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시편 6:1-10
今日默想:詩篇 6:1-10
제목 : 주의 헤세드로
시편 6편은 교회 역사에서 오랫동안 '참회시'로 불려 왔다. 일곱 편의 참회시 가운데 첫 번째 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시인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말이 없다. 참회시인데 참회가 없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이 시를 참회시라 불렀을까. 이 질문을 붙들고 시를 읽어 보자. 시인은 지금 깊은 고난 가운데 있다. 어쩌면 질병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인은 '나를 고치소서'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래 시인은 뼈가 떨리고, 밤마다 눈물로 침상이 뜨고, 눈은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질병은 단순한 몸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세계에서 질병은 종종 하나님의 징계나 진노와 연결되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의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시 6: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즉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탄원이 곧 병을 고쳐 달라는 탄원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 곁에는 원수들이 있었다(7절). 그들은 아마 시인의 병을 보며 조롱했을 것이다. 봐라, 저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몸의 고통 위에 사람의 조롱까지 얹힌 밤을 노래 한 것이다. 안다. 그런 밤이 얼마나 긴지...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자기 무죄를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회개를 공로처럼 쌓아 올리지도 않는다. 자기 편에서 내세울 근거를 아예 내려놓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 6: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인이 붙잡는 것은 '주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인자하심이다. 그래 시인이 지금 붙드는 유일한 근거가 이것이다. 내 결백도 아니고, 내 눈물의 양도 아니고, 내 회개의 진정성도 아니다. 오직 주의 헤세드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왜 참회가 없는 이 시가 참회시인가. 참회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1절에서 징계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진노 중에만은 마시라고 할 뿐, 하나님의 손이 자기 위에 있다는 것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이 이미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죄의 목록을 낭독하는 대신, 빈손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헤세드 앞에 선다. 그런데 그것이 참회의 가장 깊은 자리다. 참회란 내 죄를 잘 정리해서 하나님께 나아와 그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채로 하나님의 긍휼 앞에 나를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개는 은혜로 받아들여진 자에게서 맺히는 열매이지, 받아들여짐을 사는 값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시를 참회시의 첫 자리에 둔 것은, 어쩌면 참회의 본질이 여기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를 들으셨다고 선언한다.
시 6:8-9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이처럼 8절과 9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울음과 간구를 들으셨다고 두 번 반복하고, 이어 자신의 기도를 받으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아직 상황이 바뀌었다는 말이 없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렇다고 원수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일어나, 자기가 벌을 받는 자라고 규정하던 이들을 향해 선언한다. '악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라' 무엇이 이 당당함을 가능하게 했을까? 아마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시인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시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응답이 눈에 보이기 전에 먼저 일어설 수 있었다. 내 처지는 그대로여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헤세드를 의지하는 자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근거로 서기에, 상황이 바뀌기 전에 이미 당당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나의 간구를 들으실 것이다. 그 믿음 자체가 대적들 앞에서의 판결이 될 수 있다고 신뢰의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래 나 역시 매일 넘어진다. 어제 결심한 것을 오늘 무너뜨리고, 같은 자리에서 또 실패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러워서 기도의 자리를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편 6편의 시인이 말해 준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근거는 나의 성공이 아니라고... 회개의 완성도도 아니라고... 오직 주의 헤세드,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그래.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그 헤세드의 하나님 앞에 설 용기를 얻는다. 어쩌면 우리 공동체의 많은 지체들이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밤을 지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학업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그 지체들에게 이 헤세드가 함께 하길 기도한다. 그리고 그 헤세드를 신뢰하고 다시 일어서길 기도한다. 그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붙드는 것은 나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의 헤세드이기 때문이다.
題目:靠主的慈愛(Hesed)
詩篇第6篇在教會歷史中長久以來被稱為「懺悔詩」,是七篇懺悔詩中的第一篇。然而,令人感到奇特的是,從頭到尾讀完這首詩,卻找不到詩人認罪悔過的片段,沒有一句「我犯了這樣的罪」。明明是懺悔詩,卻不見懺悔。那麼,教會為何將這首詩稱為懺悔詩呢?帶著這個問題,讓我們再次細讀這首詩。
詩人此刻正身陷深重的苦難之中,看來似乎是身患疾病。
詩 6:2 耶和華啊,我骨頭發戰;我心也大大驚惶。耶和華啊,你要到幾時呢?求你憐憫我,因為我軟弱;求你醫治我。
詩人呼求「求你醫治我」,可見他骨頭發戰,每夜以眼淚濕透床榻,眼睛因憂愁而昏花。然而,對當時的人而言,疾病不僅僅是身體的問題。在古代以色列的信仰世界裡,疾病往往被理解為與神的管教或憤怒相連。因此,詩人開口的第一句話便是:
詩 6:1 耶和華啊,求你不要在怒中責備我,也不要在烈怒中懲罰我。
也就是說,懇求神收回憤怒,就是懇求神醫治他的疾病。此外,詩人身旁還有仇敵(第7節),他們大概看著詩人的病情而加以嘲弄:「你看,那個人正在受神的懲罰!」詩人在身體的痛苦之上,又承受著人的嘲諷,就在這樣的長夜中吟唱出這首詩。我明白,那樣的夜晚是何等漫長……
然而,詩人在此並不試圖證明自己的無辜,也不將悔改當作可以積累的功勞。他放下了一切自己可以倚仗的理由,單單懇求神的恩典。
詩 6:4 耶和華啊,求你轉回,救我的靈魂;憑你的慈愛拯救我。
詩人所緊緊抓住的,是「你的慈愛」。那慈愛,在希伯來文中就是「慈愛」(חֶסֶד,Hesed)——是神信守聖約、永不改變的慈愛與憐憫。這是詩人此刻所倚靠的唯一根據。不是自己的清白,不是眼淚的多寡,也不是悔改的真誠程度,而是唯獨主的慈愛(Hesed)。
正是在這裡,有了回答最初那個問題的答案——為何這首沒有懺悔的詩,卻被稱為懺悔詩?因為它並非真的沒有懺悔。詩人在第1節並未拒絕管教本身,他只是求神不要在烈怒中懲罰他,卻接受了神的手臨在自己身上這一事實。他心中已有「自己是罪人」的自我認知。只是,他不宣讀罪行的清單,而是空手而來,站立在神的慈愛(Hesed)面前。而那,才是懺悔最深之處。懺悔並非將自己的罪整理好之後,帶到神面前一一列舉,而是毫無可誇之處地,將自己投身於神的憐憫之前。因此,悔改是被神接納之人所結出的果子,而非購買被接納之資格的代價。正因如此,教會將這首詩置於懺悔詩的首位,或許正是因為教會明白:懺悔的本質,就在於此。
接著,詩人宣告神已垂聽了他的懇求。
詩 6:8-9 你們一切作孽的人,離開我吧!因為耶和華聽了我哭泣的聲音。9 耶和華聽了我的懇求;耶和華必收納我的禱告。
在第8、9節,詩人兩度重申耶和華垂聽了他的哭泣與懇求,隨即宣告神必收納他的禱告。然而,這不奇怪嗎?此時尚未有任何跡象表明處境已改變——病沒有痊癒,仇敵也未消散。然而,詩人站了起來,向那些定他為受罰之人的人宣告:「你們一切作孽的人,離開吧!」是什麼使他能如此坦然自若?那必定是對神之性情的確信。神的慈愛(Hesed)並非隨著詩人的狀態而改變,而是神永不改變的性情本身。因此,詩人能在應允尚未顯現於眼前之時,便先站立起來。即使自己的處境依然如故,他仍能信靠那永不改變的神。是的,倚靠慈愛(Hesed)的人,是以神為立足之根基,而非以處境為根基,因此在處境改變之前,就已能坦然自若。「神必垂聽我的禱告」——這份信心本身,便能成為面對仇敵時的宣判。詩人就是如此宣告他的信靠。
是的,我自己也是每天跌倒。昨天立下的心志,今天就已破碎,在同樣的地方一再失敗。每逢這樣的時刻,我心中也會湧起一種羞愧——覺得自己沒有臉站在神面前,想要拖延禱告的時間。然而,詩篇第6篇的詩人告訴我:站在神面前的根據,不是我的成功,也不是悔改的完整程度,而是唯獨主的慈愛(Hesed)——那永不改變的神之性情。是的,正因如此,我今天再次從那慈愛(Hesed)的神面前,得著重新站立的勇氣。
或許,我們群體中許多的弟兄姊妹,正在反覆的失敗面前,度過那些覺得自己沒有資格來到神面前的漫漫長夜——在學業上、在職場上、在家庭中、在無數的關係裡……我為那些肢體禱告,願這份慈愛(Hesed)與他們同在;也禱告他們能信靠這慈愛(Hesed),再次站立起來。是的,因為托住我們站在神面前的,不是我們自己的信實,而是主的慈愛(Hesed)。
댓글 / 留言 (0)
로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