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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5:1–18

    今日默想:士師記 5:1–18

    한경우··조회 57

    제목 :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4장이 이야기로 말한 전쟁을 5장은 노래로 다시 말한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노래를 출애굽기 15장 모세의 노래와 함께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해 왔다. 그만큼 문법도 단어도 고어여서 구약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5장은 4장에 신학적 해설을 덧붙인 것이 아니다. 5장은 같은 전쟁을 고대 승전시의 형식으로 다시 해석하면서, 4장에 없던 것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오심, 지파들의 참여와 불참, 메로스의 저주, 시스라 어머니의 기다림이 그것이다. 김지찬 교수의 말대로 이 노래는 겉으로는 드보라와 야엘 같은 사람을 칭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찬양하는 노래다. 홍해에서 바로의 병거가 무너진 뒤 모세가 노래했듯이, 기손 강에서 시스라의 병거가 무너진 뒤 드보라가 노래한다.

    삿 5:1–2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절에서 드보라의 이름이 바락의 이름 앞에 놓이고, 히브리어 동사도 여성 단수형이다. 이것이 드보라가 이 노래의 중심 목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2절에서 시인이 여호와를 찬송하는 첫 번째 이유가 무엇인가. 시스라가 죽어서가 아니다. 철 병거가 무너져서도 아니다.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해서 나섰다는 것, 그것이 여호와를 찬송할 첫째 이유다.

    '즐거이 헌신하다'로 옮긴 히브리어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드린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성막을 지을 때 백성이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다고 할 때(출 35:29) 쓰인 말이고, 시편 110:3에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할 때 쓰인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백성이 자원했으면 백성을 칭찬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인은 백성이 자원한 그 일을 보며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4장을 읽은 독자는 이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 백성은 이십 년 동안 철 병거 아래 눌려 있던 백성이고, 그들의 장군 바락조차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조건을 달았던 백성이다. 그런 백성이 스스로 일어난 것은 여호와의 구원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본문이 직접 '그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인이 백성의 헌신을 하나님 찬양의 첫 이유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마음의 출처에 대한 시인의 고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9절에서 같은 말을 한 번 더 한다.

    삿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래 백성의 지도자들이 즐거이 헌신했다. 시인은 그 지도자들을 사모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론은 또 '여호와를 찬송하라'이다. 그 이유는 시인은 헌신한 사람을 높이 사면서도 찬송의 방향을 사람에게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백성이 어떤 상태에서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한다.

    삿 5:6–8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드보라 이전의 이스라엘은 이런 백성이었다. 큰길은 비었고 사람들은 샛길로 다녔다. 마을에는 사람이 끊겼다. 사만 명 가운데 방패와 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는 싸울 무기도, 싸울 만한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인은 이스라엘이 새 신들을 택한 일과 전쟁이 성문까지 이른 상황을 나란히 놓는다. 사사기 2장의 순환이 노래 안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그 무너진 공동체 한가운데서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불렸듯이(왕하 2:12; 6:21), 드보라는 공동체가 무너진 때에 어머니처럼 백성을 보호하고 일으켜 세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드보라가 일어난 것도 드보라가 한 일로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 앞에 하나님이 오셨다고 노래한다.

    삿 5:4–5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어제 4장은 하나님이 시스라의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셨다'고만 했는데, 5장의 노래는 그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이 물을 쏟았다고 노래한다. 5장의 노래는 하늘에서 쏟아진 비와 기손 강의 범람(5:21)을 하나님의 전쟁과 연결한다. 김지찬 교수는 이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무기는 비와 번개였다고 정리하면서, 기손 강이 평소에는 마른 계절천이지만 비가 오면 순식간에 불어나 진창이 되는 강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철 병거의 압도적인 우위가 무력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시인은 이 폭우를 날씨로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세일에서, 에돔 들에서 나오셨다고 노래한다. 세일과 에돔은 시내 산 방향, 곧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하나님을 만난 남쪽이다. 즉 시인은 기손 강의 폭우를 시내 산의 하나님이 다시 오신 사건으로 본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솔에서 건지러 오셨다. 그리고 비와 폭풍을 다스리는 분이 가나안의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시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바락의 이름을 기억할 만하다. 바락(בָּרָק)은 히브리어로 '번개'라는 뜻이다. 4장에서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주저했는데, 5장의 노래는 하나님이 하늘의 폭풍으로 친히 싸우셨다고 찬양한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언어적 유희로 보기도 한다. 물론 저자가 이 대비를 의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히브리 독자에게 이 이름의 울림이 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니까 노래의 순서가 이렇다. 여호와께서 먼저 전사로 행진하셨다(4–5절). 드보라가 일어났다(7절). 그리고 지도자들과 백성이 자원하여 골짜기로 내려왔다(9, 13–18절). 그러니 은혜가 먼저였고, 헌신은 그 은혜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노래의 한복판에는 오지 않은 자들의 이름이 있다.

    삿 5:15–17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 스불론, 잇사갈은 왔다. 그리고 스불론과 납달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18절)이라는 칭찬을 따로 받는다. 그러나 르우벤은 시냇가에서 큰 결심만 하고 양 우리에 앉아 피리 소리를 들었고,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그냥 있었고, 단은 배에 머물렀고, 아셀은 항만에 앉아 있었다. 각 지파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사정을 묻지 않는다. 시인은 "어찌 됨이냐", "어찌 함이냐"라고 두 번 묻는다. 김지찬 교수는 이 장면을 사사기의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실례로 들고, 이것을 '섬김 없는 자유'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 노래의 균형이 드러난다. 같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어떤 지파는 즐거이 헌신했고 어떤 지파는 앉아 있었다. 시인은 온 자들의 헌신을 보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오지 않은 자들에게는 책임을 묻는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백성도 일어난다. 일어난 사람은 칭찬받는다. 앉아 있던 사람은 책망받는다. 그러나 노래의 최종적인 찬송은 여호와께 돌아간다. 이것이 드보라의 노래가 가진 구조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을 일으키지만, 그 은혜는 사람의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헌신은 내가 하나님께 내세울 공로가 아니다. 그러나 헌신은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아니다.

    오늘 새벽에 본문을 주해하면서 이 백성들의 헌신을 깊이 생각해 본다. 시인은 헌신한 백성을 보며 여호와를 찬송했고, 헌신하지 않은 지파에게는 어찌 됨이냐고 물었다. 드보라는 이십 년 동안 방패 하나 들지 못하던 백성이 스스로 골짜기로 내려온 것을 보고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를 찬송했다. 그리고 그 드보라가 르우벤에게 "네 마음이 생기면 천천히 오라"고 하지 않고 "어찌 됨이냐"라고 물었다. 그래 은혜가 먼저였다. 그러나 은혜는 책임을 없애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내 헌신을 자랑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헌신을 억지로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다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하고, 함께 일어나기를 권하고, 그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은혜가 없어서 앉아 있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세일에서 나오셨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이미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해야 한다. 여전히 핑계대고 앉아 있다면... 르우벤과 다른 지파들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찌 됨이냐"라는 책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래 이젠 일어나자. 그 은혜를 기억하고 나아가자.

    中文 AI翻譯

    標題:百姓甘心獻上自己

    第四章以敘事的方式講述了這場戰爭,第五章則以詩歌的形式再次講述。長久以來,許多學者將這首詩歌與出埃及記十五章摩西之歌一併評價為聖經中最古老的詩歌之一。正因如此,其文法與用詞皆屬古語,也是舊約中最難解的經文之一。然而第五章並非為第四章附加的神學解說。第五章以古代凱旋詩的形式重新詮釋同一場戰爭,並呈現出第四章沒有的內容——神的降臨、各支派的參與與缺席、米羅斯的咒詛、西西拉母親的等候等。正如金智燦教授所言,這首詩表面上看似在頌揚底波拉與雅億這樣的人物,但仔細看,其實是一首讚美神拯救自己百姓的救贖之歌。正如摩西在紅海法老的戰車傾覆之後歌唱,底波拉也在基順河西西拉的戰車傾覆之後歌唱。

    士師記 5:1–2 這日底波拉和亞比挪菴的兒子巴拉作歌,說:2 因為以色列中有軍長率領,百姓也甘心犧牲自己,你們應當頌讚耶和華!

    第一節中,底波拉的名字被置於巴拉之前,希伯來文動詞也是陰性單數形。這表明底波拉是這首詩歌的中心聲音。而在第二節中,詩人稱頌耶和華的第一個理由是什麼呢?並不是因為西西拉死了,也不是因為鐵戰車傾覆了,而是「百姓甘心犧牲自己」。以色列百姓自願挺身而出,這才是稱頌耶和華的首要理由。

    譯為「甘心犧牲自己」的希伯來文,意指並非受人驅使,而是自己甘願獻上自己。這個詞正是建造會幕時,百姓「甘心樂意」帶來供物(出埃及記35:29)所用的詞,也是詩篇110篇3節「當你掌權的日子,你的民要以聖潔的裝飾為衣,甘心犧牲自己」所用的詞。既然百姓是自願的,豈不應當稱讚百姓嗎?然而詩人看見百姓自願的這件事,卻呼籲要稱頌耶和華。這是因為讀過第四章的讀者都知道,這是怎樣的百姓——這是二十年來被鐵戰車壓制的百姓,連他們的將軍巴拉在神的應許面前都提出條件的百姓。這樣的百姓能夠自己站起來,乃是發生在耶和華拯救之中的事。經文並沒有直接說「那心志是神所賜的」,然而詩人將百姓的獻身當作稱頌神的第一個理由,這個事實本身,就蘊含著詩人對那心志來源的告白。因此詩人在第九節又再說了一次同樣的話。

    士師記 5:9 我心傾向以色列的首領,他們在民中甘心犧牲自己。你們應當頌讚耶和華!

    是的,百姓的領袖們甘心獻上了自己。詩人說他心向那些領袖。然而結論依然是「頌讚耶和華」。原因在於,詩人雖然高度肯定獻身的人,卻不將稱頌的方向指向人。

    那麼,我們就該看看這百姓是在怎樣的狀態下站起來的。

    士師記 5:6–8 在亞拿之子珊迦的時候,又在雅億的時候,大道無人行走,都是繞道而行。7 以色列中的官長停職,直到我底波拉興起,等我興起作以色列的母。8 以色列人選擇新神,爭戰的事就臨到城門。那時,以色列四萬人中豈能見盾牌槍矛呢?

    底波拉之前的以色列就是這樣的百姓。大道空無一人,人們繞著小路行走。村莊中人跡斷絕。四萬人中連一面盾牌、一支長槍都看不見。以色列既沒有作戰的武器,也沒有作戰的境況。詩人將以色列選擇新神的事,與戰爭臨到城門的情形並列陳述。士師記第二章的循環模式,在這首詩歌中再次得到印證。就在那崩潰的群體正中,詩人宣告「我底波拉興起,作以色列的母」。這正如以利亞與以利沙曾被稱為「以色列的父」一樣(列王紀下2:12;6:21),意味著底波拉在群體崩潰之時,如同母親一般保護並扶起了百姓。

    然而詩人並沒有把底波拉如此興起這件事,說成是底波拉自己所成就的。詩人歌唱道,在此之先,神已經降臨。

    士師記 5:4–5 耶和華啊,你從西珥出來,由以東地行走,那時地震天漏,雲也落雨。5 山見耶和華的面就震動,西奈山見耶和華以色列 神的面也是如此。

    昨天所讀的第四章只說神「使西西拉的全軍潰亂在刀下」,而第五章的詩歌卻歌唱說,那日天降雨水,雲也落雨。第五章的詩歌將天降大雨與基順河的氾濫(5:21)連結於神的爭戰。金智燦教授將此整理為:神所使用的武器乃是雨與閃電,並解釋說基順河平時是乾涸的季節性河流,一旦下雨便會瞬間暴漲成泥濘之地。因此鐵戰車那壓倒性的優勢很可能因此失效。然而詩人並沒有把這場暴雨僅僅說成天氣現象。詩人歌唱耶和華是從西珥、從以東地出來的。西珥與以東正是西奈山的方向,也就是以色列出埃及時與神相遇的南方。換言之,詩人將基順河的暴雨視為西奈山的神再次降臨的事件。那位曾將以色列從埃及救出的神,如今又前來從夏瑣拯救以色列。這同時也是宣告:掌管雨水與風暴的,不是迦南的巴力,而是耶和華。在此值得記住巴拉的名字。巴拉(בָּרָק)在希伯來文中意為「閃電」。在第四章中,這個名叫「閃電」的人在神的應許面前遲疑不決,而第五章的詩歌卻歌頌神親自以天上的風暴爭戰。有些神學家將此視為一種語言上的雙關。當然我們無法斷定作者是刻意設計了這種對比,但希伯來讀者聽見這名字時,產生這樣的聯想是完全有可能的。

    因此這首詩歌的順序是這樣的:耶和華先如戰士般行進(4–5節);底波拉興起(7節);然後領袖與百姓甘心自願下到山谷(9、13–18節)。由此可見,恩典在先,獻身則是在那恩典之中發生的。

    然而這首詩歌並未在此結束。詩歌的正中央,還記載著那些沒有前來之人的名字。

    士師記 5:15–17 以薩迦的首領與底波拉同來,以薩迦怎樣,巴拉也怎樣,都跟隨他步行下到山谷。在流便的溪水旁有心中定大志的。16 你為何坐在羊圈內聽群中吹笛的聲音呢?在流便的溪水旁有心中設大謀的。17 基列人安居在約旦河外。但人為何等在船上?亞設人在海口靜坐,在港口安居。

    以法蓮、便雅憫、瑪吉、西布倫、以薩迦都來了。西布倫與拿弗他利更是另外受到「拚死不顧性命」(第18節)的稱讚。然而流便只在溪水旁定下大志,卻坐在羊圈裡聽笛聲;基列人只是待在約旦河對岸;但人留在船上;亞設人則坐在港口。或許各支派都各有各的緣由,然而詩人並未詢問那些緣由。詩人兩次追問「為何」、「豈可如此」。金智燦教授將這一幕列為士師記中「各人任意而行」的實例,並稱之為「沒有服事的自由」。

    在這裡,這首詩歌的平衡便顯現出來。同一位神降臨,有的支派甘心獻身,有的支派卻坐視不動。詩人看見前來之人的獻身而稱頌耶和華,對那些沒有前來的人則追究其責任。神爭戰,百姓也起來;起來的人得著稱讚,坐視的人受到責備。然而這首詩歌最終的稱頌,依然歸給耶和華。這正是底波拉之歌的結構。神的恩典使人的心甦醒興起,但那恩典並不免除人的責任。獻身不是我可以在神面前誇口的功勞,但獻身也不是我可以不做的事。

    今日清晨在解經默想這段經文時,我深深思想這百姓的獻身。詩人看見獻身的百姓便稱頌耶和華,對沒有獻身的支派則質問「為何如此」。底波拉看見這二十年來連一面盾牌都拿不起的百姓,竟自願下到山谷,她所稱頌的不是百姓,而是耶和華。而這同一位底波拉,面對流便,並沒有說「等你有心志了,慢慢來吧」,而是質問「為何如此」。是的,恩典在先。然而恩典並沒有免除責任。因此,我不能誇耀自己的獻身,也不能勉強造出他人的獻身。我所能做的,只是傳講神的呼召,勸勉眾人一同起來,並為那心志的賜下代禱。而對我自己,我也不應再以「沒有恩典」為藉口而坐視不動。神已經從西珥出來了,我們所領受的恩典早已足夠。所以現在,當起來,獻身於神的呼召。倘若仍然找藉口坐著不動……就必像流便和其他支派一樣,聽見神所說的「為何如此」的責備。所以,現在就起來吧。記念那恩典,向前邁進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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