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야고보서 1:1–11
今日默想:雅各書 1:1–11
제목 : 온전하고 구비하여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묵상한다. 이 편지를 쓴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였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던 때만 해도 그는 형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그 야고보가 편지 첫머리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는 자신을 주의 형제라 부르지 않는다. 종이라 부른다. 편지를 받는 이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흩어져 살던 성도들이다. 그러니 야고보서는 세상 한가운데서 흔들리며 사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다. 야고보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인가, 아니면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인가. 오늘 본문에 그 두 말이 다 나온다.
그런데 인사말 바로 다음에 야고보가 꺼내는 첫마디는 시험이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문안하노라'는 원문에서 '기뻐하라'는 뜻을 품은 당시의 인사말이다. 야고보는 그렇게 기뻐하라고 인사하자마자, 시험을 기쁨으로 여기라고 한다. 인사에서 꺼낸 기쁨을 시험 앞에서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험을 즐거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파도 웃으라는 말도 아니다. 야고보는 '기쁘게 느끼라'고 하지 않고 '기쁘게 여기라'고 한다. 감정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겪는 고통만 보지 말고, 그 고통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까지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험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련'이라는 말은 금이나 은을 도가니에 넣어 진짜인지 가려내는 재련을 할 때 쓰던 말이다. 불은 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금이 금임을 드러낸다. 그래 믿음도 시험을 통과할 때 진짜임이 드러나고, 그 가운데 인내가 자란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것을 '너희가 앎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다. 이미 아는 것이다. 다만 시험이 닥치면 잊어버릴 뿐이다.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인내가 온전한 일을 하게 하라'이다. 주어가 내가 아니라 인내다. 인내에게 일할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기만 기다리다가 그 과정을 중간에 끊어 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그럴 때 인내가 이룬 '온전한 일'이 '온전한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이 온전함은 흠 하나 없는 완벽이 아니다. 구약에서 이 말은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쓰였다. 어느 한 부분도 빠지거나 갈라지지 않고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다. 그러니 야고보가 말하는 성숙은 고난을 많이 견딘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뉘지 않은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고 말해 놓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 '부족'을 다시 꺼낸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같은 '부족'이 두 문장을 잇는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사는 처세술이 아니다. 무엇보다 시험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 내는 지혜다. 시험을 기쁨으로 여기라는 명령은 사람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위에서 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주시면서 면박하지 않으신다. 또 왔느냐고 하지 않으신다. 게다가 '후히'라는 말에는 '단순하게, 한결같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일부 주석가들의 말처럼, 하나님은 나뉘지 않은 한 마음으로 주신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구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약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구절을 읽고, 기도할 때 확신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자책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의심은 그런 마음의 떨림이 아니다. 원문에서 '의심하다'는 말은 '갈라지다, 나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를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두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신약에서 야고보서에만 두 번 나오는 드문 말인데, 다른 한 번은 4장이다. 거기서 야고보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이라고 말한 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한다. 그래 두 마음은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붙드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결국 이렇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그런데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바람이 이쪽에서 불면 이쪽으로, 저쪽에서 불면 저쪽으로 밀려가는 바다 물결처럼, 자기 방향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사사기에서 계속 보았던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버린 적은 없었다.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겼을 뿐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가난과 부를 말한다. 주제가 바뀐 것이 아니다. 가난도 부도 흩어져 사는 성도들이 날마다 맞닥뜨리던 여러 가지 시험이었다.
약 1:9-10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낮은 형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높은 자리에 있다. 그것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반대로 부한 자는 자기가 쌓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한다. 왜인가. 풀의 꽃처럼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외쳤던 바로 그 그림이다. 그런데 11절은 부한 자가 시드는 자리를 '그 행하는 일에'라고 말한다. 일을 다 마치고 물러난 뒤가 아니다. 한창 바쁘게 제 길을 가는 바로 그 한복판에서 시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자는 세상의 낮음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부한 자는 세상의 높음을 붙들지 말아야 한다. 결국 둘 다 마음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의 문제다.
오늘은 이것을 기억하자. 시험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두 마음을 품는다. 그래 야고보서는 그 갈라진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늘 묵상에서 나는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한마디 앞에 멈춰 서서 지나온 목회의 길을 돌아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능력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다. 강단에 설 때마다 내가 이 자리에 설 만한 사람인가를 묻곤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꾸짖으며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마다 품어 주셨고, 구할 때마다 후히 부어 주셨다. 어제도 그러셨고, 오늘도 그러신다. 쓰러지고 낙망하여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도 나를 밀어내지 않으시고 품어 주셨다. 그래. 지금 내가 이 낯선 땅에서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것은 내 실력 때문이 아니다. 매일 아침 빈손으로 나아가는 나에게 하나님이 날마다 새 지혜를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주일마다 강단에 서는 것도 은혜이고, 반년이 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묵상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는 것도 은혜다. 그렇기에 내 열심이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부족한 그대로 다시 나아간다. 꾸짖지 않으시는 그 품을 의지하며...
題目:成全完備
從今天起,我們要默想雅各書。寫這封信的雅各是主的兄弟。在耶穌公開傳道的那段日子,他並不信自己的哥哥。然而,在遇見復活的主之後,他成了耶路撒冷教會的柱石。這位雅各在信的開頭這樣介紹自己:
雅 1:1 作神和主耶穌基督僕人的雅各,請散住十二個支派之人的安。
雅各沒有稱自己為主的兄弟,而是稱自己為僕人。收信的人是離開家鄉、分散在異地生活的聖徒。所以,雅各書是寫給在世界當中動搖度日的教會的信。雅各要問的是:你在神面前是一個完全的人,還是一個心懷二意的人?今天的經文裡,這兩個詞都出現了。
然而,問安之後,雅各開口第一句話談的就是試煉。
雅 1:2 我的弟兄們,你們落在百般試煉中,都要以為大喜樂;
「請……安」在原文中是當時含有「要喜樂」之意的問候語。雅各才以「要喜樂」來問安,緊接著就說要把試煉當作喜樂。他把問安時提到的喜樂,也帶到了試煉面前。但這並不是要我們享受試煉,也不是要我們痛也要笑。雅各不是說「要感到喜樂」,而是說「要以為喜樂」。他不是在命令情感,而是在要求一種判斷。不要只看眼前所受的痛苦,要看到這痛苦會造就出什麼,然後再下判斷。
那麼,試煉會造就出什麼呢?
雅 1:3 因為知道你們的信心經過試驗,就生忍耐。
「試驗」這個詞,是過去把金銀放進熔爐裡、煉淨以辨別真偽時所用的字。火不是要毀掉金子,而是要顯明金子是真金。同樣地,信心通過試煉時,就顯明是真的,忍耐也在其中成長。而雅各說這是「你們知道的」。這不是新的教導,而是我們早已知道的事;只是試煉臨到時,我們就忘了。
雅 1:4 但忍耐也當成功,使你們成全完備,毫無缺欠。
這裡千萬不可錯過。照原文直譯是「要讓忍耐做成完全的工作」。主詞不是我,而是忍耐。要給忍耐做工的時間;不要只是等著試煉趕快結束,而把這個過程半途截斷。這樣,忍耐所成就的「完全的工作」,就會造就一個「完全的人」。然而,這份完全並不是毫無瑕疵的完美。在舊約中,這個詞用來指沒有殘疾的祭物,是指沒有任何一部分缺少或分裂,整全地獻給神的狀態。所以雅各所說的成熟,不是成為一個熬過許多苦難的強人,而是在神面前成為一個不分裂的人。
雅各才說要「毫無缺欠」,緊接著下一句又再提到這個「缺欠」。
雅 1:5 你們中間若有缺少智慧的,應當求那厚賜與眾人、也不斥責人的神,主就必賜給他。
同一個「缺」字,把兩句話連在一起。所以這裡所說的智慧,不是處世之道,而首先是以神的眼光看待試煉、並活出來的智慧。把試煉當作喜樂的命令,單憑人的力量是做不到的,所以要向上面求。而那位神是不斥責人的神。祂賜下時不會數落,也不會說「你怎麼又來了」。再者,「厚賜」一詞也含有「單純、始終如一」的意思。正如一些註釋家所說,神是以不分裂的一顆心來賜予。那麼問題出在哪裡呢?出在祈求之人的心。
雅 1:6,8 只要憑著信心求,一點不疑惑;因為那疑惑的人,就像海中的波浪,被風吹動翻騰。8 心懷二意的人,在他一切所行的路上都沒有定見。
有些人讀了這段經文,就自責說:禱告時只要確信稍有動搖,就得不到應允。但雅各所說的疑惑,並不是那種內心的顫抖。原文中「疑惑」一詞含有「分裂、分開」的意思。所以雅各把疑惑的人稱為「心懷二意的人」,直譯就是「有兩個魂的人」。這是新約中只在雅各書出現兩次的罕見詞,另一次在第四章。雅各在那裡說,與世俗為友就是與神為敵,接著說:「心懷二意的人哪,要清潔你們的心。」所以,二意的心就是同時抓住神和世界的心。這種人的禱告最終是這樣的:「神啊,請告訴我該做什麼。但如果那答案不合我意,我就照自己的意思去做。」就像海中的波浪,風從這邊吹就被推到這邊,從那邊吹就被推到那邊,沒有自己的方向。想一想,我們在士師記中一再看到的以色列,也從未離棄耶和華;他們只是既事奉耶和華,也事奉巴力罷了。
接著,雅各談到貧窮與富足。這不是換了主題。貧窮與富足,都是散居各地的聖徒天天面對的百般試煉。
雅 1:9-10 卑微的弟兄升高,就該喜樂;10 富足的降卑,也該如此;因為他必要過去,如同草上的花一樣。
卑微的弟兄縱然在世上處於最低的位置,作為神的兒女卻在高處。要以此誇口。反之,富足的人不要誇耀自己所積攢的,而要誇耀明白那一切算不得什麼的降卑。為什麼?因為他必要過去,如同草上的花。這正是以賽亞所呼喊「草必枯乾,花必凋殘,惟有我們神的話必永遠立定」的那幅圖畫。而第11節說,富足人凋零的地方是「在他所行的事上」。不是在事情都做完、退下來之後,而是正當他忙碌地走自己的路時,就在那當中凋零了。所以,貧窮的人不要因世上的卑微而動搖,富足的人不要緊抓世上的高位。說到底,兩者都是心繫何處的問題。
今天讓我們記住這一點:試煉是要使我們成全,但我們卻一再心懷二意。所以,雅各書是以那分裂的心在神面前漸漸合而為一的故事作為開始。
今天的默想中,我在「不斥責人的神」這一句話前停下腳步,回顧走過的牧會之路。老實說,我是個沒有能力、也沒有本事的人。每次站上講台,我常常問自己:我配站在這個位置上嗎?然而,神從來沒有一次斥責我、把我打發回去。每當我帶著不足的樣子來到祂面前,祂都擁抱我;每當我祈求,祂都厚厚地澆灌。昨天如此,今天也是如此。即使在我跌倒、灰心、陷入絕望時,祂也沒有推開我,而是擁抱了我。是的,我如今能在這陌生的土地上承擔牧會,不是因為我的本事,而是因為每天早晨空手來到祂面前的我,神天天將新的智慧澆灌給我。每個主日能站上講台是恩典,半年多來一天都沒有間斷,能這樣寫默想文分享出來,也是恩典。所以,沒有一樣是靠我的熱心成就的。能夠如此承認,我滿心感恩。因此今天,我仍然帶著不足的自己,再次來到祂面前,倚靠那不斥責人的懷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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