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이사야 7:1–25
今日默想:以賽亞書 7:1–25
제목 : 임마누엘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본문은 시와 산문이 혼재되어 있기에 그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래서 조금 길게 설명을 하니 이해하고 읽어 주시길 바란다.
주전 735년쯤, 앗수르라는 제국이 서쪽으로 밀고 내려오자 아람의 르신 왕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손을 잡았다. 이 둘은 함께 힘을 합쳐 앗수르를 막아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쪽 유다도 이 동맹에 끌어들이려 했는데, 유다의 아하스 왕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 나라가 군대를 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들은 아하스를 유다의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들 말을 들을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이 배경을 이해하고 본문을 봐야 한다.
사 7: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그때 소식이 전해진다. 그런데 본문은 그 소식이 '아하스에게' 전해졌다고 하지 않고 '다윗의 집에' 전해졌다고 기록한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왕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왕조 전체라는 뜻이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 전체가, 뿌리내린 것들이 통째로 흔들리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흔들리는 왕에게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그 두 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평가해 주신다. 그들을 가리켜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꼬리'라 하신다. 부지깽이는 아궁이의 불을 뒤적이는 나무 막대기다. 그 끝이 타다가 남은 것, 이제는 불꽃도 없이 연기만 나는 그 토막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곧 꺼질 것이라는 뜻이다. 즉 아하스의 눈에 르신과 베가는 나라를 통째로 삼킬 불길로 보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이미 다 타 버린 나무토막 둘에 불과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별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 끝에 한 가지를 요구하신다.
사 7:9下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어 원문에서 '믿다'와 '서다'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그 어근의 뜻은 '붙들다, 떠받치다'이다. 우리가 기도 끝에 붙이는 '아멘'도 이 말에서 나왔다. 그러니 이 문장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 네가 붙들지 않으면, 너도 붙들리지 않는다. 믿음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자기를 의탁하고 서 있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제안을 하나 하신다. 바로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해 보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왜 굳이 징조를 구하라 하시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하기로 정하셨다. 두 왕은 꺼져 가는 부지깽이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에스겔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 뒤에 이렇게 덧붙이신다.
겔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그래 구원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하라고 하신다. 왜 그러신가. 구할 때 비로소 그 구원이 내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하스가 징조를 구했다면,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자기 외교 수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알려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아하스가 그 징조를 구하는 것을 거절한다.
사 7: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사실 이 본문에서 아하스의 말만 들으면 대단히 경건한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와를 시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야 이 장면이 보인다. 이 표현은 광야의 한 사건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서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며 하나님을 시험했는데, 그때 그들이 한 말이 이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맛사, 곧 '시험'이라 불렀다. 그러니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증거를 내놓아 보라고 하나님을 자기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에서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그런데 아하스의 경우는 정반대다. 그가 하나님을 시험대에 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구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이 구하라 하실 때 구하는 것은 시험이 아니라 순종이다. 도리어 구하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다. 그러니 아하스는 율법의 문장을 정확하게 인용하면서, 그 율법의 정신을 정면으로 어긴 셈이다. 거룩한 말로 불순종을 포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하스는 왜 징조를 구하지 않았을까? 그때 아하스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면 답이 나온다. 열왕기하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니 올라와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청했고, 성전과 왕궁 창고의 은과 금을 모아 예물로 보냈다. 곧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붙들기로 정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은금까지 꺼내어 그 값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그가 왜 징조를 거절했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로 징조를 주시면, 그는 이미 세워 둔 그 자신의 계획을 접어야 하기 때문이다. 앗수르에 보낸 사신을 되불러야 하고, 성전의 은금을 도로 들여놓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켜주시길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불안했다. 차라리 확실히 눈에 보이는 앗수를 신뢰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하나님께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이 달라진다. 그는 호칭 하나를 바꾼다. 조금 전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라고 말한다. '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 아하스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기를 스스로 거절했으니, 이사야도 더 이상 그를 향해 '네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 한 마디가 아하스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 준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징조를 거부한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신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구하라 하셨을 때 구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이 스스로 징조를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 징조의 핵심은 아이의 이름이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이름이 결국 누구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졌는지를 안다. 마태는 예수님의 나심을 기록하면서 바로 이 구절을 인용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 사건이 이 이름의 완성이다.
그리고 그 징조를 주신 후에 아하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사 7:17-25). 하나님은 곧이어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을 네게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에 임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아하스가 구원자로 부른 그 앗수르가, 이제 하나님이 유다에 보내시는 심판의 이름으로 놓인다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한 자는 결국 자기가 의지한 그것에게 삼켜진다. 이어지는 네 개의 '그 날에'가 그 결과를 그린다. 하나님이 휘파람을 불어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을 부르시고, 앗수르라는 삯꾼의 면도칼로 백성의 머리털과 수염을 미시며, 온 땅에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만 남고, 은 천 개짜리 포도원이 찔레와 가시로 뒤덮인다. 5장에서 포도원의 울타리를 걷으시겠다 하신 그 판결이, 여기서 실제 풍경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하나님을 이토록 거절한 왕에게, 하나님은 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이름을 주셨는가.
먼저 그 징조는 아하스 한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집 전체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왕 한 사람의 불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실 때 이미 그 후손의 죄를 예상하고 계셨다. 그가 죄를 범하면 징계는 하겠으나 인자하심은 빼앗지 아니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불신한 아하스에 대한 징계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며 그 다윗의 집은 보호하시겠다는 것을 징조로 보여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아무 일도 없게 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앗수르는 실제로 왔고, 그 아이가 먹을 것은 잔칫상이 아니라 폐허에서 나는 엉긴 젖과 꿀이었다. 그러니 임마누엘은 심판을 면제하는 이름이 아니라, 심판을 통과하는 백성 곁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다. 6장에서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는 남는다고 하신 그 약속과 같은 결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하필 인간의 실패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바로 그 자리에서 메시아를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다윗 왕조의 신실함에 달린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린 일이라는 선언이다.
나는 오늘 아하스를 보며 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그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그는 눈앞의 위협인 두 왕만 보았고, 자기 뒤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보지 못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자기를 지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의 은금을 긁어모아 제국의 발밑에 놓았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그 놀라운 약속이 바로 그 자리에서 선포되고 있는데도, 그는 그것을 들을 귀가 없었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눈앞의 문제가 너무 커 보여서, 그 뒤에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손길을 보지 못하는 순간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하스처럼 답을 미리 정해 놓고 하나님께 묻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나의 모습을 회개하고 돌아서길 소망한다. 오히려 우리가 흔들리는 그 자리마다 이미 와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나와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오늘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눈앞의 두려움 너머에 계신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題目:以馬內利
要理解今天的經文,必須先了解當時的歷史背景。此外,本段經文詩文與散文交織並陳,使理解更加不易。因此以下稍作詳細說明,請耐心閱讀。
主前約735年,亞述帝國大舉向西推進,亞蘭王利汛與北以色列王比加因此結盟,企圖聯手抵禦亞述。他們試圖將南方的猶大也拉入這個同盟,然而猶大王亞哈斯拒絕加入。於是兩國聯軍便向耶路撒冷進逼,意圖廢黜亞哈斯,另立一位順從他們的人為王。理解了這個背景,再來讀這段經文才能明白其意。
賽7:2 有人告訴大衛家說:亞蘭與以法蓮已經同盟。王的心和百姓的心就都跳動,好像林中的樹被風吹動一樣。
消息傳來了。然而經文並未說消息傳給了「亞哈斯」,而是記載傳給了「大衛家」。這意味著如今搖動的不只是一位君王,而是神向大衛所應許的整個王朝。消息傳至,用林木被風吹動的意象來描繪——這不是一棵樹的搖晃,而是整片森林、所有紮根之物,一同被搖動的事件。面對這位惶恐動搖的王,神差遣以賽亞前去。神首先評估了那兩位王的本質,稱他們為「兩個冒煙的火把頭」。火把是撥弄灶火的木棍,所指的正是那燃燒殆盡、已無火焰只剩煙霧的殘木——意思是即將熄滅。在亞哈斯眼中,利汛與比加是吞噬整個國家的熊熊烈火;然而在神眼中,他們不過是兩根燒盡的木頭而已。這是一個信息:他們不足為懼,當信靠我。話語末了,神提出一項要求。
賽7:9下 你們若是不信,定然不得立穩。
在希伯來原文中,「信」與「立穩」源自同一字根,其含義是「抓住、支撐」。我們在禱告末尾所說的「阿們」,也正是從這個字根而來。因此這句話可以這樣讀:你若不抓住,你也不得被抓住。信心不是情感的問題,而是你將自己託付於何處、立足於何處的問題。這是呼召我們信靠神。
隨後,神向亞哈斯提出一個建議——求一個兆頭。無論是深處或高處,求你所願求的。然而我們需要思考,神為何要他求兆頭?神已決意拯救,已說明兩位王不過是熄滅的火把。即便如此,神仍要亞哈斯向祂禱告求問。其原因可從以西結書中得知。神應許要恢復以色列之後,這樣補充道:
結36:37 主耶和華如此說:我還要因這事被以色列家祈求,要增多他們的人數,像羊群一樣。
拯救已然備妥,然而神說:要來求。為何如此?因為唯有在求告之中,人才能明白這拯救不是靠自己的能力得來的,而是神所賜予的。因此,若亞哈斯求了那兆頭,他便會知道,在這場戰爭中存活,靠的不是他自己的外交手腕,而是神的大能之手。這正是神渴望讓他明白的事。然而亞哈斯拒絕求那兆頭。
賽7:12 亞哈斯說:我不求,我也不試探耶和華。
若只聽亞哈斯這句話,表面上是極為虔誠的表達。然而必須準確理解「試探耶和華」的含義,才能看清這一幕的真實面貌。這個說法源於曠野中的一個事件——以色列人在利非訂因無水喝,與摩西爭鬧,試探神,說的正是:「耶和華是在我們中間不是?」於是那地方被稱為「瑪撒」,意即「試探」。所謂試探神,是指一種態度:不信靠神,卻要求神拿出證據,將神置於自己的審判台上。因此摩西在申命記中命令以色列人:「不可像在瑪撒那樣試探耶和華你們的神。」
然而亞哈斯的情況恰恰相反。不是他將神置於試驗台上,而是神主動命令他求。當神說求的時候去求,這是順服,不是試探。反倒是不求,才是悖逆。亞哈斯精確地引用了律法的文字,卻正面違背了律法的精神——用聖潔的話語包裝了悖逆。
那麼,亞哈斯為何不肯求兆頭?只要知道他當時實際上在做什麼,答案便清晰了。列王紀下記載了那個場景:亞哈斯派使者去見亞述王,說:「我是你的僕人,也是你的兒子,求你來拯救我」,並將聖殿與王宮府庫中的金銀搜集起來,作為禮物送去。換言之,他已經做了決定——不依靠神,而依靠亞述。甚至將聖殿中的金銀取出,作為代價奉上。
由此,他拒絕求兆頭的原因便昭然若揭了。若神真的賜下兆頭,他就必須放棄自己已然定下的計謀——要召回派往亞述的使者,要將聖殿的金銀歸還原位,還要等候神的保護。但他心中充滿不安,寧可信靠眼睛看得見的亞述。於是他乾脆選擇不向神詢問。
因此以賽亞的話語也隨之改變了。他改換了一個稱謂。片刻之前,神說:「你可以求耶和華你的神給你一個兆頭」;然而如今以賽亞說:「你們豈不以為足,還要惹我神的煩惱麼?」「你的神」變成了「我的神」。亞哈斯既已自行拒絕將神當作自己的神,以賽亞也不再稱呼他「你的神」了。這一字之差,最準確地揭示了亞哈斯如何對待神。
然而就在那個當下,面對這位拒絕求兆頭的亞哈斯,神親自賜下兆頭。
賽7:14 因此,主自己要給你們一個兆頭,必有童女懷孕生子,給他起名叫以馬內利。
對那位在神說「求」時不肯求的人,神主動顯明兆頭。而那兆頭的核心,在於孩子的名字——以馬內利,意即「神與我們同在」。我們知道這個名字最終在誰身上得到了完全的成就。馬太記載耶穌降生時,引用的正是這節經文。神成為人,降臨在我們中間——這一事件,就是這個名字的完全成全。
賜下兆頭之後,神宣告對亞哈斯的審判(賽7:17-25)。神說,祂要使亞述王來的那日,臨到亞哈斯和他的百姓,並他父的家。亞哈斯所呼求的那位救主亞述,如今卻成了神差派審判猶大的名字。倚靠人的人,終必被自己所倚靠的吞噬。緊接著四個「那日」,描繪了那結局的景象:神發出呼聲,召來埃及的蒼蠅與亞述的蜜蜂;用亞述這雇來的剃刀,剃去百姓的頭髮和鬍鬚;全地只剩一頭母牛、兩隻羊;價值千舍客勒銀子的葡萄園,盡都長滿荊棘和蒺藜。第五章中說要撤去葡萄園籬笆的那個宣判,在此成為了真實的景象。
那麼,還有一個問題留了下來:對這位如此拒絕神的王,神為何仍要賜下「我與你們同在」這個名字?
首先,那兆頭並非只給亞哈斯一人,而是賜給整個大衛家。這意味著,一位君王的不信,不能使神的約失效。何況神在向大衛立約時,已預料到其後裔的罪:「他若犯了罪,我必用人的杖責打他……但我的慈愛仍不離開他」。因此,對不信神的亞哈斯有懲戒,但神記念與大衛所立的約,要以兆頭彰顯祂保護大衛家的心意。所以「以馬內利」這個名字並不意味著一切安然無恙——亞述確實來了,那孩子所吃的不是筵席上的美食,而是荒廢之地所出的凝乳和蜂蜜。因此,以馬內利不是免除審判的名字,而是神要與那經歷審判的百姓同在的宣告。這與第六章所說的「被砍伐之後,聖潔的種類仍是其根」的應許,有著同樣的心意。
更令人驚嘆的是,神偏偏選在人的失敗最為顯著的那個地方,應許了彌賽亞的降臨。這正是一個宣告:基督的到來,不取決於大衛王朝的忠信,而只取決於神自己的信實。
今天,我看著亞哈斯,心中思緒萬千。他所錯失的是什麼?他只看見眼前的威脅——那兩位王,卻看不見在他身後川流不息的神那宏大的救恩作為。他不知道神賜給大衛的應許,正經由他延伸直到基督。於是他刮盡聖殿的金銀,俯伏在帝國的腳下。「神與我們同在」這個驚人的應許,就在那個當下被宣告了出來,他卻沒有耳朵去聆聽。在我的生命中,也曾有過那樣的時刻——眼前的問題看似太過巨大,以致看不見神那在其後、至今仍向祂子民川流而去的宏大手勢。我也意識到,自己曾像亞哈斯一樣,在心中已有定論之後,才反覆地向神「詢問」。如今我渴望為自己這樣的樣式悔改,回轉歸向神。盼望我們在每一個動搖的當下,都能經歷那已然臨在的以馬內利之神——不論是我個人,還是我們整個群體。因此,今天我這樣禱告:神啊,求祢開我們的眼睛,使我們能看見在眼前的恐懼之後的祢。願我們的群體每天活在對以馬內利之神的經歷中。
댓글 / 留言 (0)
로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