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고린도전서 12:12-31
今日默想:哥林多前書 12:12-31
제목 : 몸은 위계가 아니다
고대 로마에서 평민들이 귀족에게 봉기했을 때,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라는 사람이 '몸'의 비유로 그들을 주저앉혔다. 손과 발이 위장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다 같이 굶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요지는 분명하다. "각자 자기 자리를 지켜라.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먹여 살려라." 즉 신분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바울은 바로 그 시대에 이 익숙한 '몸' 비유를 가져온다. 그런데 그 비유가 이야기하는 것을 뒤집는다. 메네니우스의 비유가 "약한 지체는 강한 지체를 위해 봉사하라"였다면, 바울은 정반대로 말한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덜 귀해 보이는 지체에 더 큰 존귀를 입힌다고(22-24절) 이야기한다. 이 반전을 놓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친다.
바울은 두 방향의 잘못을 다 짚는다. 먼저 열등감이다.
고전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한 지체가 스스로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고 해서 진짜 몸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화려한 은사가 없는 지체가 "나는 쓸모없다, 나는 진짜 일원이 아니다"라고 느끼는 그 감정 — 바울은 그 감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결론이 틀렸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 소속은 내 기분이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향이 바뀐다. 이번엔 교만이다.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이게 고린도 교회 잘나가는 이들의 실제 태도였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정면으로 막아선다. 그럴 수 없다고. 오히려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하고, 하나님이 친히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셨다고 말한다(24절).
고전 12:24-25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서로를 돌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울은 직분을 열거한다. 그런데 순서가 묘하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28절). 처음 셋에만 서수를 붙이고, 그 뒤로는 그냥 나열한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가장 떠받들던 방언이 목록의 맨 끝에 온다.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장 우러러보던 은사를 바울은 슬며시 맨 뒤로 돌려놓는다. 그래, 너희가 매기는 서열과 하나님이 보시는 자리는 다르다는 것이다. 다만 각자 주신 은사의 목적은 어제 묵상한 것처럼 은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 것(고전 12:11)은 바로 공동체를 온전히 세우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된다.
현대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오늘 본문을 가장 깊게 묵상하고 바로 적용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목사, 장로일 것이다. 특히 목사인 나는 강단에 서는 사람이다. 말씀을 전하고, 공동체를 이끄는 자리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나도 모르게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는 눈의 자리에 앉아 있기 가장 쉬운 자리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이름도 잘 불리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공동체를 떠받치는 지체들 — 나는 그들을 정말 귀하게 여겨 왔는가, 아니면 그저 '있어 줘서 고맙다' 정도로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언어가 서툴러서, 신앙 연륜이 짧아서, 가진 것이 없어서 스스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이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원하시는 대로' 이 몸에 두셨는데, 내가 그 자리를 우연으로, 혹은 부족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베네니우스의 비유처럼 자기를 먹여 살리라고 사지에게 요구하는 위장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항상 내 모습을 낮추고, 가장 보이지 않는 지체부터 먼저 살피는 섬김의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題目:身體不是階級制度
在古羅馬,當平民向貴族起義時,一位名叫梅涅尼烏斯·阿格里帕的人用「身體」的比喻平息了他們。故事說的是手和腳向胃發動叛亂,最終導致所有人一同餓死。寓意十分清楚:「各守本分,弱者當供養強者。」換言之,這是一套用來正當化身分階級的邏輯。
保羅正是在那個時代,借用了這個人們耳熟能詳的「身體」比喻。然而,他卻將這比喻所傳遞的信息徹底翻轉。梅涅尼烏斯的比喻是「軟弱的肢體當服事強壯的肢體」,保羅卻反其道而行。他說,看似軟弱的肢體反而更加不可缺少,看似不尊貴的肢體反而得著更大的尊榮(22-24節)。若錯過了這個翻轉,就錯過了本段經文的核心。
保羅指出了兩個方向的錯誤。首先是自卑感。
哥林多前書 12:15 設若腳說:「我不是手,所以不屬乎身子」,它不能因此就不屬乎身子。
一個肢體說自己不屬於身體,並不會因此真的與身體分離。沒有顯赫恩賜的肢體感到「我毫無用處,我不算真正的一份子」——保羅並非說這種感受是錯的,他只是斷然指出,由此得出的結論是錯的。因為一個人的歸屬,並非由自己的感受來決定。
接著,方向轉換,這次是驕傲。
哥林多前書 12:21 眼不能對手說:「我用不著你」;頭也不能對腳說:「我用不著你」。
這正是哥林多教會中那些自以為了不起之人的真實態度。保羅正面攔阻他們,說:不可以這樣。他反而指出,看似軟弱的肢體更加不可缺少,神親自將更大的尊榮加給那些不體面的肢體(24節)。
哥林多前書 12:24-25 我們俊美的肢體自然用不著裝飾;但神配搭這身子,把加倍的體面給那有缺欠的肢體,25 免得身上分門別類,總要肢體彼此相顧。
原因是什麼?正是為了要使肢體彼此相顧。因此,保羅在最後列舉了各樣職分。然而順序耐人尋味:「第一是使徒,第二是先知,第三是教師」(28節)。只有前三項加了序數,之後的就直接並列。而哥林多教會最為推崇的方言,卻排在名單的最末位。這絕非偶然。保羅悄悄將人們最仰慕的恩賜移至最後。這正是在說:你們所定的排名,與神所看見的位置,是截然不同的。但無論如何,各樣恩賜的目的——正如昨日默想所思考的——神照著自己的意思分給各人(哥林多前書 12:11),是為了要完整地建立群體。這一點不可忘記。
在現代教會群體中,最需要深深默想今日經文並立即付諸實踐的人,當屬牧師與長老。尤其是身為牧師的我,是站在講台上的人,是傳講話語、帶領群體的人。然而,正是這個位置,最容易在不知不覺中坐上了「我用不著你」那隻眼睛的位子。因此,我必須省察:是否曾將某人的服事視為理所當然?在群體中,那些默默在不被提及的角落撐起整個群體的肢體——我是否真心珍視他們,還是只是以「謝謝你在這裡」一語帶過?那些因語言不流利、信仰資歷尚淺、或一無所有而悄悄退後一步的人……神照著祂自己的意思將他們安置在這個身體裡,我是否曾將他們的位置只看作偶然,或僅僅視為一種不足?這是我必須不斷省察的事。正因如此,我不應成為那個像梅涅尼烏斯比喻中的胃,要求四肢供養自己的人。因此,我今日也禱告,願自己時刻謙卑,從那些最不被看見的肢體開始,活出優先顧念他人的服事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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