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창세기 34:1-17
今日默想:創世記 34:1-17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겜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그는 땅을 사고,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다(창 33:20).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정통적인 고백처럼 들린다. 모양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일찍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창 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벧엘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이었지, 세겜에 정착하라는 부르심이 아니었다. 그래, 야곱은 명령의 절반만 들었던 것이다. 하란은 떠났지만, 벧엘로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벧엘에서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세겜에서,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 자기 식대로 신앙의 모양을 갖춘다. 땅을 사고, 제단을 쌓고, 거기서 살아간다.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주도하는 신앙이다. 모양도 있고, 제단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도 부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된다. 같은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 땅 추장의 아들에게 끌려가 욕을 당한다. 야곱은 그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한 단어가 마음에 박힌다.
창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잠잠하였고(헤헤리쉬).’ 야곱은 평생 말로 살아온 사람이다. 말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고, 말로 라반과 흥정했고, 어제까지 제단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자기 딸이 당한 폭력 앞에서 그는 잠잠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장 전체에 하나님의 음성이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다. 디나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침묵이 침묵을 부른다.
그래 어쩌면 자기 주도의 신앙이 침묵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라헬이 라반의 집에서 훔쳐온 우상이 집안에 있어도(창 31:19) 야곱은 그것을 처리하지 못했다. 35장에 가서야 하나님이 부르실 때 비로소 집안에 그동안 쌓여있던 이방 신상들을 거두어 내게 된다(창 35:2-4). 그동안 못 본 척하며 살아온 것이다. 자기가 정한 자리에는 죄를 똑바로 마주하는 시선이 없다. 죄가 보이면 자기가 정한 자리가 흔들리니까. 그래서 침묵한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자리에 다른 것이 끼어든다.
창 34: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속여’ 이 말은 바로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이다.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5). 야곱을 평생 따라다녔던 그 한 단어가, 이제 그의 아들들의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온다. 아버지가 잠잠한 자리, 그 빈자리에 아버지의 옛 죄가 다음 세대의 손으로 다시 살아난다. 침묵이 만든 자리를 죄의 대물림이 메운다. 그래, 본문이 정직하게 보여주는 무서운 풍경이다.
이것이 세겜의 비극이다. 야곱은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제단도 있었고, 하나님의 이름도 불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심에 절반만 응답한 자리. 자기 주도의 자리. 그 자리에서 종교의 모양은 갖추어졌지만, 죄를 짚는 정직함은 사라졌고, 잠잠함이 쌓였고, 자녀들 손에서 옛 죄가 더 거친 얼굴로 다시 살아났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도 세겜에 제단을 쌓는 사람일 수 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가 따로 있는데, 내가 정한 자리에서 종교의 모양을 갖추고 살아간 시간들이 있었다. 설교를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공동체를 돌본다. 모양은 다 있다. 제단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도 부른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정말 부르심에 응답한 자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한 자리에서 내 식대로 빚어낸 것인지 —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자신이 항상 없다. 그리고 이번 주 설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절반의 순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반쪽만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히 그렇지 않길 소망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두려운 것이 있다. 자기 주도의 신앙이 침묵을 낳는다는 본문의 진단이다. 짚어야 할 자리에서 잠잠한 적이 있었는가. 보았으나 못 본 척한 적이 있었는가.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내 자신 안에서. 그래, 있다. 너무 많다. 하지만 그 침묵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본문은 그 침묵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잠잠함이 만든 빈자리를 다른 무엇이 메운다고 말한다.
벧엘은 멀지 않았다. 30km 거리였다. 그러나 야곱은 30년을 미뤘다. 가까이 있는 부르심을 미루는 동안 세겜의 비극이 빚어졌다. 그래, 부르심은 늘 가까이 있고, 미룸은 늘 더 가까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오늘은 정말 이본문을 가지고 길게 씨름을 했다. 야곱에게서 내 모습이 너무나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그 은혜 아니면 이곳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雅各與哥哥以掃和好之後,回到了應許之地,並在示劍安頓下來。在那裡,他買了一塊地,築了一座壇,給那壇起名叫「伊勒·以羅黑·以色列」(創 33:20),意思是「神,以色列的神」。這聽起來像是一個正統的信仰告白——亞伯拉罕的神、以撒的神,如今也是他自己的神。從外表看,無懈可擊。
然而問題在於:那並不是神所呼召他去的地方。神早已明確地說過:
創 31:13 我是伯特利的神,你曾在那裡用油澆那柱子,向我許願。現在你起來,離開這地,回你本地去。
神呼召他回到伯特利,而不是安居在示劍。是的,雅各只聽了命令的一半。他離開了哈蘭,卻沒有前往伯特利。他在距伯特利不過三十公里的示劍,按照自己所定的地方,以自己的方式,構築了信仰的外在形式。買了地,築了壇,就在那裡生活。
這不是沒有信仰,而是一種自我主導的信仰。有外貌,有祭壇,也呼求神的名。然而這一切,都發生在他自己所定的地方。
今日經文就從這裡開始——同樣在示劍。雅各的女兒底拿出去探望那地的女子,卻被那地的首領之子擄去凌辱。雅各聽到了這個消息。然而有一個詞深深刺入心中:
創 34:5 雅各聽見示劍玷污了他女兒底拿;那時他的兒子們正在田野牧畜,雅各就閉口不言,等他們回來。
「閉口不言(heherish)」。雅各是個一生靠言語行事的人。他用言語從父親那裡騙取了祝福,用言語與拉班討價還價,就在昨日還在祭壇上呼求神的名。然而當自己的女兒遭受暴力之時,他卻沉默了。奇異的是,整個第三十四章中,神的聲音一次也未曾出現。底拿也一言未發。沉默召來了更深的沉默。
也許,正是這種自我主導的信仰孕育了沉默。因為在自己所定的地方,人只會看見自己想看見的。拉結從拉班家中偷來的偶像藏在家中(創 31:19),雅各卻無法處理這件事。直到第三十五章,神親自呼召他,他才終於清除了家中多年積存的外邦神像(創 35:2-4)。在那之前,他一直裝作視而不見。自己所定的地方,沒有直視罪的眼目。因為一旦看見罪,自己所定的地方就會動搖。所以他沉默。而那沉默所留下的空缺,被別的東西填滿了。
創 34:13 雅各的兒子們因為示劍玷污了他們的妹妹底拿,就用詭詐回答示劍和他父親哈抹。
「詭詐」——這正是以撒對以掃所說的那個詞:「你兄弟來了詭詐,奪了你的福分」(創 27:35)。那個伴隨雅各一生的詞,如今從他兒子們的口中同樣流洩而出。父親沉默的地方,那片空缺,被父親昔日的罪藉著下一代的手重新活了過來。沉默所留下的空位,被罪的代代相傳所填滿。是的,這是經文誠實呈現給我們的一幅令人震懼的景象。
這就是示劍的悲劇。雅各並非沒有信仰。他有祭壇,也呼求神的名。然而這一切都發生在他自己所定的地方——只回應了呼召一半的地方,自我主導的地方。在那地方,宗教的外貌雖然具備,卻失去了直指罪的誠實;沉默不斷積累,而父親昔日的罪,最終以更猙獰的面貌,在兒女們手中重新復活。
說句老實話,我自己也可能是個在示劍築壇的人。神所呼召的地方明明在別處,我卻有過一段段在自己所定的地方、以自己的方式構築信仰外貌而生活的日子。預備講道、帶領敬拜、牧顧群體——外貌一樣不缺。有祭壇,也呼求神的名。然而這一切究竟是從回應呼召的地方所發出的,還是在我自己所定的地方、按我自己的方式所塑造的——面對這個問題,我從來沒有把握。正如這週講道中所談到的,我或許只守了那命令的一半:愛神、愛人的誡命,也許我只守了其中一半。說實話,我真心盼望事實並非如此。
還有一件事讓我感到懼怕,那就是經文對自我主導之信仰的診斷——它孕育沉默。在當開口的地方沉默過嗎?明明看見卻裝作沒看見過嗎?在群體中,在家庭中,在我自己裡面。是的,有過。太多了。然而那些沉默流向何處,我並不清楚。只是,經文告訴我們,那沉默不會就此消散。它說,沉默所造成的空缺,會被別的什麼填滿。
伯特利並不遙遠,不過三十公里。然而雅各拖延了三十年。在拖延那近在眼前的呼召期間,示劍的悲劇就此釀成。是的,呼召總是近在咫尺,而拖延也總是更加貼近。那麼,我又如何呢?
今天,我與這段經文真實地長久摔跤。因為在雅各身上,我看見了太多自己的影子。所以今天,我更加切切地求神的恩典。因為若沒有那恩典,我根本無法站立在這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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