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11:29–40
今日默想:士師記 11:29–40
제목 : 입다의 부주의한 서원
어제 우리는 입다가 가장 빛나는 장면을 보았다. 입다는 출애굽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승리를 하나님께 돌렸으며, 마지막에는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판결하시옵소서"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입이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삿 11: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10장에서 하나님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곤고를 보고 마음에 근심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입다에게 영을 부으신다. 이 표현은 첫 사사 옷니엘에게 쓰였던 말과 같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을 시작하신 것이다. 다만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은 사람의 성품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일을 감당할 힘을 주는 것이다. 영이 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판단이 옳다는 보증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입다가 이렇게 말한다.
삿 11:30–31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가 말한 것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자이다. 그 시대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사람을 맞으러 나오는 것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홍해를 건넌 뒤 미리암과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왔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돌아올 때도 여인들이 노래하며 맞았다. 그러니 입다는 적어도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서원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입다는 왜 이런 서원을 했을까. 입다에게는 기드온처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는 약속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입다의 눈에는 하나님이 아직 멀리 계시고 아무것도 보장해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무언가를 걸어서 하나님을 붙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 훗날 모압 왕은 전쟁에서 몰리자 자기 맏아들을 성벽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은 위기 앞에서 가장 귀한 것을 바쳐 신을 움직이려 했다. 입다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호와께 나아가는 방식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분명히 금하셨다.
신 12: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을 알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진다.
삿 11:32–33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전쟁 이야기는 이 두 절이 전부다. 그리고 본문은 승리의 주어를 분명히 밝힌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입다의 서원이 승리를 가져왔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서원에 대해 받겠다고도, 거절하겠다고도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이 승리를 하나님께서 서원을 받으셨다는 표시로 읽으면 안 된다. 승리는 29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런데 입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그의 딸이었다.
삿 11:34–35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원문은 이 딸이 외동이었다는 것을 두 번이나 말한다. 그 외에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그런데 입다의 말을 보라.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서원을 한 사람은 입다인데, 말의 주어는 딸이다. 그리고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을 하겠다고 한 서원을 지키는 것은 신실함이 아니다. 입다가 했어야 할 일은 딸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서원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10장에서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가도 이스라엘의 곤고를 보시고 마음을 돌이키셨다. 그런데 입다는 자기 딸 앞에서 돌이키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을 완고한 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삿 11: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그런데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고, 승리를 여호와께 돌린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친구들과 산에 가서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게 해 달라고 한다. 이 딸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아무 잘못도 없다. 그녀는 다만 아버지를 맞으러 가장 먼저 달려 나온 사람이었다.
삿 11:39–40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어떤 이들은 입다가 딸을 실제로 죽인 것이 아니라 평생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게 한 것이라고 읽는다. 그러나 '서원한 대로 행하니'라는 말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으면, 입다는 서원한 그대로 행한 것이다. 그리고 설령 딸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 서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외아들을 바치려 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그 손을 멈추게 하셨다. 입다에게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본문은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녀를 기억하고 기렸다'는 뜻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기억한 사람은 승리한 사사 입다가 아니라, 끝내 이름도 남기지 못한 그의 딸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입다를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기억하지 않는가. 그렇다. 히브리서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긴 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그들이 한 모든 일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기드온의 에봇이나 삼손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입다의 서원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 입다의 문제는 하나님을 몰랐던 데 있지 않았다. 입다는 여호와의 이름을 알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았으며, 여호와께서 심판자이심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는 주변 민족들에게서 배운 방식 그대로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주변 문화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며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성경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내가 살아온 문화가 만들어 준 하나님인가. 돌아보면 나도 '드린 만큼 받는다'는 셈법 속에서 신앙을 배웠다. 그리고 이 땅에 살면서 사원 앞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다시 갚으러 오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솔직히 그 셈법이 우리 기독요인들의 기도 안에도 들어와 있다. '이번 일만 잘되면 더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조용하시다고 느껴질 때면 더욱 그렇다. 그것은 입다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입다가 무언가를 걸기 전에 이미 영을 부어 일하고 계셨다. 그래 하나님은 거래로 움직여야 하는 분이 아니라, 먼저 은혜로 찾아오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이 떠오른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셈법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지체들... 그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 이해가 조금씩 세상의 방식으로 채워지기 쉽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씀 앞에 다시 선다. 내 방식이 아니라 말씀으로 하나님을 배워 가며,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기도한다. 주님, 우리가 아는 주님이 우리 문화가 만든 신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시는 주님이기를...
標題:耶弗他草率的許願
昨天我們看見了耶弗他最閃耀的一幕。耶弗他準確地知道出埃及的歷史,將勝利歸給神,最後還說出「願審判人的耶和華,今日在以色列人和亞捫人中間判斷是非」這樣的告白。然而在今天的經文裡,同一張口卻說出了截然不同的話。這段故事是從神先動工的場景開始的。
士 11:29 耶和華的靈降在耶弗他身上,他就經過基列和瑪拿西,來到基列的米斯巴,又從米斯巴來到亞捫人那裡。
在第十章,神曾說「必不再拯救你們」。然而看見以色列的困苦,神心裡憂傷,如今將靈澆灌在耶弗他身上。這句話與用在第一位士師俄陀聶身上的表達相同。神其實已經開始施行拯救了。只是在士師記裡,耶和華的靈並非在瞬間改變一個人的品格,而是賜下力量,使人能夠承擔所託付的使命。靈降臨,並不保證那人所有的判斷都是對的。緊接著下一節,耶弗他就說了這樣的話。
士 11:30–31 耶弗他就向耶和華許願,說:「你若將亞捫人交在我手中,31 我從亞捫人那裡平平安安回來的時候,無論什麼人,先從我家門出來迎接我,就必歸你,我也必將他獻上為燔祭。」
耶弗他所說的,是「從我家門出來迎接我」的人。在那個時代,出來迎接打勝仗歸來之人的,不是牲畜,而是人。過紅海之後,米利暗和眾婦女拿著鼓跳舞出來;大衛戰勝歌利亞歸來時,婦女們也是唱歌迎接。由此可知,耶弗他至少是知道可能有人出來迎接的,卻仍然許下了這個願。
那麼耶弗他為何許下這樣的願呢?耶弗他沒有像基甸那樣,聽見「我已將他們交在你手中」這樣的應許之言。在耶弗他眼中,神似乎仍然遙遠,沒有給出任何保證。於是耶弗他不願等候神,而是想用某種代價來抓住神。然而這樣的方式,他是從哪裡學來的呢?後來摩押王在戰爭中被逼到絕境時,曾將自己的長子在城牆上獻為燔祭。以色列周圍的民族,在危機面前,總想藉著獻上最寶貴的東西來驅動他們的神明。耶弗他雖然呼求耶和華的名,他親近耶和華的方式,卻是從迦南人那裡學來的。這樣的情形在聖經裡屢見不鮮。然而神明明禁止了這樣的祭祀。
申 12:31 你不可向耶和華你的神這樣行,因為他們向他們的神,行了耶和華所憎嫌所恨惡的一切事,甚至將自己的兒女用火焚燒,獻與他們的神。
然而他並不知道這句話。因為那時人們無法好好地學習神的話語。因此那是一個人人任意而行、各行己意的時代。
於是戰爭爆發了。
士 11:32–33 於是耶弗他往亞捫人那裡去,與他們爭戰;耶和華將他們交在他手中,33 他就從亞羅珥到米匿,直到亞備勒基拉明,攻取了二十座城,大大殺敗他們。這樣亞捫人就被以色列人制伏了。
關於戰爭的敘述,僅僅這兩節而已。而經文清楚地指明了勝利的主詞:「耶和華將他們交在他手中。」並沒有說是耶弗他的許願帶來了勝利。神對那個許願,既沒有說要接受,也沒有說要拒絕,一句話都沒有說。因此,不能把這場勝利解讀為神悅納了那個許願的記號。勝利,是從第29節就已經開始的神的作為。然而當耶弗他回到家中時,開門出來的人,竟是他的女兒。
士 11:34–35 耶弗他來到米斯巴,到了自己的家,不料,他女兒拿著鼓跳舞出來迎接他,是他獨生的,此外無兒無女。35 耶弗他看見她,就撕裂衣服,說:「哀哉!我的女兒啊,你使我甚是愁苦,叫我作難了;因為我已經向耶和華開口許願,不能挽回。」
原文兩次強調這個女兒是獨生女。此外再無兒無女。然而請看耶弗他所說的話:「你使我甚是愁苦。」許願的人明明是耶弗他,話語的主詞卻成了女兒。他還說「不能挽回」。然而,信守一個神所禁止之事的許願,並不是信實。耶弗他當做的,不是獻上女兒,而是將這個錯誤的許願放在神面前,悔改認錯。試想,神在第十章曾說不再拯救,卻因看見以色列的困苦而回心轉意。然而耶弗他在自己女兒面前,卻無法回心轉意。這正顯明他錯誤地把神想像成一位頑固不通融的神。
士 11:36 他女兒回答說:「父啊,你既向耶和華開口,就當照你口中所說的向我行,因耶和華已經在你的仇敵亞捫人身上為你報仇。」
然而女兒並沒有埋怨父親。她稱他「父啊」,並將勝利歸給耶和華。她只求與朋友們上山兩個月,為自己終身未嫁而哀哭。這個女兒犯了什麼過錯呢?她毫無過錯。她只不過是那個最先跑出來迎接父親的人。
士 11:39–40 兩月已滿,她回到父親那裡,父親就照所許的願向她行了。女兒終身沒有親近男子。這就成了以色列中的一個常例,40 以色列的女子年年去為基列人耶弗他的女兒哀哭四天。
有人解讀說,耶弗他並沒有真的把女兒殺了,而是讓她終身不嫁、獻給神。然而按最自然的解讀,「照所許的願向她行了」這句話,意味著耶弗他確實照所許的願行了。而且即使女兒真是終身守獨身,那個許願本身是錯誤的這一事實,並不會因此改變。亞伯拉罕也曾要獻上自己的獨生子。然而那時是神先開口說話,也是神親自止住了他的手。至於耶弗他,神從未向他提出過這樣的要求。而經文說,以色列的女子年年為耶弗他的女兒哀哭四天。這句話也含有「記念她、紀念她」的意思。以色列所記念的,不是打了勝仗的士師耶弗他,而是那位終究連名字都沒有留下的女兒。
然而希伯來書豈不是將耶弗他列在信心偉人之中記念嗎?是的。希伯來書記念基甸、巴拉、參孫、耶弗他因著信,制伏了敵國。但這並不代表他們所做的每一件事都被肯定。正如並不認同基甸的以弗得,也不認同參孫的失敗一樣,同樣也不是認同耶弗他的許願。耶弗他的問題,並不在於不認識神。耶弗他認識耶和華的名,知道以色列的歷史,也知道耶和華是施行審判的那一位。然而他親近神的方式,卻完全是從周圍民族那裡學來的。認識神的知識裡,已經滲入了周遭的文化。
默想今天這段經文,我不禁反問自己:我所認識的神,是聖經所啟示的神,還是我所生長的文化所塑造出來的神?回想起來,我自己也曾在「獻多少就得多少」這樣的算計裡學習信仰。生活在這片土地上,每當經過廟宇前,總能看見人們許願,願望實現後又再來還願的情景。然而說實話,這種算計方式,也悄悄滲入了我們基督徒的禱告之中。「這件事若能順利,我就更加委身。」尤其在感覺神沉默不語的時候更是如此。這與耶弗他的禱告並無二致。然而今天的經文清楚地告訴我們:在耶弗他還沒有拿什麼作賭注之前,神早已將靈澆灌下來,親自動工了。所以,神並不是一位需要用交易才能打動的神,而是一位先以恩典臨到我們的神。想到這裡,我心中浮現出我們群體中弟兄姊妹的臉孔……在各自的生活處境中,被世界的算計方式所包圍的肢體們……我知道,我們對神的認識,很容易一點一點地被世俗的方式所填滿。因此,今天我再次站立在話語面前。不是憑著自己的方式,而是藉著聖言重新認識神,並信靠這樣的神而活。我禱告:主啊,願我們所認識的主,不是我們的文化所塑造出來的神,而是聖經所見證的那位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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