼續成就祂所應許的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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