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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창세기 50:15-26

    今日默想:創世記 50:15-26

    Kyoung Woo Han··조회 17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그러자 형들의 마음에 다시 두려움이 올라온다. 그래, 그동안 요셉이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버지가 살아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요셉이 묵은 원한을 갚으려 하지 않을까? 그래서 형들은 사람을 보내 아버지의 유언을 빌어 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라고. 심지어 직접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려 종이 되겠다고까지 한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형들은 이십 년이 더 지나도록 그날의 죄에서 한 번도 풀려나지 못했다. 일찍이 애굽의 관리 앞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래. 형들은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구덩이에 던진 그 손, 그 애원을 외면한 그 귀를 잊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이처럼 형들의 회개는 한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그들 안에 살아 있었다.

    이제 요셉의 대답을 보자. 요셉은 형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괜찮다, 별일 아니었다"며 그 일을 덮어버리지도 않는다. 요셉은 분명히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했다고. 그 일이 악이었다고. 그래, 일어난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위에 한 분을 올려놓는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기서 우리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자리에는 형들의 회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회개가 있는 곳에 용서가 있다.

    얼마 전 쫑닝 형제가 댓글로 던진 진지한 질문에 답하면서 나눈 이야기가, 오늘 이 본문과 그대로 연결된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마음속의 후회나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자기 선언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피해자 앞에 서는 일, 용서를 구하는 일, 그리고 가능한 한의 회복이 따른다. 삭개오가 그러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가 피해자에 대한 회복을 입에 올린 바로 그때, 예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다(눅 19:9). 댓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영화 '밀양'이 우리 마음을 무너뜨리는 자리도 바로 여기다. 그 가해자는 피해자인 어머니 앞에 서서 죄를 직면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채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기 위로다. 그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착각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달랐다. 그들은 동생 앞에, 곧 피해자 앞에 직접 엎드렸다. 그 자리가 있었기에 용서가 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억울했던 자리가 몇 번 있었다. 큰 일을 감당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뎠던 자리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때 당한 일들을 이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공격하고 힘들게 했던 이들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들 역시 자기가 옳았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 내 입장에서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았고, 결과도 하나님이 이토록 아름답게 인도하셨다. 그럼에도 진정한 용서에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요셉의 자리에서 다시 배운다.

    그렇게 창세기는 한 사람의 용서로 막을 내린다. 요셉은 죽으면서도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자기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 유언한다. 끝까지 하나님의 큰 그림을 신뢰한 것이다. 나도 오늘, 풀리지 않은 그 자리를 내 손에 쥐고 곱씹기보다 그 판단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린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가해자였던 자리는 없는지 정직하게 돌아보며, 참된 회개와 화해를 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나아간다.

    中文 AI翻譯

    父親雅各去世了。哥哥們的心中隨即再度湧起恐懼。是啊,約瑟這段時日看似寬恕了我們,但那是不是因為父親還在世的緣故?如今父親不在了,約瑟會不會要報那積壓已久的舊怨?於是哥哥們差人帶話,借父親的遺言來求告:求你饒恕我們的過犯。他們甚至親自前來,俯伏在約瑟面前,說願意做他的僕人。

    然而這份恐懼並非一朝一夕而來。二十多年過去了,哥哥們從未從那天的罪中得到絲毫解脫。早年在埃及官員面前陷入困境時,他們彼此說道:

    創 42:21 他們彼此說:「我們在兄弟身上實在有罪了。他哀求我們的時候,我們見他心裡的愁苦,卻不肯聽,所以這場苦難臨到我們身上。」

    是的,哥哥們一直活在悔恨之中。那雙將弟弟拋入坑中的手,那對外面哀求聲充耳不聞的耳朵,始終無法從記憶中抹去。哥哥們的悔改,並非一時片刻的道歉,而是多年來如石頭般壓在心頭的罪咎感,在他們內心深處活生生地存在著。

    如今讓我們來看約瑟的回應。約瑟沒有責備哥哥們,但他也沒有用「沒關係,不是什麼大事」來掩蓋那段往事。約瑟說得清楚明白:你們的確曾想要害我,那件事是惡的。是的,他沒有把已然發生的罪說成不是罪。只是他在那罪之上,高舉了一位。

    創 50:20 從前你們的意思是要害我,但神的意思原是好的,要保全許多人的性命,成就今日的光景。

    這裡有一件事,我們絕對不能錯過——約瑟之所以能夠饒恕哥哥們,是因為那個地方有悔改。有悔改的地方,才有饒恕。

    不久前,宗寧弟兄在留言中提出了一個認真的問題,我在回應那個問題時所分享的內容,與今天這段經文恰恰緊緊相連。聖經所說的悔改,並不是內心的懊悔,也不是「我已經得到神的饒恕了」這樣的自我宣告。真正的悔改,必然包括站到受害者面前、求對方饒恕,以及盡可能地恢復補償。撒該就是如此。

    路 19:8 撒該站著對主說:「主啊,我把所有的一半給窮人;我若訛詐了誰,就還他四倍。」

    就在他開口提及對受害者的賠償補救的那一刻,耶穌說今天救恩來到這家了(路 19:9)。我在留言中也提到過,電影《密陽》之所以令我們的心如此震碎,正是在這一點上。那個加害者從未站到受害者——那位母親——面前直面自己的罪,也從未求她饒恕,卻單方面宣告:「我已經得到神的饒恕了。」那不是悔改,那是自我安慰。是的,這正是我們基督徒最常犯的錯覺。然而約瑟的哥哥們卻不同。他們親自俯伏在弟弟面前,也就是俯伏在受害者面前。正因為有了那個場合,饒恕才得以流淌而出。

    回顧我自己的人生,有幾次真的深感委屈冤枉。在承擔重大事工的那段歲月如此,初來這片土地時也如此。然而如今回望那一切,我要承認那都是神的手所帶領。正因如此,我如今能夠平靜地談起那些曾經歷的事。但這並不代表那些事情什麼都不算。因為那些曾攻擊我、讓我痛苦的人,始終沒有道歉,或許他們至今仍認為自己是對的。我明白。從我的立場而言,我在神面前問心無愧,結果也是神如此美好地引領。即便如此,我在約瑟的位置上再次學到:真正的饒恕,需要悔改。

    就這樣,創世記以一個人的饒恕落下帷幕。約瑟臨終之際,仍然遙望應許之地,留下遺命,要人帶著他的骸骨一同上去。他到最後,仍然信靠神那幅宏大的藍圖。今天,我也選擇不緊握著那些尚未解開的結反覆咀嚼,而是將那審判高舉交在神的手中。同時,我也誠實地省察自己:是否曾在某個地方成為別人的加害者——帶著追求真實悔改與和好的心,今天也在神面前忠誠地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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