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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사사기 7:15–25

    今日默想:士師記 7:15–25

    한경우··조회 86

    제목 :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기드온은 적진에서 미디안 군사의 꿈과 해몽을 듣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 하나님이 6장 처음부터 기드온에게 바라셨던 일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봐야 하는 것은 사사기에서 기드온이 여호와께 경배했다고 기록된 장면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사사기는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다시 보여 주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엿볼 수 있다.

    진영으로 돌아온 기드온은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사람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삿 7:17-18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야간 기습에서 지휘관이 자기 행동을 신호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 부대가 흩어져 동시에 움직이려면 누군가의 동작이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명령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짧은 지시 안에서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라는 표현을 유난히 반복해서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반복의 끝에 구호가 붙는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이 구호를 두고 주석가들이 갈린다. 여기에 아무런 부정적 의도가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다른 실마리를 내놓는다. 고대 서북셈어 비문에는 신의 이름과 왕의 이름을 나란히 두는 정형구가 실제로 확인된다. 에그론에서 나온 한 토기 비문에는 '바알을 위하여, 파디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는데, 파디는 앗수르 기록에도 나오는 에그론의 왕이다. 그래서 신학자 영거는 그의 주석에서 이 자료를 근거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라는 구호가 기드온을 왕의 자리에 놓는 미묘한 암시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사사기의 저자가 기드온이 작전을 지시하면서 '나'를 강조하는 모습과 연결해서 보면 좀 더 명확해 진다.

    그렇기에 이러한 주해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이 구호 하나 때문이 아니다. 이야기가 실제로 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 백성은 기드온에게 대대로 자기들을 다스려 달라고 청한다(8:22). 기드온은 말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이후 그는 많은 아내와 칠십 명의 아들을 두고, 전리품으로 에봇을 만들어 세운다. 그리고 그가 아들 하나에게 붙인 이름이 아비멜렉이다. '내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7장의 이 구호는 앞으로 올 일을 미리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제 읽은 말씀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군대를 삼만 이천 명에서 삼백 명까지 줄이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말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7:2).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사람이 자기 손을 자랑할 만한 근거를 하나씩 없애고 계셨다. 그런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삼백 명이 외친 구호에는 여호와의 이름과 함께 기드온의 이름이 울려 퍼진다. 물론 이것을 두고 기드온이 그 밤에 이미 왕이 되려고 마음먹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자에게 묘한 긴장을 남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날 밤의 전투를 보면 그 긴장이 더 선명해진다. 삼백 명이 이경 초에 적진 가까이 이르렀는데, 마침 파수꾼들이 교대하는 때였다. 하나님이 시간까지 맞추어 놓으신 것이다. 그들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고 외쳤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여기서도 기드온의 이름을 울펴 퍼진다. 그런데 그들이 칼을 외치던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두 손에는 칼이 아니라 왼손에 횃불이, 오른손에 나팔이 들려 있었다.

    삿 7:21-22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본문의 대조가 보이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기 제자리에 서서 나팔을 불었다. 뛰어다니고 아우성치고 도망친 쪽은 미디안이었고, 그 진영 안에서 칼을 움직이신 분은 여호와셨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미디안 사람들을 죽인 칼은 이스라엘의 칼이 아니라 미디안 자신들의 칼이었다. 이들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이 함께 모인 연합군이었고, 때는 한밤중이었다. 사방에서 갑자기 나팔 소리가 터지고 항아리 깨지는 소리와 함성이 울리며 횃불이 진영을 에워싸자, 이들은 자기 진영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를 적으로 알고 서로를 쳤다. 저자는 이것을 두고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라고 적는다. 그러니까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쳤지만, 그 밤에 결정적인 칼의 역사는 여호와께서 적진 내부에서 일으키신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22절에서 여호와께서 적진을 치신 뒤로,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시는 서술이 뒤로 물러난다. 23절부터는 기드온의 지휘와 사람들의 행동이 전면에 나온다. 기드온이 사람을 부르고, 기드온이 전령을 보내고, 에브라임 사람들이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그 머리를 기드온에게 가져온다. 그래서 송병현 교수는 그의 책에서 23절 이후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불편하신 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고 기록한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본문이 이 일들을 나쁘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기드온의 이름과 권력이 점점 커져 가는 8장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변화인 것은 틀림없다.

    오늘 본문을 주해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본다. 교회에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사역이 잘 풀린 날에도 "은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속마음까지 정말 그런가 하고 물으면 사실 자신이 없다. 우리는 누가 알아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기드온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군대를 나누었고, 전략을 세웠고, 나팔을 불었고, 사람을 부르고 전령을 보냈다. 분명히 그의 손은 실제로 쓰였다. 하나님도 그 손을 쓰셨다. 그러니 우리가 한 수고를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겸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하나님이 경계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놓고 부인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공로의 이야기로 슬며시 바꾸는 순간이다. 그렇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수고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수고를 승리의 최종 이유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나팔은 우리가 불지만 그 밤에 칼을 움직이신 분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것, 그 한 가지만 잊지 않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標題:為耶和華,為基甸

    基甸在敵營中聽見米甸士兵的夢境與解夢,當場向神下拜敬拜。這正是神從第6章開始就一直期盼基甸做的事,如今終於發生了。然而,值得我們謹慎留意的是,在士師記中,記載基甸向耶和華敬拜的場景,這是最後一次。此後,士師記再也沒有呈現基甸在神面前跪下的畫面。今天的經文,正好讓我們略窺其中緣由。

    回到營中的基甸,將三百人分成三隊,讓每個人手拿角和空瓶,瓶中藏著火把。接著,他向士兵們下達了以下指示:

    士7:17-18 對他們說:「看我行事,你們也要照樣行。我到了營的旁邊怎樣行,你們也要怎樣行。18 我和一切跟隨我的人吹角的時候,你們也要在營的四圍吹角,喊叫說:『耶和華和基甸的刀!』」

    在夜間突襲中,指揮官以自己的行動作為信號,是很自然的事。因為要讓分散的三支部隊同時行動,就必須有人的動作作為基準。所以這命令本身並無可指責之處。然而,作者在這段簡短的指示中,異常地反覆使用「看我」、「照我所行」、「我和跟隨我的人」這樣的表達。而在這一連串重複的結尾,附上了一句口號:「為耶和華,為基甸。」

    對於這句口號,註釋家們的看法分歧。有人認為其中並無任何負面的意圖。然而,近來的研究提出了另一條線索。在古代西北閃族語的碑文中,確實可以發現將神明之名與君王之名並列的固定用語形式。在以革倫出土的一件陶器銘文上,寫著「為巴力,為帕迪」,而帕迪正是亞述文獻中記載的以革倫王。因此,神學家楊格(Younger)在其註釋中根據這項資料指出,「為耶和華,為基甸」這句口號,可能是將基甸悄悄置於王者地位的一種微妙暗示。若將這一主張與前文中士師記作者刻意強調基甸在下達作戰指示時反覆使用「我」的描寫連結起來看,便會顯得更加明確。

    因此,這樣的解讀之所以有說服力,並不僅僅因為這一句口號。而是因為故事的發展方向,實際上正朝著那個方向前進。戰爭結束後,百姓請求基甸世世代代統治他們(8:22)。基甸口頭上雖然拒絕了這個提議,但此後他娶了許多妻子、生了七十個兒子,並用戰利品製作了以弗得立起來。而他為其中一個兒子取的名字,正是亞比米勒——意思是「我父是王」。由此可見,第7章的這句口號,其實是為日後將要發生的事預先埋下的伏筆。

    在此,我們應當重新想起昨天所讀的經文。神為何要將基甸的軍隊從三萬二千人減少到三百人?正是因為擔心以色列會說「是我自己的手救了我」(7:2)。神在這場戰爭中,正一步步除去人可以誇耀自己的手所成就之事的每一個根據。然而,就在戰鬥即將展開的那一刻,三百人所高喊的口號中,耶和華的名字與基甸的名字卻一同響徹。當然,我們不能就此斷定基甸在那個夜晚就已經有意要成為王。但這確實在讀者心中留下了一種微妙的張力。

    若細看那夜的戰鬥,這種張力會顯得更加清晰。三百人在二更之初來到敵營附近,正巧是守衛換班的時刻。連時間,神都已經預先安排好了。他們吹角、打破瓶子、喊叫:「耶和華和基甸的刀!」在此,基甸的名字再度響起。然而,就在他們高喊「刀」的那一刻,他們的雙手所拿的並非刀劍,而是左手拿著火把,右手拿著角。

    士7:21-22 他們在營的四圍各站各的地方;全營的人都亂竄。三百人吹角,耶和華使全營的人用刀互相擊殺,逃到西利拉的伯哈示他,直逃到靠近他巴的亞伯米何拉的境界。

    你看見經文中的對照了嗎?以色列人各自站在原地吹角。四處奔逃、驚慌喊叫的一方是米甸人,而在那營中揮動刀劍的,是耶和華。這裡有一點值得特別提出:殺死米甸人的刀,並非以色列的刀,而是米甸人自己的刀。他們是米甸、亞瑪力和東方人聯合組成的軍隊,而當時正是深夜。當四面八方突然響起角聲,瓶子破碎聲與呼喊聲齊發,火把將營地團團圍住時,他們無法分辨在自己營中移動的人究竟是自己人還是敵人。於是彼此以敵人相待,互相攻擊。作者以此寫道:耶和華使全營的人用刀互相擊殺。也就是說,雖然他們高喊的是「耶和華和基甸的刀」,但那一夜真正決定性的刀劍之工,乃是耶和華在敵營內部親自興起的。

    有趣的是接下來的部分。在22節耶和華擊打敵營之後,直接描述神親自行動的敘述便退居幕後。從23節開始,基甸的指揮與眾人的行動被推到了前台。基甸召集人手,基甸派遣使者,以法蓮人擒獲俄立和西伊伯,將他們的首級帶到基甸面前。因此,宋炳鉉教授在他的著作中指出,23節以後神的身影不再出現,似乎暗示著神心中的不悅。當然,從另一方面來看,經文本身並未對這些事作出負面的評價。然而,想到第8章中基甸的名聲與權勢逐漸壯大,這無疑是一個意味深長的轉變。

    在解讀今天的經文時,我不禁反思我們自己的生命。在教會中,我們常說「這是神做的」,在事工進展順利的日子裡,也會說「這是恩典」。然而,若問自己說這話時的內心是否真是如此,老實說並沒有把握。因為當有人肯定我們時,我們會感到高興;若沒有人肯定,便會感到失落。因此,在思想今天的經文時,我認為有一件事必須明確。事實上,基甸並非什麼都沒做的人。他分兵、擬定戰略、吹響角聲、召集人手、派遣使者。他的手確實被實際使用了,神也確實使用了那雙手。因此,把我們所付出的勞苦說得彷彿不存在一般,並不是真正的謙卑。問題出在別處。神所提防的,並非僅僅是我們公然否認神的那一刻,而是我們悄悄地將神所成就的事,轉化為我們自己能力與功勞的故事的那一刻。是的,我們始終要記住的,並非在事奉主的過程中否定自己的勞苦,而是不要將那份勞苦當作得勝的最終原因。角是我們吹的,但那一夜揮動刀劍的並不是我們——但願我們成為一個永遠不忘記這一點的信仰群體,我如此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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