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21:1–12
今日默想:士師記 21:1–12
제목 :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어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칼을 거두지 않은 이스라엘로 끝났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칼이 무엇을 베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늘 본문에서야 그 결과를 보고 운다. 이제라도 자기들이 한 일을 보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울음 끝에 내놓은 해결책이 또 다른 칼이다.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맹세 하나를 꺼내면서 시작한다.
삿 2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은 미스바 총회 때 이미 이렇게 맹세했었다. 그런데 화자는 그때는 말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밝힌다. 그 이유는 그 맹세가 지금 문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과 혼인하는 일에는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제 자기 형제 베냐민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가나안 족속에게 적용되던 배제의 논리를 형제에게 돌린 셈이다. 어제 본문에서 가나안에게 행해야 할 진멸을 형제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흐름이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은 다시 벧엘로 올라간다. 그리고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큰 소리로 운다.
삿 21: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마치 하나님이 한 지파를 없애신 것처럼 말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다. 그러나 원문은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있어 오늘 한 지파가 빠지게 되었습니까”에 가깝다. 즉 이스라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는것 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맹세한 사람도, 칼을 든 사람도, 베냐민의 성읍을 불사른 사람도 이스라엘이었다. 질문은 하나님 앞에 올려졌지만, 그 질문이 끝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상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잘 봐라 사사기는 백성이 보김에서 우는 장면으로 시작했다(2:4–5). 그리고 벧엘에서 우는 장면으로 끝난다. 보김에서도 백성은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러나 그 울음 뒤에도 사사기의 하강은 멈추지 않았다. 맞다. 울었다는 사실이 곧 변화의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삿 21: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여기서 ‘뉘우쳐’로 번역된 말은 원문에서 죄를 회개한다는 뜻이라기보다 불쌍히 여기고 마음 아파한다는 뜻에 가깝다. 이스라엘은 이제 베냐민을 ‘그의 형제’라고 부르며 마음 아파한다. 물론 그 마음은 진짜였을 것이다. 그런데 곧바로 걸림돌이 나온다. 형제를 살리고 싶은데, 여호와로 한 맹세가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맹세가 잘못이었다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는다. 오히려 대신 맹세의 구속력은 그대로 두고 그 결과만 피해 갈 길을 찾는다. 그러다가 또 다른 맹세를 떠올린다. 미스바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맹세였다(5절). 베냐민을 향한 마음이 생기자, 불참자를 죽이겠다던 맹세가 갑자기 쓸모 있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백성을 세어 보니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삿 21:10-11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회중은 이 일을 ‘진멸하여 바칠’ 일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본래 여호와의 심판 전쟁에 쓰이던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결정한 동족 살육에 그 거룩한 전쟁의 언어를 붙였다. 그리고 그 진멸마저 온전하지 않았다. 모두를 치라고 하면서도,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사백 명은 살려 실로 진영으로 데려왔다(12절). 자기들의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사람만 골라 살린 것이다. 이렇게 베냐민을 살리려던 긍휼이 또 다른 형제를 치는 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칼 앞에서 여인들은 또다시 이 이야기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 모든 장면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끊임없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서 울고,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로 맹세했다고 말하고, 진멸이라는 거룩한 전쟁의 말까지 쓴다. 그런데 20장에서 세 번 응답하셨던 하나님은 21장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이 해결책을 명하셨다는 말은 본문 어디에도 없다. 그래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같지 않을 수 있다.
요즘 사사기를 묵상하며 마음이 힘들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지만,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이스라엘은 형제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했지만, 미스바에서 한 맹세가 잘못이었다고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맹세를 지키면서 피해 갈 길을 찾았고, 그 길에 ‘진멸하여 바칠’이라는 거룩한 말을 붙였다. 나 역시 그럴 때가 있다. 한 번 내뱉은 말, 한 번 내린 결정을 꺾지 않으려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럴듯한 방법을 찾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체면은 지키면서도 겉으로는 신실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곤 한다. “기도하고 결정한 일이니까” 하고 말하면, 그 결정을 다시 따져 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 나도 이스라엘처럼 내 말을 붙들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같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 나는 지키려고만 했던 내 말과 결정을 하나님 앞에 다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품고 기도한다. 주님, 우리가 우리의 말을 지키느라 주님의 뜻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결정에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않게 하시며, 잘못된 길에서는 돌아설 줄 아는 겸손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標題:為何在以色列中缺了這事
昨天我們讀的經文,結束在戰爭結束後仍不肯收刀的以色列。然而以色列並不知道自己的刀正在砍向什麼。直到今天的經文,他們才看見結果而哭泣。哪怕到了現在,他們也該看清自己所做的事。但在那哭聲之後,他們拿出的解決辦法,卻又是另一把刀。
今天的經文,是從揭開一個至今一直隱藏的誓言開始的。
士 21:1 以色列人在米斯巴曾起誓說:「我們都不將女兒給便雅憫人為妻。」
以色列在米斯巴大會時就已經這樣起誓了。但敘事者當時沒有說,直到現在才揭露。原因是這個誓言如今正在製造問題。神曾吩咐以色列不可與迦南人通婚,但以色列對於與迦南人通婚並沒有什麼顧忌。這樣的以色列,如今卻起誓不與自己的弟兄便雅憫通婚。這等於是把原本用在迦南人身上的排除邏輯,轉向了自己的弟兄。這與昨天經文中,把應當施行在迦南人身上的滅絕,施行在弟兄身上,是同一個脈絡。
戰爭結束後,以色列再次上到伯特利,在神面前坐到晚上,放聲大哭。
士 21:3 說:「耶和華以色列的神啊,為何以色列中有這樣缺了一支派的事呢?」
若照韓文聖經來讀,看起來好像是神除滅了一個支派,彷彿要把責任推給神。但原文更接近「為何在以色列中發生這樣的事,以致今日缺了一個支派?」也就是說,以色列是在問為什麼會發生這樣的事。然而我們知道答案。起誓的是以色列,拿刀的是以色列,焚燒便雅憫城邑的也是以色列。問題雖然被帶到神面前,卻始終沒有轉回到他們自己身上。他們不過是想為自己的作為找到正當性罷了。
請仔細看,士師記是以百姓在波金哭泣的場景開始的(2:4–5),又以在伯特利哭泣的場景結束。在波金,百姓也曾放聲大哭。然而在那哭聲之後,士師記的下墜並沒有停止。是的,因為哭過了,並不等於改變的證據。
士 21:6 以色列人為他們的弟兄便雅憫後悔,說:「如今以色列中絕了一個支派了。」
這裡譯為「後悔」的字,在原文中與其說是為罪悔改,不如說更接近憐憫、心中難過的意思。以色列如今稱便雅憫為「他們的弟兄」,為他心痛。當然,那份心或許是真的。但絆腳石立刻出現了:他們想救弟兄,卻有指著耶和華所起的誓擋住了去路。然而以色列並沒有在神面前承認那誓言是錯的,並把它放下。反而保留誓言的約束力,只尋找能避開其後果的路。於是他們又想起另一個誓言:凡不上米斯巴來的,必將他治死(5節)。當他們對便雅憫生出憐憫之心時,那要治死缺席者的誓言忽然變得有用了。於是數點百姓,發現基列雅比竟沒有一人前來。
士 21:10-11 會眾就打發一萬二千大勇士,吩咐他們說:「你們去用刀將基列雅比的男女孩子都擊殺了。11 所當行的就是這樣:要將一切男子和已嫁的女子盡行殺戮。」
會眾稱這件事為要「盡行殺戮(滅絕奉獻)」的事。這個詞原本是用於耶和華審判之戰的用語。然而以色列卻把這神聖戰爭的語言,套在他們自己所決定的同族屠殺上。而且就連這滅絕也不完全。他們一面說要擊殺所有人,一面卻留下四百名未嫁的處女,帶到示羅的營裡(12節)。他們只挑選出解決自己問題所需要的人留活。就這樣,原本想要拯救便雅憫的憐憫,竟成了擊殺另一群弟兄的刀。而在那把刀面前,女人們又一次成了這故事的受害者。
在這一切場景中,耶和華的名不斷出現。以色列在耶和華面前哭泣、獻祭,說自己是指著耶和華起誓,甚至使用「滅絕」這神聖戰爭的語言。然而在第20章三次回應的神,在第21章卻一句話也沒有說。經文中沒有任何一處說是耶和華吩咐了這個解決辦法。是的,像這樣以神的名所做的事,與神所要的事,可能並不相同。
最近默想士師記,心裡很沉重。看見以色列這樣的光景固然難受,但更是因為在其中發現了我自己的樣子吧。是的,以色列雖然想到弟兄而心痛,卻始終沒能說出在米斯巴所起的誓是錯的。反而一面守著那誓言,一面尋找迴避的路,還在那條路上貼上「滅絕奉獻」這神聖的字眼。我也常常如此。為了不收回一句說出口的話、不推翻一個已下的決定,明知是錯,仍要找個像樣的方法。因為這樣既能保住我的面子,表面上又顯得信實。而且我還常在那條路上冠上神的名。只要說一句「這是禱告後決定的」,就彷彿那決定再也不需要重新檢視了。是的,我也像以色列一樣,緊抓著自己的話,卻以為自己在順服神的旨意。然而以神的名所做的事,與神所要的事,可能並不相同。所以今天,我必須把那些只想守住的話語與決定,重新放在神面前。並且祈求能有勇氣,把錯的說是錯的……今天也同樣懷抱著我們的信仰群體禱告。主啊,求祢使我們不因守住自己的話而錯失祢的旨意,不隨意將祢的名冠在我們的決定上,並賜給我們在錯誤的道路上懂得回轉的謙卑……
댓글 / 留言 (0)
로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