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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사사기 3:1–11

    今日默想:士師記 3:1–11

    한경우··조회 57

    섬기다, 섬기다

    오늘 본문에서 사사기의 서론이 끝나고 본론이 시작된다. 김지찬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서곡이 끝나고 첫 악장의 첫 음이 울리는 자리다. 1–6절은 둘째 서곡의 마지막 문단이고, 7–11절은 첫 사사 옷니엘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첫 음은 앞으로 반복될 순환의 표준형이다. 저자는 옷니엘 이야기에서 2장에서 제시한 틀의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그러나 최소한으로만 보여 준다. 대화도 없고, 전투 묘사도 없고, 사사의 결점도 없다. 왜냐하면 옷니엘 이야기는 이야기라기보다 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앞으로 나올 사사들을 이 틀에 대고 읽으라고 가장 깨끗한 표준형을 먼저 세운 것이다.

    먼저 서곡의 마지막 문단을 보자.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이유가 둘로 제시된다. 하나는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3:2) 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는지 시험하려(3:4) 하심이다. 그런데 그 시험의 결과가 바로 이어진다.

    삿 3:5–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 사이에 거주했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결혼했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신들을 섬겼다. 동거가 통혼이 되고 통혼이 우상숭배가 되었다. 신명기 7장이 정확히 이 순서를 경고했었다. 그러니까 가나안 전쟁은 군사 전쟁에 그치지 않았다. 김지찬 교수의 말대로 더 근본적인 전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여호와께 충성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칼의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이 싸움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제 첫 사사 이야기가 시작된다.

    삿 3:7–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이 두 절에서 한 동사가 두 번 나온다. '섬기다'(עָבַד, 아바드)이다. 7절에서 이스라엘이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그러자 8절에서 이스라엘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다. 우리말 성경도 두 번 다 '섬기다'로 옮겼고, 히브리어도 같은 단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 반복을 통해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대신 바알을 섬기기로 했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은 진짜로 남을 섬기는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백성은 결국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된다. 그리고 그 종살이로 이스라엘을 넘기신 이는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시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고 말한다. 우상을 섬긴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스스로 택한 종살이의 자리에 넘겨 주신 것이다.

    이 '아바드'라는 단어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무게를 가진 말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시작하실 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여기 '종 되었던 집'(בֵּית עֲבָדִים)의 '종'이 바로 '섬기다'와 같은 어근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바로를 섬기던 종들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기서 구속하여 내셨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쳤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여기서도 '섬기다'는 아바드다. 즉 출애굽에서 여호수아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이 한 동사 위에 서 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 바로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성경이 보여 주는 인간은 섬기지 않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문제는 누구를 섬기느냐다. 그런데 사사기의 이스라엘은 여호와 대신 바알을 택했고, 그 결과 다시 종 되었던 집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이 종살이에서 구속하여 내신 백성을, 이제 하나님이 다시 대적의 손에 "파신다"(מָכַר)는 역설이 여기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종 된 백성을 어떻게 하셨는가.

    삿 3:9–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9절의 '부르짖다'는 출애굽기 2장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고역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그 단어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신다. 그러니까 옷니엘 이야기는 작은 출애굽이다. 종 되었던 집에서 부르짖는 백성을 하나님이 다시 건져 내신다. 이 출애굽형 구원은 사사기의 주요 사사 이야기마다 반복되지만, 책이 진행될수록 점점 흐트러지고 무너진다. 삼손에 이르면 이스라엘은 부르짖지도 않는다.

    그런데 10절의 동사들을 세어 보아야 한다. 여호와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셨다.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넘겨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옷니엘의 손이 이겼다'가 나온다. 이 문장에서 옷니엘이 한 일은 '나가서 싸운' 것뿐이다. 영을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대적을 넘겨 주신 이도 여호와시다. 첫 사사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옷니엘이 아니라 여호와다. 옷니엘은 이미 1장에서 드빌을 친 명장이었지만, 저자는 그의 용맹을 한 줄도 쓰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건져 낸 이가 누구인지를 독자가 헷갈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삿 3: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압제 팔 년 뒤에 평온 사십 년이 왔다. '평온하다'는 사사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공식은 에훗과 드보라와 기드온 이야기에도 나오지만, 책의 후반부로 가면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라는 문장 자체가 사라진다. 입다에게도 삼손에게도 평온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옷니엘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이 구원의 틀이 가장 깨끗하게 작동하는 첫 표준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결과는 팔 년의 종살이였고,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뒤에 주어진 것은 사십 년의 평온이었다. 바알을 섬기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구산 리사다임의 종살이였고, 여호와의 백성으로 돌아온 자리에는 안식이 있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섬기다'라는 한 동사로 보여 주는 진실이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겨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다른 주인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자유를 빼앗는 종살이가 아니라 다른 모든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 새벽에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나는 '섬기다'라는 단어를 묵상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빠로서 아들과 딸에게 무엇을 섬기라고 가르쳤는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아이들에게 힘주어 말한 것은 좋은 대학, 안정된 진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삶은 아니었을까? 그래 어쩌면 그것들은 그 자체로 바알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아이들의 삶에서 최종 기준으로 세웠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섬기라고 가르친 것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다가 구산 리사다임의 종이 되었듯이, 나는 아이들이 그것들을 섬기다가 불안과 비교와 조급함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 본문은 나에게 한 가지를 더 말한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뒤에 온 것은 종살이가 아니라 평온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참된 자유의 자리라는 것을 내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니 오늘 나는 아들과 딸에게 무엇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돌아보고, 내가 먼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의 평온을 그들 앞에서 살아 내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服事,服事

    在今天的經文中,士師記的序論結束,本論由此展開。借用金志燦教授的說法,這是序曲結束、第一樂章第一個音符響起的地方。1–6節是第二段序曲的最後一段,7–11節則是第一位士師俄陀聶的故事。然而這第一個音符,正是往後將不斷循環出現的標準模式。作者在俄陀聶的故事中,將第二章所提出的框架的所有要素,毫無遺漏卻又極其精簡地呈現出來。沒有對話,沒有戰鬥描寫,也沒有士師的缺點。因為俄陀聶的故事與其說是一個「故事」,不如說是一個「框架」。作者要讀者以此為最純淨的標準模式,去解讀日後將出現的其他士師。

    我們先來看序曲的最後一段。神留下迦南人的理由有兩個:一是「要試驗那不曾知道與迦南爭戰之事的以色列人」(3:2),使他們學習戰爭;另一是要試驗以色列人是否肯聽從耶和華藉摩西吩咐他們列祖的誡命(3:4)。而這試驗的結果,緊接著就出現了。

    士 3:5–6 於是以色列人住在迦南人、赫人、亞摩利人、比利洗人、希未人、耶布斯人中間,6 娶他們的女兒為妻,將自己的女兒嫁給他們的兒子,並事奉他們的神。

    以色列人住在迦南人中間,以色列人與迦南人通婚,以色列人事奉迦南人的神。同居變成了通婚,通婚又變成了拜偶像。申命記第七章早已精確地警告過這個順序。所以迦南之戰並不僅止於軍事戰爭。正如金志燦教授所言,更根本的戰爭在於:以色列人是否能不被迦南的文化與宗教同化,而繼續忠於耶和華。而以色列人並非敗在刀劍之戰,而是在這場更根本的戰爭中,不堪一擊地潰敗了。

    於是,第一位士師的故事就此展開。

    士 3:7–8 以色列人行耶和華眼中看為惡的事,忘記耶和華他們的神,去事奉諸巴力和亞舍拉,8 耶和華的怒氣向以色列人發作,就把他們交在美索不達米亞王古珊利薩田的手中;以色列人服事古珊利薩田八年。

    這兩節中,有一個動詞出現了兩次,就是「服事」(עָבַד,阿巴德)。第7節說以色列人服事諸巴力和亞舍拉。接著第8節說,以色列人服事古珊利薩田長達八年。中文聖經兩處都譯為「服事」,希伯來原文也是同一個字。作者藉由這樣的重複,要表達一件事:以色列人選擇了服事巴力,取代服事耶和華,結果卻真的淪為服事他人的奴僕。事奉偶像的百姓,最終會成為服事人的奴隸。而將以色列交付於這種奴役之境的,並非巴力,乃是耶和華自己。經文說「耶和華將他們交在古珊利薩田手中」。事奉偶像的結果,是神將以色列人交付到他們自己所選擇的奴役之地。

    我們必須明白「阿巴德」這個詞,對以色列人而言有多沉重的份量。神在西奈山開始頒佈十誡時,如此介紹自己:「我是耶和華你的神,曾將你從埃及地為奴之家領出來」(出 20:2)。這裡的「為奴之家」(בֵּית עֲבָדִים)中的「奴」,正與「服事」同源。以色列人曾在埃及作法老的奴僕,而神將他們從那裡救贖出來。之後約書亞在示劍最後如此呼喊:「你們今日就可以選擇所要事奉的……至於我和我家,我們必定事奉耶和華」(書 24:15)。這裡的「事奉」也是阿巴德。也就是說,從出埃及到約書亞,以色列的整段歷史都建立在這一個動詞之上——要事奉誰?法老、巴力,還是耶和華?聖經所呈現的人,並不是一個不事奉任何對象就能存活的存在。問題不在於是否事奉,而在於事奉誰。而士師記中的以色列人,選擇了巴力取代耶和華,結果又重新回到了那「為奴之家」。神所救贖出離奴役的百姓,如今卻又被神「賣」(מָכַר)入敵人手中——這其中的弔詭,值得深思。

    那麼,神又是如何對待這淪為奴僕的百姓呢?

    士 3:9–10 以色列人呼求耶和華的時候,耶和華就為他們興起一位拯救者救他們,就是迦勒兄弟基納斯的兒子俄陀聶。10 耶和華的靈降在他身上,他就作了以色列的士師,出去爭戰。耶和華將美索不達米亞王古珊利薩田交在他手中,他的手就勝了古珊利薩田。

    第9節的「呼求」,正是出埃及記第二章中,以色列人因埃及的苦役而向神呼求時所用的同一個字。而神為他們興起一位「拯救者」。因此,俄陀聶的故事乃是一次小型的出埃及。神再次拯救了在為奴之家中呼求的百姓。這種出埃及式的拯救模式,在士師記主要的士師故事中反覆出現,但隨著全書的推進,卻愈來愈紊亂、愈來愈崩解。到了參孫,以色列人甚至不再呼求了。

    然而我們必須數一數第10節裡的動詞。耶和華的靈降在俄陀聶身上;耶和華將古珊利薩田交在俄陀聶手中;而「俄陀聶的手勝了」這句話,是最後才出現的。在這句經文中,俄陀聶所做的,唯有「出去爭戰」而已。賜下靈的是耶和華,將敵人交付的也是耶和華。第一位士師故事真正的主角,並非俄陀聶,而是耶和華。俄陀聶在第一章中早已是攻取底璧的名將,但作者卻連一行都不寫他的英勇。這是為了不讓讀者對「究竟是誰將以色列人從奴役中救出來」產生任何混淆。

    士 3:11 於是國中太平四十年。基納斯的兒子俄陀聶死了。

    八年的壓迫之後,迎來了四十年的太平。「太平」在士師記中,是指神所賜下的安息。這個公式在以笏、底波拉、基甸的故事中也都出現,但到了全書後半段,「國中太平」這句話本身便逐漸消失了。耶弗他和參孫的故事裡,都不再記載「太平」。因此,俄陀聶的故事,是士師記中這個拯救框架運作得最純淨的第一個標準模式。而在此我們要看見一件事:以色列人事奉巴力的結果,是八年的奴役;而耶和華拯救之後所賜下的,是四十年的太平。事奉巴力並非自由,而是淪為古珊利薩田的奴僕;而回到耶和華百姓的身份之處,才有安息。這正是今日經文藉由「服事」這一個動詞所要揭示的真理。以色列人事奉巴力,並沒有因此獲得自由,反倒成了另一位主人的奴僕。因此,事奉耶和華並非剝奪自由的奴役,而是脫離一切其他奴役的唯一道路。

    今天清晨在查考這段經文時,我不斷默想「服事」這個詞。因為我想起,身為父親,我到底教導了兒女要「服事」什麼。當然,我曾對孩子們說,要單單事奉神。但我真正用力氣去強調的,是不是好的大學、穩定的前途、不落人後的人生呢?或許這些事物本身並不是巴力。但當我把這些立為孩子人生中的最終標準時,我可能其實是在教他們去「事奉」這些東西。而正如以色列人事奉巴力,結果卻成了古珊利薩田的奴僕,我不禁擔心,我的孩子們是否也會在事奉這些東西的過程中,淪為不安、比較與焦躁的奴隸。然而這段經文還告訴我另一件事:耶和華拯救之後所帶來的,不是奴役,而是太平。我應當用我的生命向孩子們證明,事奉神並非放棄什麼,而是通向真自由之地。因此,今天我願誠實地反省,自己究竟在告訴兒女要「服事」什麼;也願我能率先活出一個事奉耶和華之人所擁有的太平,活在他們眼前,成為今日的祈禱與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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