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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6:25–40

    今日默想:士師記 6:25–40

    한경우··조회 68

    제목 : 이번만 더

    어제 본문에서 기드온은 ‘여호와 살롬’이라는 제단을 쌓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고백만으로 넘어가지 않으신다. 오늘 본문에서는 기드온에게 또 하나의 제단 이야기를 주신다. 이번에는 먼저 허물어야 할 제단이 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새로 쌓아야 한다. 그래서 송병현 교수는 기드온 이야기의 중심을 이 두 제단 이야기로 묶어 읽는다. 첫 번째 제단이 기드온의 고백이었다면, 두 번째 제단은 그 고백이 실제 순종으로 이어지는 자리다. 어제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오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제 네가 움직이라고 하신다.

    삿 6: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기 집 안의 우상을 없애는 일이었다. 정경적으로 보면 모세가 공적인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집안의 언약 문제를 먼저 마주해야 했던 장면도 떠오른다(출 4:24–26). 남을 구원하러 가기 전에 자기 집부터 바로 세워야 했다. 여기 ‘칠 년 된 둘째 수소’라는 말은 히브리어 자체가 좀 어려워서 정확한 뜻을 두고 여러 견해가 있다. 다만 수소가 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은 미디안의 칠 년 압제와 묘하게 겹친다. 그리고 26절을 보면 바알의 제단 곁에 있던 아세라 목상을 찍어서 번제의 땔감으로 쓰게 하신다. 가나안 예배의 상징물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의 땔감이 되는 것이다. 우상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 자체가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리로 바뀐 것이다.

    삿 6: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이 한 절을 읽으면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참 잘 보인다. 기드온은 말씀하신 대로 했다. 그런데 무서워서 밤에 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다. 바위에서 불이 나오는 것도 보았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말씀도 들었다. 제단까지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이 무서웠다. 그래 맞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그의 다음이 더 내 마음에 남는다. 그렇다. 기드온은 그래도 했다. 낮에는 못 했지만 밤에는 했다. 기드온은 두려움이 다 없어지고 나서 순종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려워하면서도 순종했다.

    이튿날 아침 성읍이 뒤집혔다. 그런데 이 장면이 참 이상하다. 신명기 13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없애야 할 것이 우상숭배다. 그런데 지금 이 성읍 사람들은 우상을 없앤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완전히 거꾸로다.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이 벌써 여기서부터 보이는 것 같다.

    그때 뜻밖에도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아들을 막아선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겠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바알의 제단을 자기 집에 두고 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급하게 한 말인지, 그 순간 정말 우상의 허망함을 깨달은 것인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 자체는 맞다. 사람이 지켜 줘야 하는 신이라면 도대체 무슨 신인가. 그리고 기드온에게 새 이름이 붙는다. 여룹바알, ‘바알이 그와 다투게 하라’는 뜻이다. 바알의 제단을 허문 일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재미있게도 그 이름 안에 바알이라는 이름이 남는다. 기드온의 이름은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까지 하루아침에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의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삿 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미디안이 다시 올라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다. 곡식이 자랄 때마다 올라오던 그 사람들이 또 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한다. 여기 ‘임하시니’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바쉬의 기본 뜻은 ‘옷을 입다’이다. 그런데 문장의 주어를 보면 기드온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입으셨다'는 말에 가깝다. 즉 기드온이 하나님의 영을 자기 능력처럼 소유한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붙드시고 그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사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순서도 중요하다. 기드온이 먼저 용기를 내서 나팔을 불고 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붙드신 뒤에 기드온이 나팔을 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드온을 죽이겠다고 몰려왔던 아비에셀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뒤를 따른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붙드신 뒤에 상황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실 여기까지 기드온이 받은 것을 한번 세어 보면 꽤 많다. 여호와의 사자를 직접 만났다. 바위에서 불이 나오는 것도 보았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제단을 쌓았다.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도 죽지 않았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붙드셨다. 군대까지 모였다. 이 정도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양털 이야기가 나온다.

    삿 6:36–37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기드온은 양털을 놓는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계속 걸리는 말이 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한 절 안에 두 번 나온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질문은 “제가 가야 합니까?”가 아니다. 그는 이미 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셨다는 것도 알고, 자기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게 하실 것인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양털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이미 들은 말씀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묻는 것이 아니다. 아는 사람이 또 묻는 것이다.

    삿 6: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리고 한 번 더 구한다. '이번만.' 이 말이 참 사람답다. 기드온도 자기 요구가 지나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먼저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번 다 들어 주신다. 첫날에는 양털만 젖게 하시고, 다음 날에는 양털만 마르게 하신다. 왜 또 묻느냐고 책망하셨다는 말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방법을 좋은 믿음의 방법이라고 인정하셨다고 볼 수는 없다. 기드온에게는 이미 말씀이 충분히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흔들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의 표징을 본 뒤에도 기드온의 두려움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다음 장에 가면 삼백 명만 남은 상황에서 기드온은 또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때가 더 놀랍다. 이번에는 기드온이 먼저 표징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다.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그리고 적진에서 들을 꿈 이야기까지 미리 준비해 놓으신다(7:10–14). 6장에서는 기드온이 표징을 구했다. 7장에서는 하나님이 기드온이 구하기도 전에 먼저 준비하신다.

    나는 이 차이가 참 좋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 계속 요구하면 계속 보여 주신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때로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를 붙드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새벽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39절의 '이번만'이라는 말을 묵상한다. 나도 하나님께 이런 말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이것만 확인되면 움직이겠습니다. 이 일만 풀리면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이번만 좀 분명히 보여 주시면 믿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이번만'이라고 했던 일이 하나가 아니었다. 기드온도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라고 자기 입으로 두 번이나 말하면서도 다시 확인을 구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다시 확인을 한다. 나 역시 그렇다. 혹시나 하고 양털을 깔고 있다. 그런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응답해 주시길 바라면서... 그런데 그 양털을 깔고 있는 내가 오늘 묵상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그 말씀을 먼저 붙들고 싶다. 그래서 지나온 길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금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標題:僅此一次

    昨天的經文中,基甸築了一座名為「耶和華沙龍」的祭壇。然而神並沒有因這一句告白就此放過。今天的經文裡,神又給了基甸另一個祭壇的故事。這一次,有一座祭壇必須先被拆毀,就是他父親家中巴力的祭壇;並且要在那個地方重新築一座獻給耶和華的祭壇。因此宋炳鉉教授將基甸故事的核心,以這兩座祭壇的敘事來串連起來閱讀。如果說第一座祭壇是基甸的告白,那麼第二座祭壇就是這告白轉化為實際順服的地方。昨天基甸求神給他證據,今天神卻對基甸說:現在該你行動了。

    士 6:25 當那夜,耶和華吩咐基甸說:「你取你父親的牛,就是那七歲的第二隻牛,並拆毀你父親為巴力所築的壇,砍下壇旁的木偶。

    基甸在出去拯救以色列之前,有一件事必須先做,就是除去自己家中的偶像。從正典角度來看,這也讓人聯想到摩西在開始公開的使命之前,必須先面對自己家中的立約問題(出埃及記 4:24–26)。在去拯救別人之前,先要把自己的家立正。這裡「七歲的第二隻牛」這句話,希伯來文原文本身有些難解,關於確切意思有多種見解。不過牛七歲這一點,與米甸七年的欺壓奇妙地重疊。而根據第26節,巴力祭壇旁的亞舍拉木偶被砍下,用作獻燔祭的柴。迦南敬拜的象徵物,成了獻給耶和華之祭的柴薪。這不僅止於除去偶像,那個地方本身也被轉變為敬拜耶和華的場所。

    士 6:27 於是基甸從他的僕人中挑了十個人,照耶和華對他所說的行了;他因怕父家和本城的人,不敢在白日行這事,就在夜間行了。

    讀這一節經文,就能清楚看見基甸這個人的樣貌。基甸照著神的話去做了,可是他因害怕而在夜間行事。他已經親眼見過神的顯現,也親眼看見從磐石中冒出的火,也聽見了「我必與你同在」的話語。他甚至築了祭壇,還為它取名叫「耶和華沙龍」。然而,他仍然懼怕人。是的,遇見神,並不代表對人的懼怕會在一夜之間消失。正因如此,我反而更被他接下來的行動所觸動。是的,基甸還是做了。雖然不敢在白天做,但他在夜裡做了。基甸並不是等到懼怕完全消失之後才順服的人,他是在懼怕之中仍然順服。

    第二天早晨,全城都轟動了。可是這一幕實在奇怪。申命記13章告訴我們,以色列人應當除去的正是拜偶像的事。然而現在這城裡的人,卻要殺害那除掉偶像的人。完全顛倒過來了。士師記末尾那句「各人任意而行」,似乎在這裡就已初露端倪。

    就在此時,出乎意料地,基甸的父親約阿施出面阻止眾人:「你們是為巴力爭論嗎?你們要拯救他嗎?」這話竟出自一個把巴力祭壇留在自己家中的人之口。這是為了救兒子而急中生智說出的話,還是他當下真的領悟到偶像的虛妄,經文並未說明。但這話本身確實有道理——若一位神需要人來保護他,那還算什麼神呢?於是基甸得了一個新名字:耶路巴力,意思是「讓巴力與他爭論吧」。這名字是因拆毀巴力祭壇一事而來,有趣的是,這名字中仍留有「巴力」二字。基甸的名字改變了,但這個人並沒有在一夜之間完全改變。他心中的懼怕依然存在。

    士 6:34 耶和華的靈降在基甅身上,他就吹角,亞比以謝族都聚集跟隨他。

    米甸人再次上來,在耶斯列平原安營。那些每逢莊稼成熟就上來的人,又來了。然而這一次不同了:耶和華的靈降臨在基甅身上。這裡翻譯為「降臨」的希伯來文「拉巴什」,本義是「披上、穿上」。然而觀察這句話的主詞,主詞並非基甅,而是耶和華的靈。若照字面直譯,更接近「耶和華的靈披上了基甅」。也就是說,並非基甅將神的靈當作自己的能力而擁有,而是耶和華的靈親自抓住了基甅,並使用他來成就神的拯救工作。順序也很重要:並非基甅先鼓起勇氣吹角,然後神的靈才降臨;而是耶和華的靈先抓住他,然後基甅才吹角。而不久前還聚眾要殺基甅的亞比以謝族人,現在卻跟隨在他身後。神先抓住了基甅,情勢才開始轉動。

    其實仔細數算到目前為止基甅所得到的,其實已經相當多了:他親自遇見了耶和華的使者;看見磐石中冒出火焰;聽見「我必與你同在」的應許;築了祭壇;拆毀巴力的祭壇卻沒有死;耶和華的靈抓住了他;甚至軍隊都聚集起來了。照理說,這應該已經足夠了。可是緊接著,卻出現了羊毛的故事。

    士 6:36–37 基甅對神說:「你若果照著所說的話,藉我手拯救以色列人,37 我就把一團羊毛放在禾場上:若單是羊毛上有露水,別的地方都是乾的,我就知道你必照著所說的話,藉我手拯救以色列人了。」

    基甅放下了羊毛。可是讀這段經文,有一句話一直讓人在意——「你若果照著所說的話」。這句話在同一節裡出現了兩次。也就是說,基甅的問題並不是「我該去嗎?」他其實早已知道。他知道神差遣了他,也知道神已應許要藉著他的手拯救以色列。問題不在於不知道神的旨意,而在於他想再一次確認:神真的會這樣做嗎?由此可知,基甅的羊毛,並不是為了尋求神旨意的方法,而是為了再次確認已經聽過的話語。這不是不知道的人在發問,而是知道的人再次發問。

    士 6:39 基甅又對神說:「求你不要向我發怒,我再說這一次:讓我用羊毛再試一次。這回求你使羊毛是乾的,別的地方都有露水。」

    於是他又再求一次——「這一次」。這句話讓人覺得非常真實、有人性。基甅自己似乎也多少察覺到自己的要求過分了,所以他先說「求你不要向我發怒」。然而神兩次都應允了他。第一天,讓羊毛濕潤;第二天,讓羊毛乾燥。經文中並沒有說神責備他為何又問。但這也不能理解為神肯定了基甅這種求證的方式是良好的信心方法。基甅已經被賜下了足夠的話語,然而神仍然接納了這個仍在動搖的人。而即使在看見兩次神蹟之後,基甅心中的懼怕也並未完全消失。到了下一章,只剩下三百人的處境中,基甅仍然感到懼怕。

    然而,那時發生的事更令人驚訝。這一次,基甅並沒有先開口求證據,而是神主動先說話:「你若怕下去……」神甚至事先為他預備好了要在敵營中聽見的那個夢的故事(士 7:10–14)。第6章中,是基甅主動求證據;第7章中,卻是神在基甅開口之前,就已經預備好了一切。

    我很喜歡這其中的差異。這段故事想要說的,似乎不是「只要不斷向神要求,神就會不斷顯現證據」。反倒是,神比我更清楚我有多麼軟弱,有時候,甚至在我開口之前,祂就已經先抓住了我。因此,今天清晨讀這段經文時,我默想著第39節裡「這一次」這句話。因為我自己也常常對神說這樣的話——不,其實現在也正在說。「只要這件事得到確認,我就行動。」「只要這件事解決了,我就不再多問。」「這一次求祢清楚顯明給我看,我就相信而前行。」然而靜靜回想,我曾說過「這一次」的事,並不只有一次。基甅其實也並非不知道神的旨意,他親口兩次說「你若果照著所說的話」,卻仍然再次求證。這不是因為不知道,而是明知卻仍感到不安。於是抱著「萬一」的心理再次確認。我也是如此,抱著「萬一」的心情鋪著羊毛,盼望神憐憫這樣的我並回應我……然而,鋪著羊毛的我,在今天的默想中,反倒願意先緊緊抓住神已經說過的那句話。願我能記念過往路途中神所顯明的那份恩典,再次邁出一步向前行,如此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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