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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이사야 1:1–20

    今日默想:以賽亞書 1:1–20

    Kyoung Woo Han··조회 53

    제목 : 하나님이 보시는 손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의 그림자가 팔레스타인 전체를 덮어 오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예언자다. 그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네 왕의 시대를 관통하며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가 즐겨 부른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다. 이 칭호는 이사야서 전체에 스물다섯 번 남짓 울려 퍼지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 된 백성이라는 이 책의 긴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어 준다. 그리고 이 책은 심판과 구원, 남은 자와 시온, 장차 오실 왕이라는 큰 주제들을 품고 있는데, 그 모든 주제가 오늘 우리가 읽는 1장 안에 이미 씨앗처럼 심겨 있다.

    그래서 이사야 1장은 흔히 책 전체의 '서곡'이라 불린다(이사야의 신탁은 대부분이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노래 가사처럼 비유가 풍부하고 반복과 대조가 많이 등장한다.). 한 편의 교향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앞으로 전개될 선율들을 짧게 미리 들려주듯, 이 한 장이 이사야서 예순여섯 장의 주제를 압축해 놓았다. 그런데 그 서곡의 첫 음이 탄식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식을 기른 아버지로 소개하시는데, 그 자식이 아버지를 거역했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도 자기 주인을 안다. 나귀도 저를 먹이는 구유를 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를 지으시고 기르신 하나님을 모른다. 짐승도 아는 것을 언약 백성이 모른다는 이 아이러니, 바로 이것이 이사야서에 흐르는 모든 심판 신탁의 정서적 뿌리다. 그렇기에 이사야의 심판은 차가운 법의 집행이 아니다. 그것은 배신당한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에서 터져 나온다. 그래서 이 책은 무섭기에 앞서 아프다.

    그런 까닭에 2절은 법정을 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언약 소송의 정식 절차다. 모세가 신명기 32장에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렀던 그 형식을, 이사야가 그대로 가져온다. 하나님은 지금 자기 백성을 증인들 앞에 세우고 고발하신다. 죄목은 반역이다. 그런데 이 고발자는 재판장이기 이전에 아버지다. 그래서 이 소송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프게 진행된다.

    고발의 내용을 이어 가는 4절부터 9절은 그 백성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멸시했다. 그 결과 온 나라가 병든 몸처럼 되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는 싸매지도 기름 바르지도 못한 채 곪아 간다. 국토는 불탔고, 딸 시온만이 포위된 성읍처럼 홀로 남았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초토화의 풍경을 주전 701년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이 남긴 상흔으로 본다. 유다 전역이 짓밟히고 예루살렘만 겨우 살아남은 그 절망 가운데서,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기신다. 이 남은 자라는 한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이 단어가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할 소망의 첫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고발이 가장 아픈 지점으로 향한다. 놀랍게도 그 지점은 백성이 가장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던 자리, 곧 예배의 자리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수한 제물과 번제와 기름과 피를 더 이상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분향도, 월삭과 안식일과 성회도, 절기도 다 무거운 짐이 되었다고 하신다. 심지어 그들이 손을 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은 눈을 가리고 듣지 않으신다. 왜 그러시는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사실 문제는 제사 즉 예배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제사를 드리는 손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펼친 바로 그 손에 피가 가득했다. 예배당 안에서 경건하게 들어 올린 그 손이, 예배당 밖에서는 약한 자를 짓밟고 피 흘리게 한 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손을 씻으라 명하신다. 그리고 그 씻음의 뜻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려 주신다.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우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예배와 삶은 결코 나뉠 수 없다. 손을 들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손으로 이웃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함께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보시는 손은 많은 예물을 들고 온 손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긴 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서곡은 피 묻은 손을 그토록 아프게 고발하신 하나님이, 그 고발 끝에 문을 닫아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죄인들을 초청하신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주홍 같은 죄가 눈처럼 희어진다. 진홍 같은 것이 양털처럼 희게 된다. 그런데 그 희어짐의 주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씻으라' 명하셨지만, 정작 주홍을 눈처럼 희게 만드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나의 씻음이 나의 정결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희어질 것이요'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 은혜의 초청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인다.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고,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진다. 이것이 이사야서 전체가 우리 앞에 던지는 질문이다. 너는 어느 길을 걷겠느냐.

    이 이사야의 서곡을 묵상하면서 나의 삶을 돌아본다. 주일마다 나는 회중 앞에서 손을 들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배의 현장에서 들어 올린 나의 손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이 한 주간 무엇을 했는지를 보신다. 그렇기에 나의 예배가 아름다운 것은 손을 얼마나 높이 들었느냐에 있지 않고, 그 손이 예배당 밖에서 누구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말씀 앞에 부끄럽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과 주일에는 함께 손을 들어 찬양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각자 삶의 자리로 흩어지는 지체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예배하는 손과 살아가는 손이 자꾸 어긋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나뉜 손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손이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시길 원하시기에 우리를 향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변론하자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의 들어 올린 손과 살아가는 손이 같은 손이 되기를 기도하며, 그 손으로 부족하지만 내 곁의 이웃을 섬기며 나아간다.

    中文 AI翻譯

    題目:神所看的手

    以賽亞是主前八世紀的先知,活躍於耶路撒冷。那是亞述這個龐大帝國的陰影籠罩整個巴勒斯坦的年代。他橫跨烏西雅、約坦、亞哈斯與希西家四位君王的時代,向猶大與耶路撒冷傳達神的話語。他最喜歡使用的神的名號,是「以色列的聖者」。這個稱謂在以賽亞書全書中迴響了約二十五次,從頭到尾緊扣著這卷書的核心張力——罪人之民站立在聖潔之神面前。這卷書涵蓋了審判與救恩、餘民與錫安、將要來臨之君王等重大主題,而所有這些主題,早已如種子般種植在我們今日所讀的第一章之中。

    因此,以賽亞書第一章常被稱為全書的「序曲」(以賽亞的神諭大多以詩歌形式呈現,因此比喻豐富,反覆與對比手法屢見不鮮,讀來如同歌詞一般)。如同一首交響樂在正式展開之前,短暫預示即將呈現的旋律,這一章便將以賽亞書六十六章的主題濃縮於其中。然而,這序曲的第一個音符,是嘆息。神以養育兒女的父親自稱,而那兒女卻悖逆了父親。

    賽 1:3 牛認識主人,驢認識主人的槽;以色列卻不認識,我的民卻不留意。

    連牛都認識自己的主人,連驢都知道餵養牠的槽。然而神的子民,卻不認識那創造並養育自己的神。連牲畜都知道的事,立約的百姓卻不知道——這份弔詭,正是流貫以賽亞書所有審判神諭的情感根源。因此,以賽亞的審判並非冷酷的法律執行,而是從一位遭背叛的父親那撕裂的心中迸發而出的。所以這卷書在令人敬畏之前,先令人心痛。

    正因如此,第二節以開啟法庭的場景作為起始:「諸天哪,當聽!大地啊,側耳而聽!」這不只是修辭,而是立約訴訟的正式程序。摩西在申命記三十二章呼召天地為見證的那種形式,以賽亞在此原樣引用。神如今將祂的子民立於見證人面前加以控告,罪名是背叛。然而這位控告者,在成為審判官之前,首先是一位父親。因此這場訴訟,從始至終都帶著深切的痛苦。

    第四節至第九節延續控告的內容,赤裸裸地揭露那百姓的真實狀況。他們離棄了耶和華,藐視了以色列的聖者。其結果是,整個國家如同病入膏肓的身體——從腳掌到頭頂,沒有一處完好,傷口未經包裹,也未曾塗抹油膏,任其潰爛。地土被焚燒,只剩女兒錫安孤立,如同被圍困的城邑。許多注釋學者認為,這片焦土的景象,是主前七〇一年亞述王西拿基立入侵所留下的創傷——猶大全境遭受蹂躪,唯有耶路撒冷勉強倖存。然而,就在那絕望之中,神仍留下了「餘民」。這個詞必須銘記於心,因為它是貫穿以賽亞書全書之盼望的第一粒種子。

    如今,神的控告指向最為刺痛的核心。令人震驚的是,那個核心,正是百姓在宗教上最為熱忱的地方——敬拜的場所。神說,祂不再喜悅他們無數的祭物、燔祭、油脂與血。祂說,燒香、月朔、安息日、聖會、節期,都成了祂的重擔。甚至當他們舉手禱告之時,神也掩面不聽。為何如此?理由如下:

    賽 1:15 你們舉手禱告,我必遮眼不看;就是你們多多地禱告,我也不聽。你們的手都滿了殺人流血的罪。

    問題其實不在於祭祀本身,也就是敬拜本身。問題在於獻上那祭祀的手。那向神伸展的手,滿是鮮血。在聖殿內虔敬舉起的那雙手,在聖殿外卻是踐踏弱者、使人流血的手。因此,神命令他們洗手。並隨即指明那「洗淨」的含義:除去惡行,學習行善,尋求公平,解救受欺壓的人,為孤兒伸冤,為寡婦辯護。是的,敬拜與生活絕不能分割。因為對於舉手敬拜神的人,神同時也察看那雙手在一週之中如何對待鄰舍。因此,神所看的手,不是帶著豐厚禮物前來的手,而是以愛心事奉鄰舍的手。

    然而在這序曲之中,那位如此沉痛地控告血污之手的神,並沒有在控告結束後關閉大門。祂反而邀請罪人前來。這份恩典,不可忘記。

    賽 1:18 耶和華說:你們來,我們彼此辯論。你們的罪雖像硃紅,必變成雪白;雖紅如丹顏,必白如羊毛。

    如硃紅般的罪,要變得雪白。如丹顏般的,要白如羊毛。然而,不可錯過那「變白」的主詞。第十六節神命令「自我洗滌」,然而真正使硃紅變為雪白的,不是我,而是神。因此,不是我的洗滌成就了我的潔淨,而是神宣告「必變成雪白」。在這恩典的邀請面前,擺著兩條路:甘心順從,便得享地上的美物;拒絕悖逆,便被刀劍吞滅。這正是以賽亞書全書向我們拋出的問題:你要走哪條路?

    默想這以賽亞的序曲,我回顧自己的生命。每逢主日,我在會眾面前舉手敬拜神。然而神在那敬拜的現場,所看的不是那舉起的手本身,而是那雙手在整個一週中做了什麼。因此,我的敬拜是否蒙神悅納,不在於手舉得多高,而在於那雙手在敬拜堂外如何對待他人。站在這話語面前,我感到慚愧。我想到我們群體的肢體們——主日一同舉手讚美,卻在週一到週六各自散入生活的崗位。或許他們和我一樣,也感受到敬拜之手與生活之手不斷錯位的張力。然而要記住的是:神不是厭惡我們那分裂的兩手,而是渴望那兩手合而為一。正因祂願意如此塑造我們,祂才呼召我們到祂面前來,說:讓我們彼此辯論。因此,今天,我帶著禱告——願我與群體肢體們舉起的手,與活出的手,成為同一雙手——雖然不足,仍要以那雙手去事奉身旁的鄰舍,繼續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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