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1:11–21
今日默想:士師記1:11-21
제목 : 철 병거가 있으므로
어제 읽은 열 절은 상승이었다. 하나님께 물었고, 이미 주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사십 년 묵은 이름들이 무너졌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상승이 정점을 찍고 꺾이는 자리다. 그리고 그 꺾이는 지점이 어디인지, 저자가 아주 조용히 알려 준다. 먼저 드빌이다.
삿 1: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드빌의 옛 이름 기럇 세벨(קִרְיַת סֵפֶר)은 '책의 성읍', '문서의 성읍'이라는 뜻이다. 기록이 쌓인 도시, 그러니까 가나안의 지식과 문화가 모여 있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곳을 친 사람이 옷니엘이다. 갈렙의 조카이고, 그래서 기업이 집안 안에 머문다. 그리고 이 옷니엘이 조금 뒤 3장에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로 다시 나온다. 사사기는 첫 사사를 정식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미 여기에 그를 세워 둔 것이다. 첫 사사는 이스라엘 여인과 결혼했고, 마지막 사사 삼손은 이방 여인에게 무너진다. 처음과 끝의 대조가 벌써 시작되고 있다.
그 다음이 악사다.
삿 1:15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메마른 남방 땅을 받은 딸이 아버지에게 물을 구한다. 흥정이 아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한다. 땅을 땅답게 만들 물을 달라는 것이다.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 하나만 구했는데 둘을 주었다. 이 장면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나귀에 실려 토막 난 여인이 나오고, 춤추다가 끌려가 강제로 아내가 된 실로의 처녀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는 딸이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당당히 복을 구하는데, 거기서는 여인이 물건이 된다. 이처럼 사사기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몰락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그 몰락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그에 따른 결과가 보여주는 현실이다.
그리고 승리가 이어진다. 겐 사람들이 유다와 함께 올라갔고, 시므온과 함께 스밧을 쳐서 그 이름을 호르마, 곧 '진멸'이라 불렀고, 해안으로 내려가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점령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다는 잘하고 있다.
그런데 한 절이 이러한 승리의 분위기에 물을 뿌리고 있다.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한 절 안에 이유가 두 개다. 앞에 있는 승리의 이유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으므로"이고, 뒤에 있는 실패의 이유는 "철 병거가 있으므로"이다. 이겼을 때는 하나님이 이유였는데, 지고 나니 무기가 이유가 된다.
그러면 물어야 한다. 여호와는 산지에서는 함께 계시고 골짜기에서는 안 계시는 분인가. 산지의 하나님이시고 평지의 하나님은 못 되시는가. 성경이 이미 대답을 해 두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여호수아가 땅이 좁다고 불평하는 요셉 자손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 17: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비록 가나안 사람들이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능히 쫓아내리라. 이 말씀을 이미 가나안을 정복할 때부터 주셨다. 게다가 사사기에서 몇 장만 넘기면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진 시스라를 무너뜨리신다. 그렇기에 철 병거는 하나님께 문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까 유다가 골짜기에서 실패한 것은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신앙의 문제다. 저자는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으므로"라고 써 놓고 바로 그 옆에 "철 병거가 있으므로"를 붙여 놓았다.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냥 나란히 놓아 둔다. 그리고 읽는 사람이 그 사이의 균열을 스스로 보게 만든다.
그 균열이 얼마나 큰지는 바로 다음 두 절이 보여 준다.
삿 1:20-21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본문의 대조가 보이는가? 여든이 넘은 노인 하나가 아낙자손들 즉 거인들을 쫓아냈고, 지파 하나가 통째로 여부스 사람을 못 쫓아냈다. 그래 사십 년 전에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고 고백했던 그 갈렙이 사십 년 뒤에 실제로 그 고백처럼 승리하였다. 그런데 젊고 온전한 한 지파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21절의 히브리어를 보면 사실 "못하였다"가 아니다. 로 호리슈(לֹא הוֹרִישׁוּ)라는 히브리어는 '쫓아내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1장 뒤쪽에서 므낫세도, 에브라임도, 스불론도, 아셀도, 납달리도 똑같이 반복한다. 그리고 사사기 저자가 그 이유를 슬쩍 흘려 놓는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도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킬지언정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한다. 즉 쫓아낼 힘이 생긴 뒤에도 안 쫓아냈다. 부려먹는 편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철 병거가 있으므로 못 했다고 해 놓고는, 힘이 생긴 다음에도 하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그러므로 철 병거는 이유가 아니라 핑계였던 것이다.
오늘 새벽에 이 본문을 묵상하기 위해 주해를 하면서 나도 이 한 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잘된 일 앞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셨다고 말하고, 안 된 일 앞에서는 반드시 다른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들은 하나같이 사실이다. 골짜기에 철 병거가 실제로 있었듯이, 내가 살아가는 여기 대만에서 나에게도 그 목록은 길다. 언어가 부족하고, 문화가 다르고, 여기서는 이것 저것 잘 안되는 것이 참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왜 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유들을 대고 있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을 계산에서 빼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하기 싫은 것인지... 솔직히 나는 내가 어느 골짜기를 비워 두고 있는지 안다. 못 한다고 말해 왔지만 사실은 안 한 자리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노역을 시키는 편이 편해서 남겨 두었고, 그 남겨 둔 것들이 훗날 옆구리의 가시가 되었다. 사실 산지에서 함께 계셨던 하나님은 골짜기에서도 똑같이 함께 계신다. 그 사실 하나만 붙들고 골짜기로 내려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題目:因為有鐵車
昨天讀的那十節經文是上升的軌跡。求問了神,也得到了「已經賜下」的回答。於是四十年來屹立不搖的名字們終於崩塌。然而今天的經文,正是那上升到達頂點又開始下墜的地方。而作者非常安靜地讓我們看見那下墜的轉折點究竟在哪裡。首先是底璧。
士1:12 迦勒說:「誰能攻打基列西弗,將城奪取,我就把女兒押撒給他為妻。」
底璧的舊名基列西弗(קִרְיַת סֵפֶר)意思是「書卷之城」、「文獻之城」。這應該是一座累積了大量文字記錄的城市,也就是迦南知識與文化匯聚之地。攻下這座城的人是俄陀聶。他是迦勒的姪子,所以產業仍留在家族之內。而這位俄陀聶不久之後在第三章中,會再次以以色列第一位士師的身分出現。士師記在正式介紹第一位士師之前,早已在這裡預先安放了他。第一位士師娶了以色列女子為妻,而最後一位士師參孫卻因異族女子而敗亡。首尾的對比,其實從這裡就已經開始了。
接下來是押撒。
士1:15 她說:「求你賜福給我,你既將我安置在南地,求你也給我水泉。」迦勒就把上泉下泉賜給她。
領受了乾旱南地的女兒,向父親求水。這不是討價還價。她一開口便說:「求你賜福給我」,然後精確地說出自己所求的祝福是什麼——求能使土地成為土地的水。迦勒便把上泉與下泉都賜給了她。只求一樣,卻得了兩樣。這一幕值得我們牢記,因為到了士師記末了,會出現一位被裝上驢子、身體被切成塊的婦人,也會出現在跳舞時被強行擄走、被迫成婚的示羅少女們。也就是說,在這裡,女兒從驢背上下來,堂堂正正地向父親求福;而在那裡,女人卻淪為物品。士師記正是藉著這樣的對比,展現以色列逐漸墮落的軌跡。而事實上,那墮落正是墮落人性以及其後果所顯明出來的現實。
接著勝利仍在延續。基尼人與猶大人一同上去,又與西緬人一同攻打洗法,將那城的名字稱為何珥瑪,意即「盡行毀滅」,又下到沿海地區,攻取了迦薩、亞實基倫、以革倫。到目前為止,猶大似乎做得不錯。
然而有一節經文,卻為這片勝利的氣氛澆下了冷水。
士1:19 耶和華與猶大同在,猶大就趕出山地的居民,只是不能趕出平原的居民,因為他們有鐵車。
一節經文之中,藏著兩個理由。前面勝利的理由是「因耶和華與他同在」,後面失敗的理由則是「因為他們有鐵車」。得勝的時候,理由是神;失敗的時候,理由卻變成了武器。
那麼我們就該問:耶和華難道是在山地與人同在、卻不在平原與人同在的神嗎?難道祂是山地的神,卻做不了平地的神?聖經其實早已給出了答案。在以色列尚未進入迦南之前,約書亞就曾對抱怨土地太小的約瑟子孫這樣說:
書17:18 那山地也必歸你,雖是樹林,你也可以砍伐,靠近之地必歸你所有。迦南人雖有鐵車,雖是強盛,你也能把他們趕出去。
即便迦南人擁有鐵車、即便他們強盛,也必能將他們趕出去。這話早在征服迦南之時便已賜下。而且,在士師記中,只需再翻過幾章,神就藉著底波拉,擊潰了擁有九百輛鐵車的西西拉。由此可見,鐵車對神而言,從來就不曾是個問題。
所以猶大在平原失敗,並不是軍事上的問題,而是信仰上的問題。作者寫下「因耶和華與他同在」之後,緊接著又寫下「因為他們有鐵車」,沒有附加任何解釋,就只是將兩者並列放在一起,讓讀者自己去看見其間的裂縫。
而這裂縫有多深,緊接著的兩節經文便清楚地顯明出來。
士1:20-21 以色列人照摩西所說的,將希伯崙給了迦勒;迦勒就從那裡趕出亞衲族的三個兒子。21 便雅憫人沒有趕出住耶路撒冷的耶布斯人,耶布斯人卻與便雅憫人同住在耶路撒冷,直到今日。
看見這對比了嗎?一位年逾八十的老人,趕出了亞衲族──也就是那些巨人;而一整個支派,卻連耶布斯人都無法趕出。四十年前那位曾說「我們足能得勝」的迦勒,四十年後真的照著他的告白得了勝利。然而年輕又健全的一整個支派,卻什麼也沒能做到。
但若看希伯來原文,21節其實並不是「不能」的意思。「羅‧霍利舒」(לֹא הוֹרִישׁוּ)這個希伯來詞,意思是「沒有趕出」,也就是說,這並非能力的問題,而是意願的問題。而這句話在第一章後半段,又被瑪拿西、以法蓮、西布倫、亞設、拿弗他利支派一一重複。士師記作者也悄悄地透露了原因:以色列強盛之後,雖使迦南人服勞役,卻並沒有把他們全都趕出去。也就是說,即便有了足夠的力量趕出他們之後,仍然沒有去做,因為役使他們反而更有利可圖。
沒錯,起初說是因為有鐵車而做不到,等到有了力量之後,卻仍然沒有去做。這才是問題的核心。由此可知,鐵車根本不是理由,而是藉口。
今天凌晨為了默想這段經文而查考註釋時,我再次體悟到,自己也活得像這一節經文一樣。事情順利的時候,就說是因為神與我同在;事情不順的時候,就一定另外找個理由。當然,那些理由每一個都是事實。就如平原上確實有鐵車存在一樣,在我所生活的這個台灣,屬於我的那份清單也很長——語言不夠好、文化不同,在這裡有太多事情確實難以順利進行。說出這些話,沒有人會反駁,因為全都是實話。然而問題在於,就在我陳述這些理由的當下,我其實已經在那個地方,把神從我的計算之中排除了出去。到底是真的做不到,還是其實不想做呢……老實說,我很清楚自己正把哪個平原留白著。那些我口口聲聲說「做不到」的地方,其實很可能只是我「沒有去做」的地方。而以色列也是因為役使他們更方便,才選擇留下他們,而那些被留下的,日後卻成了肋旁的荊棘。事實上,那位曾在山地與人同在的神,在平原上也同樣與人同在。願我能單單抓住這一個事實,過一個憑信心走下平原的日子。
댓글 / 留言 (0)
로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