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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9:1–6

    今日默想:士師記9:1-6

    한경우··조회 61

    제목 : 여룹바알의 아들

    어제 본문에서 기드온이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곧바로 바알들에게 돌아섰고, 자기들을 건져 내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위에 놓인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는 이 이야기는 갑자기 나타난 악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제 본문이 낳은 열매다.

    삿 9: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9장은 아비멜렉을 처음부터 '여룹바알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 호칭이 여기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9장 내내 '여룹바알'이다. 알다시피 이 이름은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헐고도 죽지 않았을 때 얻은 이름이고, 뜻은 '바알이 그와 다투게 하라'이다. 즉 바알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비웃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하필 그 이름을 붙들고 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바알의 무능을 조롱하던 이름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 바알브릿을 섬기는 성읍에서 왕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어디로 갔는지를 보라. 그는 아버지의 집 오브라로 가지 않고 어머니의 고향 세겜으로 간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쪽에서 그는 칠십 명 가운데 하나였고, 그것도 첩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그런데 세겜에서는 달랐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혈연이 있었고, 그 혈연은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확히 그것을 쓴다.

    삿 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여기 '다스리다'가 어제 우리가 본 그 낱말이다. 백성이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리소서" 할 때 쓴 말이고, 기드온이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며 거절했던 바로 그 말이다. 저자가 같은 낱말을 여기 다시 놓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입으로 거절했던 그 말을, 아들이 입으로 붙잡는다.

    그런데 사실 본문 어디에도 기드온의 칠십 아들이 세겜을 다스리고 있었다는 말은 없었다. 물론 백성이 기드온에게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고 했으니(8:22), 기드온의 집안이 통치 가문처럼 여겨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것을 '칠십 명이냐 한 사람이냐'라는 과장된 두 갈래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그 두 갈래 중에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미리 정해 놓고 물어 달라고 부탁한다.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삿 9: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세겜 사람들은 따져 보지 않는다. 마음이 기울었다고만 적혀 있다. 혈연이 판단을 이긴 것이다.

    삿 9: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바알브릿'은 '언약의 바알', 곧 '언약의 주'라는 뜻이다. 세겜이 어떤 성읍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갱신했던 성읍이다. 그런데 그 성읍의 신전 이름이 이제 '언약의 바알'이다. 언약이라는 말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언약의 상대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은 칠십 개다. 저자가 이 수를 적어 놓고 바로 다음 절에서 칠십 명의 죽음을 말한다. 두 수를 나란히 놓으면 마치 한 사람 앞에 은 한 개의 값이 매겨진 것처럼 읽힌다. 물론 본문이 그렇게 계산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나란함은 불길하다. 또 아비멜렉이 그 돈으로 산 사람들을 저자는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데, 히브리어는 무가치하고 무모한 자들이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비어 있는 자들이라는 어감을 가진다. 잃을 것이 없어서 돈에 움직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삿 9: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세겜에서 사람을 사고, 그 무리를 이끌고 아버지의 집 오브라까지 갔다. 이것만으로도 충동적인 살인이 아니라 준비된 권력 제거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 바위 위에서'라는 말이 무섭다. 난전 중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차례로 처형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주석 가운데는 그 바위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것이 조직되고 계산된 일이었다는 것만은 본문이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한 가지를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 여섯 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과 신전의 이름과 돈의 액수는 나오는데 하나님은 나오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장면의 표면에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다. 조금 뒤 23절에 가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조용하시다. 다만 한 사람이 숨어서 살아남는다. 막내 요담이다. 저자는 이 한 줄로 다음 이야기를 준비한다.

    삿 9: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어제 본문에서 백성은 기드온에게 '다스려 달라'고 했고 기드온은 거절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낱말이 바뀐다. 이제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실제로 왕으로 세우는 장면은 여기가 처음이다. 아버지가 입으로 거절했던 그 자리가 한 세대 만에 본문에 기록된 것이다.

    장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세겜의 상수리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곳이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였다(창 12:6-7). 야곱이 집안의 이방 신상들을 거두어 묻은 곳도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였다(창 35:4). 그리고 여호수아가 언약을 갱신하고 증거의 돌을 세운 곳이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였다(수 24:26). 그때 이스라엘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였다. 이 나무들이 다 같은 한 그루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겜의 상수리나무라는 말에는 제단과 언약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다. 바로 그 기억이 쌓인 자리에서, 우상의 신전에서 나온 돈으로 산 사람이 왕이 된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내 강단과 내 삶을 나란히 놓아 본다. 기드온은 분명히 옳은 말을 했다. 나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왕처럼 살았다. 왕의 전리품을 챙겼고, 왕처럼 아내를 많이 두었고, 자기 성읍을 중심처럼 만들었다. 말은 강단 위에 있었고 삶은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아들이 왕이 되려고 형제들을 죽인다. 물론 그 피의 책임은 아비멜렉 자신의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과 삶 사이에 남아 있던 그 틈이, 다음 세대의 이야기에서는 훨씬 더 끔찍한 모습으로 벌어져 있다. 내가 강단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선포하면서 정작 내 사역과 내 자리는 내 손으로 붙들고 있다면, 나를 보고 자라는 이들은 그 모순을 그대로 보고 자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내가 점검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말한 그것을 내가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선포한 말이 내 삶에서도 참이 되기를, 그래서 나를 보고 자라는 이들이 내 말과 내 삶에서 같은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그렇게 되도록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위해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中文 AI翻譯

    標題:耶路巴力的兒子

    昨天的經文中,基甸死了。以色列隨即轉向巴力,不再記念那位拯救他們的神。今天的經文正是承接在那之上。也就是說,我們今天所讀的這個故事,並不是突然出現的惡人故事,而是昨天經文所結出的果子。

    士9:1 耶路巴力的兒子亞比米勒到了示劍他母親的兄弟那裡,對他們和他外祖父全家的人說:

    第9章從一開始就稱亞比米勒為「耶路巴力的兒子」。而這個稱呼並非只出現這一次。整整第9章都是「耶路巴力」。眾所周知,這個名字是基甸拆毀巴力祭壇卻沒有死時所得的名字,意思是「讓巴力與他爭辯吧」。也就是說,這本是一個嘲笑巴力何等無力的名字。但作者偏偏抓住這個名字來推進這個故事——一個帶著嘲弄巴力無能之名的人的兒子,竟在敬拜巴力比利土的城裡成為王。

    再看看亞比米勒去了哪裡。他沒有去父親的家俄弗拉,而是去了母親的故鄉示劍。這是有原因的。在父親那邊,他只是七十人中的一個,而且還是妾所生的兒子。但在示劍卻不同。那裡有母親的血親,而那血親是他唯一能用的資產。所以他準確地運用了這一點。

    士9:2 「請你們問示劍的眾人:是耶路巴力的眾兒子七十人都管理你們好呢?還是一人管理你們好呢?你們又要記得,我是你們的骨肉。」

    這裡的「管理」正是我們昨天看過的那個詞。百姓對基甸說「求你管理我們」時用的正是這個詞,基甸拒絕時說「我不管理你們,耶和華必管理你們」用的也正是這個詞。作者將同一個詞再次放在這裡,恐怕不是偶然的。父親口中拒絕的那句話,如今被兒子的口重新抓住。

    但其實經文中並沒有任何地方說基甸的七十個兒子曾經統治示劍。當然,百姓曾對基甸說「願你和你的兒子、你的孫子管理我們」(8:22),所以基甸家族或許被視為某種統治家族。然而亞比米勒卻把這誇大成「七十人還是一人」的兩極對立,並事先設定好對自己有利的一方,要求對方按此提問。他還加上一句話:「你們要記得,我是你們的骨肉。」

    士9:3 他母親的兄弟便將這一切話為他說給示劍人聽,示劍人的心就歸向亞比米勒,說:「他是我們的兄弟。」

    示劍人並沒有仔細查驗。經文只寫著他們的心歸向了他。血緣勝過了判斷。

    士9:4 就從巴力比利土廟中取了七十塊銀子給亞比米勒,他用以雇了一些游蕩無業的人跟隨他。

    「巴力比利土」意為「約的巴力」,即「約的主」。示劍是怎樣的一座城呢?那是以色列與神立約並更新盟約的城。然而如今這座城裡神廟的名字卻是「約的巴力」。「約」這個詞仍然留存,但立約的對象已經改變了。

    還有七十塊銀子。作者記下這個數字後,緊接著在下一節就提到七十人的死。將這兩個數字並列在一起,讀起來彷彿每一個人的性命都被標上了一塊銀子的價錢。當然,經文並沒有這樣直接計算著說。但這種並列本身就令人不安。此外,亞比米勒用那些錢雇來的人,作者稱之為「游蕩無業的人」,希伯來語同時帶有毫無價值、輕率妄動,以及「空虛之人」的語感——那些一無所有、因此能被金錢驅動的人。

    士9:5 他往俄弗拉到他父親的家,將他弟兄、耶路巴力的兒子七十人都殺在一塊磐石上,只剩下耶路巴力的小兒子約坦,因為他躲藏了。

    在示劍雇人,再帶著這群人去到父親家俄弗拉。單憑這一點就足以表明,這不是一時衝動的殺人,而是精心策劃的權力清除行動。而「在一塊磐石上」這句話令人不寒而慄,因為它讓人聯想到的不是混亂中發生的事,而是在同一個地方依次處決的場景。古老的註釋中有人認為那塊磐石是用來獻祭的,但這一點難以確定。不過經文清楚表明,這是一件經過組織、精心算計的事。

    還有一點值得思考:今天這六節經文中,神的名字一次都沒有出現。人的名字、神廟的名字、金錢的數目都出現了,唯獨神沒有出現。這並非因為神不在場,而是祂在這場面的表層保持沉默。稍後在23節,神親自介入。但在今天的經文中,祂仍然安靜。只有一個人躲藏起來活了下來,就是小兒子約坦。作者用這一句話為接下來的故事做了準備。

    士9:6 示劍人和米羅人聚集,一同去,在示劍橡樹旁的柱子那裡,立亞比米勒為王。

    昨天的經文中,百姓對基甸說「求你管理我們」,基甸拒絕了。但今天的經文中,用詞改變了。如今說的是「立為王」。在士師記中,以色列人真正立人為王的場景,這裡是第一次。父親口中所拒絕的那個位子,僅僅過了一代,就被記在經文之中。

    地點也不能輕易略過。示劍的橡樹是怎樣的一棵樹呢?亞伯拉罕進入迦南後最初築壇的地方,就是示劍的摩利橡樹(創12:6-7)。雅各將家中的外邦神像收起埋藏的地方,也是示劍的橡樹下(創35:4)。而約書亞更新盟約、立見證石的地方,就是「耶和華的聖所旁邊的橡樹下」(約書亞記24:26)。那時以色列人說了什麼?「我們也要事奉耶和華。」這幾棵樹是否是同一棵樹,無從確知。但「示劍的橡樹」這個說法,層層疊疊承載著祭壇與盟約的記憶。正是在這承載著如此記憶的地方,一個用偶像神廟的錢買來的人,竟成了王。

    今天讀著這段經文,我再一次把我的講台和我的生活並排放在一起省察。基甸確實說了正確的話。他說他不會成為王,說耶和華會治理。但他卻活得像個王。他拿了王的戰利品,像王一樣娶了許多妻子,把自己的城邑打造成中心一般的存在。話語站在講台之上,生活卻在講台之下。而正是在緊接著的下一章,他的兒子為了成為王而殺死自己的兄弟。當然,那流血的責任是亞比米勒自己的。我們不能說是父親造成了兒子如此行事。但留存在父親話語與生活之間的那道裂縫,到了下一代的故事裡,卻裂開得更加恐怖。如果我在講台上宣告神在治理,但實際上我的事工和我的位置卻緊緊握在自己手中,那麼看著我成長的人,也會照樣看見那個矛盾並跟著長大。所以今天我需要省察的,不是我說了什麼,而是我所說的那些話,我是否真實地活了出來。因此,願今天我所宣告的話語,也能在我的生活中成為真實;願那些看著我成長的人,能在我的話語與我的生活中看見同一位神……願主扶持我,使這事成就……我懇切地禱告,並為著那樣的生活,今天也開始新的一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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