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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시편 13:1-6

    今日默想:詩篇13:1-6

    Kyoung Woo Han··조회 61

    제목 : 그러나 나는

    시편 13편은 탄식과 간구와 신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길이가 다르다. 탄식이 가장 길고, 간구가 그보다 짧고, 신뢰가 가장 짧다. 한 신학자는 이것을 '어둠은 길고 빛은 짧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이것은 시인이 느끼는 신앙의 여정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래서 시편 13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신학자들은 시편 13편은 앞의 시편들과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 연결이 첫 절에서 바로 드러난다. 잊으셨다. 얼굴을 가리셨다. 영원히. 그런데 이 세 마디는 시편 10편에서 악인이 하나님을 부정하며 한 말의 반복이다. 히브리어 단어가 그대로다. 악인이 한 말과 다윗이 한 말이 똑같다. 그러니까 악인과 다윗은 같은 것을 본다. 하나님의 침묵, 응답 없음, 원수의 승리.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내용이 아니라 방향이다. 악인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다윗은 그 질문을 하나님께 들고 나온다.

    시 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인의 고통은 세 겹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둘째는 원수가 높아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끝없이 나 자신과 회의를 한다. 즉 번뇌한다. 개역개정은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라고 옮겼는데, 히브리어는 '내가 내 영혼 안에 대책들을 세운다'는 의미에 가깝다. 혼자서, 밤새.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밤새 고민다가 지쳐 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갉아먹는지.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시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3절의 첫 단어는 '하비타'라는 단어이다. 개역개정은 '나를 생각하사'로 옮겼지만, 원문의 본래 의미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이다. '보소서'. 이것이 3절의 첫 마디다. 1절에서 다윗은 주의 얼굴을 숨기시나이까 하고 탄원했다. 그런데 3절에서 그가 제일 먼저 외치는 것이 보소서다. 다윗은 자기가 탄원한 바로 그것을 뒤집어 달라고 구한다. 숨기신 그 얼굴을, 드셔서, 보아 달라고...

    그 다음이 '나의 눈을 밝히소서'이다. 이 구절은 대개 영적인 눈을 열어 달라는 기도로 읽힌다. 그런데 아니다. 눈을 밝히다는 히브리어 관용구이다. 그 의미는 사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라는 의미이다. 요나단이 전쟁 중에 기진해 쓰러져 있다가 꿀을 조금 찍어 먹었을 때, 성경은 그의 눈이 밝아졌다고 말한다(삼상 14:27). 그래서 성경에서는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죽어가는 자가 살아났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바로 다음 구절이 확증한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그러니까 시인이 구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목숨이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그게 3절의 기도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 자주 고상해지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살려 달라고 울면서, 입으로는 주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게 더 신앙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고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들어낸다. '주님 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시 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인은 두려운 것을 두 번 이야기 한다. 첫번째는 내가 죽을까 두렵고, 두번째는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두렵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셨다는 소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그의 하나님이 무너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에 다윗은 자기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고 있다.

    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5절의 히브리어에는 접속사가 있다. '그러나 나는'으로 시작한다. 앞의 모든 것을 뒤집는 대조다. 그리고 목적어가 동사 앞으로 나와 있는데, 히브리어에서 이건 강조다. '그러나 나는, 오직 의지하였습니다. 주의 헤세드를...'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의 형태를 보면 의지하였사오니는 칼 완료형 1인칭이다. 즉 의지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의지하였습니다' 이다. 이미 의지해 왔다는 뜻이다.

    사실 여기서 한가지를 생각해 보어야 한다. 과연 4절과 5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사이의 구원 사건을 하나도 서술하지 않는다. 원수는 여전히 높다. 하나님의 얼굴은 여전히 숨겨져 있다. 응답은 없다. 상황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주의 헤세드를 의지하였사오니".

    그렇다면 이 신뢰는 5절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1절에서 부르짖을 때 이미 거기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다윗은 애초에 부르짖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부르짖음 자체가 이미 신뢰의 증거다. 시편 10편의 악인은 부르짖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다윗은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는 탄식이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탄식은 그 신뢰라는 바닥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시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마지막 동사도 완료형이다. 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은덕을 베풀어 오셨으므로. 그러면 시 전체가 완벽한 원을 그린다. 1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나를 잊으시나이까 물었다. 그리고 6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셨나이다 고백한다. '잊혀질까 두려운 사람이, 기억함으로 대답한다'. 오늘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어제 그분이 하신 일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둠 속의 신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비록 지금 나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신뢰하기에 다시 그 앞에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보소서' 그리고 이전에 나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여전히 예배한다. 그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 예배해야 한다. 어쩌면 나도 밤새 대책만 굴리며 뒤척거리던 시간들이 있었다. 잠은 오지 않고, 천장만 보고, 이 방법이 될까 저 방법이 될까 계산만 했다. 그러나 아침에 남는 것은 대책이 아니라 피로뿐이었다. 그 밤을 끝낸 것은 더 좋은 계획이 아니었다. 그저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삶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 안다.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신실하셨던 그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 하지 않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題目:然而,我

    詩篇第13篇由三個部分構成:哀嘆、祈求與信靠。然而這三個部分的長度各不相同。哀嘆最長,祈求次之,信靠最短。有位神學家將此描述為「黑暗漫長,光明短暫」。或許,這正是詩人對自己信仰旅程的真實寫照。因此,詩篇第13篇這樣開頭:

    詩13:1 耶和華啊,祢忘記我要到幾時呢?要到永遠嗎?祢掩面不顧我要到幾時呢?

    神學家們指出,詩篇第13篇與前面幾篇詩篇是相互銜接的。這種連結在第一節便清晰可見:忘記了、掩面了、永遠地。而這三個詞,正是詩篇第10篇中惡人否認神時所說的話的重複——希伯來文字詞完全相同。惡人所說的話,與大衛所說的話,竟是一模一樣。也就是說,惡人與大衛所看見的是同樣的景象:神的沉默、禱告無回應、仇敵的得勝。然而,這兩者的差異不在於內容,而在於方向。惡人自己下了結論;但大衛卻將這疑問帶到神面前來。

    詩13:2 我心裡籌算,終日愁苦,要到幾時呢?我的仇敵升高壓制我,要到幾時呢?

    詩人的痛苦是三重的。第一,神沉默不語;第二,仇敵日漸高升;第三,自己在內心裡不停地自我懷疑——也就是煩惱。和合本譯為「我心裡籌算」,然而希伯來原文更接近「我在自己心靈之中不斷謀算對策」的意思。獨自一人,整夜輾轉,翻來覆去地盤算。其實,那些曾經整夜煩惱到精疲力竭的人都明白,那是多麼消耗人心的事。就在這樣的處境中,詩人向神呼求。

    詩13:3 耶和華我的神啊,求祢看顧我,應允我,使我眼目光明,免得我沉睡至死;

    第3節的第一個字是「哈比塔」(הַבִּיטָה)。和合本譯為「看顧我」,但原文本義並非思念,而是「看」——「請看哪」。這才是第3節的第一句話。在第1節,大衛哀求說:「祢掩面不顧我」;而到了第3節,他第一個呼求的,卻正是「請看」。大衛祈求神翻轉他所哀嘆的那件事——那隱藏的臉,求祢抬起來,看我一眼……

    接下來是「使我眼目光明」。這句話通常被理解為求神開啟屬靈的眼光。然而並非如此。「眼目光明」是希伯來文的慣用語,其實際含義是「使垂死之人得以存活」。約拿單在戰場上精疲力竭、幾乎倒地,舔了一點蜂蜜之後,聖經說「他眼目就明亮了」(撒上14:27)。因此在聖經中,眼目昏暗意味著趨近死亡;而眼目光明,則意味著垂死者重獲生命。緊接著的下一句話印證了這一點:「免得我沉睡至死」。所以詩人所求的,並非啟示或領悟,而是性命。「我快死了,求祢救我」——這才是第3節禱告的核心。然而我們之所以不這樣解讀,是因為我們在禱告時太常將自己包裝得高尚。心裡哭喊著求神救命,口中卻說「求主讓我明白祢的旨意」,因為那看起來更像是有信仰的樣子。但大衛在神面前並不追求高尚,他將自己的真實樣貌完全袒露出來:「主啊,我快死了。」

    詩13:4 免得仇敵說:「我勝了他!」免得我的敵人在我搖動的時候歡喜。

    詩人兩度說到他所懼怕的事。第一,他怕自己會死;第二,他怕仇敵說「我勝了他」。大衛之所以懼怕這件事,是因為那將成為神被擊敗的傳言。若他自己傾倒,人們便會說他的神也傾倒了。因此,大衛不是以自己的性命為賭注來禱告,而是以神的名為賭注來禱告。

    詩13:5 但我倚靠祢的慈愛,我的心因祢的救恩快樂。

    第5節的希伯來文有一個連接詞,以「然而,我」作為開頭——這是推翻前文一切的對比轉折。此外,受詞置於動詞之前,在希伯來文中這是一種強調的語法:「然而,我,已然倚靠。倚靠祢的慈愛(hesed)……」值得注意的是,這裡動詞的形式是完成時態第一人稱,意思不是「我將要倚靠」,而是「我已然倚靠」——我向來就倚靠著祢。

    事實上,在這裡有一件事值得我們深思:第4節和第5節之間,究竟發生了什麼?答案是:什麼都沒有發生。經文在這之間並未描述任何得救的事件。仇敵依然高升,神的臉依然隱藏,回應依然沒有,處境連一個字都沒有改變。然而大衛卻說:「然而,我已然倚靠祢的慈愛。」

    如此說來,這份信靠並非在第5節才新生出來的,而是早在第1節呼求之時便已然存在。否則,大衛根本不會開口呼求。是的,呼求本身就已經是信靠的憑據。詩篇第10篇中的惡人沒有呼求,他在心中自己下了結論;但大衛呼求了,因為他早已在倚靠著神。信靠不是哀嘆所抵達的終點,而是哀嘆所站立其上的那塊地基。

    詩13:6 我要向耶和華歌唱,因為祂用厚恩待我。

    最後一個動詞也是完成時態:「因祢向來以厚恩待我」。如此一來,整首詩便形成了一個完整的圓。第1節,大衛問:「祢忘記我了嗎?」第6節,大衛告白:「祢以厚恩待了我。」「那怕被遺忘的人,以記念作為回答。」即使今日看不見神的臉,昨日祂所行的事仍依然長存。因此,在黑暗中的信靠,不是製造出來的,而是憶起的。正因相信那一路引領我至今的神,雖然此刻在我眼中看不見,卻必不棄絕我,我才能再次來到祂面前呼求:「求祢看顧我。」並繼續敬拜那曾與我同在的神,不放棄那份敬拜。這正是這首詩篇所要傳達的信息。

    是的,我們當要敬拜。也許我也曾有過那樣的夜晚——整夜翻來覆去地盤算對策,睡意全無,盯著天花板,一遍又一遍地計算這個辦法行不行、那個辦法行不行。然而天亮之後所剩下的,不是對策,只是疲憊。結束那個夜晚的,不是更好的計畫,而是再次站到神面前。記念那位一路與我同行的神,敬拜那位神,並信靠祂將要行的事,安心等候。是的,我知道,這並不容易,我深深明白這一點。縱然如此,願我們仍能記念那位至今信實的神,成為一個不放棄敬拜神的信仰群體——為此,我獻上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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