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고린도전서 15:20–34
今日默想:哥林多前書 15:20–34
제목 : 부활을 사는 사람
바울은 오늘 본문 앞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 전파도 헛되고,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잠든 자도 멸망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절에서 부활이 없이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 중에 더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20절에서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뀐다. '그러나 이제' 앞에서 말한 절망의 가정의 반전을 선포한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가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 행복한 자들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첫 열매'라는 말이 이 단락 전체에 핵심이다. 구약에서 추수의 첫 열매는 추수의 시작이고, 동시에 나머지 추수 전체의 보증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한 분에게만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뒤따라올 모든 추수의 시작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건, 그분께 속한 자들도 반드시 살아난다는 약속이다. 그래. 첫 열매는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그래서 바울은 곧바로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인류의 대표로 세운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인해 부활도 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전에 우리는 아담에게 속한 자로 아담의 운명을 따르는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유한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 바울의 시선은 우주의 끝까지 뻗어 간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자들이 살아나고, 마침내 모든 통치와 권세가 폐해지고, 맨 나중에 사망까지 무너진다.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사망.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 원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가장 마지막에 무너진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는 것이라 선포한다. 그래 부활은 내 사후의 위로에서 끝나는 작은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우주적인 완성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 영광을 선언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 거대한 이야기를 아주 현실적인 자리로 끌어내린다. 그렇기에 부활이 정말 없다면, 그는 왜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겠는가를 질문한다.
고전 15:31–32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날마다 죽노라'와 '먹고 마시자.' 이 두 모습을 대조하고 있다. 부활을 소유한 자의 모습과 부활이 없는 자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 이 후에 소망이 없을 테니, 에피쿠로스 학파들의 주장차럼 오늘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다. 이것은 바울이 이 쾌락주의를 권하는 게 아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결국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로 산다. 날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위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왜? 왜냐하면 부활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살아날 것을 믿기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알기에 오늘 절제하고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거짓된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속지말고 정신 차리고, 깨어 의를 행라고 권한다. 그렇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부활은 창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활을 믿는 믿음은 결국 오늘 어떻게 사느냐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제 행복자라고 고백했다. 부활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부활을 믿는다면 그 부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입으로 부활을 고백하면서 삶은 그저 '먹고 마시자'에 머물러 있다면, 나는 아직 부활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부활을 믿는 사람은 날마다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손해 보는 자리에, 섬기는 자리에, 나를 내려놓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공동체가 그 부활을 함게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한다.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입술의 고백을 넘어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길... 소망하고 소망한다.
題目:活出復活的人
保羅在今日經文的前段說道:「若死人不復活」,我們所傳的福音也是枉然,信心也是枉然,我們仍在罪中,那些已經睡去的人也滅亡了。並在第19節說,若我們只在今生有指望,我們就是比眾人更可憐的。
然而,到了第20節,氣氛瞬間一轉。「但現在」——宣告了前文那絕望假設的反轉。
林前 15:20 但基督已經從死裡復活,成為睡了之人初熟的果子。
這是在宣告:我們不是可憐的人,而是有福的人。原因在於,基督的復活與我們的復活緊緊相連。這裡「初熟的果子」一詞,是整段經文的核心。在舊約中,收成的初熟果子既是收割的開始,同時也是其餘全部收成的保證。因此,基督的復活並非只發生在祂一人身上的例外事件,而是意味著祂是一切即將到來之收割的開端。所以,祂的復活,就是屬於祂之人必定也要復活的應許。是的,初熟的果子,是我們復活的保證。
因此,保羅隨即將亞當與基督並排,立為全人類的代表。因一人而有了死亡,也因一人而有了復活。正因如此,我們從前是屬於亞當的人,跟隨亞當的命運;但如今,我們可以成為屬於基督的人,承受基督復活的產業。
此後,保羅的目光延伸至宇宙的盡頭。基督再來之時,屬於祂的人必要復活,最終一切執政與掌權的都要廢去,最後連死亡也要被滅絕。
林前 15:26 盡末了所毀滅的仇敵就是死。
死亡——那個人類最懼怕的仇敵——在復活的基督面前,成為最後一個被滅絕的。而那終點,是神作為萬有之主充滿萬有。是的,復活並非一個只停留在我死後安慰的小故事。死亡之後,我們將參與神國度在宇宙中的完全成就。這是何等的榮耀!
然後,保羅將這宏大的敘事拉回到極為現實的處境中。他問道:若復活根本不存在,他又為何要每天冒著生命危險?
林前 15:31–32 弟兄們,我在我們主基督耶穌裡所誇的你們,就是我天天冒死的明證。我若當日像尋常人在以弗所同野獸戰鬥,那於我有什麼益處呢?若死人不復活,我們就吃吃喝喝吧!因為明天要死了。
「天天冒死」與「吃吃喝喝」——保羅在對比這兩種樣貌。這是在比較擁有復活之人的樣式,與沒有復活之人的樣式。若沒有復活,死後便毫無盼望,那麼正如伊比鳩魯學派所主張的,今日盡情吃喝享樂,才是最合理的結論。保羅並非在推薦這種享樂主義,而是說:若沒有復活的盼望,人最終只能那樣活著。然而,保羅的生命卻截然相反——他每天甘願赴死,走進危險的中心。為什麼?因為他擁有復活。正因相信自己必要復活,才能不懼怕死亡。正因知道復活的榮耀,才能在今日節制自己、全心獻上。
因此,保羅在最後勸勉眾人,不要被那些說謊之人的話迷惑,要清醒過來,行公義。是的,保羅所說的復活,不僅僅是指從死亡中起來。那復活,是恢復創造之榮耀。所以,對復活的信心,最終會體現在今天如何生活之上。
因此,我昨天承認自己是有福的人——因為我是擁有復活的人。既然如此,若真相信那復活,就必須成為一個配得上那復活的人。然而,若口裡承認復活,生命卻只停留在「吃吃喝喝」,那我對復活的認識仍尚未真正到位。正如保羅的告白,信仰復活的人,是一個每天能夠「死去」的人——能夠站在吃虧的地方、服事的地方、捨己的地方。因為他知道復活的榮耀。因此,我今天禱告,願我們的群體能夠一同活出那復活。願我們群體中的每一位肢體,在各自生命的崗位上,不被世界的誘惑所動搖,不只停留在嘴唇的告白,而成為真正活出復活的人……我如此盼望,深深盼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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