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사사기 20:8–28
今日默想:士師記 20:8–28
제목 :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어제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 그러나 그 끔찍한 일을 처음 해석한 목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책임을 감춘 레위인의 증언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증언을 듣고 곧바로 한 사람같이 일어선다. 아무도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고, 아무도 집으로 들어가지 말자고. 제비를 뽑아 기브아를 치고, 백 명에 열 명을 뽑아 군량을 맡기자고.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정해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결정 가운데 하나님께 묻는 장면은 없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곧바로 칼을 든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을 보내,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넘겨주면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겠다고 요구한다. 악을 제거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율법에서 거듭 명하신 일이었다. 베냐민이 자기 지파의 죄인을 먼저 처리하라는 정당한 요구였다. 그런데 베냐민은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불량배들 편에 서서 싸우러 모인다. 그 가운데 칠백 명은 물매로 머리카락 하나도 빗나가지 않게 맞히는 왼손잡이들이었다. 사사기를 읽어 온 우리는 같은 베냐민 지파의 왼손잡이 에훗을 떠올린다. 한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 쓰였던 베냐민의 왼손이, 이제는 형제를 향한다. 그렇게 이 전쟁은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했고, 베냐민은 정의보다 자기 지파를 감쌌다.
삿 20: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이 드디어 하나님께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을 다시 들어 보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겠습니까. 싸울지 말지는 이미 정해 놓았다. 하나님께 묻는 것은 누가 앞장설지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확히 그 질문에 답하신다. 유다가 먼저 가라고. 여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장면은 사사기의 첫 장면과 거의 같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그때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그런데 사사기의 끝에서 이스라엘이 싸우러 올라가는 상대는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형제 베냐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에는 승리의 약속이 없다. 이스라엘은 첫날 이만 이천 명을 잃는다.
삿 20: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이 울며 다시 묻는다. 그리고 이번에는 질문 속에 한 단어가 들어온다. "내 형제 베냐민."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형제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질문도 달라졌다. 이제는 누가 먼저냐가 아니라, 다시 싸워야 하느냐를 묻는다. 하나님은 올라가서 치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번에도 승리의 약속은 없다. 이스라엘은 다음 날 만 팔천 명을 더 잃는다. 하나님이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왜 두 번이나 패했는가. 본문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두 번의 패배를 지나며 이스라엘의 질문이 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삿 20:26–28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이번에는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간다. 울고, 여호와 앞에 앉아 그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사사기에서 금식이 나오는 곳은 이곳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묻는다.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이제야 이스라엘은 '할까요, 말까요'를 묻는다. 자기들이 옳다고 확신했던 결정을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대답이 달라진다.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사사기의 첫 장면에서 들었던 그 약속의 말이 이제야 돌아온다. 물론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돌이킨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아직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졌다.
이스라엘의 질문을 다시 보자. 처음에는 누가 먼저 갈지를 물었다. 이미 가기로 정해 놓은 질문이었다. 다음에는 다시 싸워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는 처음으로 '형제'라는 말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싸울지 말지를 물었다. 자기 결정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질문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묻지 않은 것을 먼저 약속하지 않으셨다. 누가 먼저냐고 물을 때는 누가 먼저인지만 답하셨고, 이스라엘이 자기 결정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승리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사만 명을 잃었다. 본문은 왜 그 대가가 사만 명이어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보여 준다. 옳은 명분을 가진 사람도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뜻과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을. 기브아의 악은 실제 악이었다. 그러나 그 악을 바로잡으려는 분노와, 내가 택한 방식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내가 이미 정한 일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일까지도 '할까요, 말까요'라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따라가다 보니 내 기도가 보인다. 나도 마음속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곤 했다. 사역의 방향을 정하고,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세우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까지 내 안에서 먼저 결정하는 실수를 나 역시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잘 해낼 수 있을까요?" 하고 기도하곤 한다. 그래 내 기도는 "할까요, 말까요"가 아니라 "누가 먼저 갈까요"였다. 이스라엘처럼 겉으로는 하나님께 묻는 기도였지만, 실제로는 내가 정한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덧붙여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막히고, 애쓴 수고가 열매 없이 끝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이유를 사람과 환경에서 찾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내 질문을 바꾸어 가셨다. 이스라엘이 두 번 무너지고 나서야 금식하며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를 물었듯이, 나도 막다른 길에 서고 나서야 옳다고 확신하던 일까지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된다. 그래서 오늘 나의 기도 제목을 돌아본다. 결론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확신을 먼저 내려놓고 "주님, 이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다시 여쭙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그 앞에 머문다… 주님, 내 뜻을 정해 놓고 승인만 구하는 기도를 내려놓게 하소서. 실패의 자리에서도 나의 질문을 바꾸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들게 하옵소서…
標題:我們還要出去與他們爭戰呢?還是罷兵呢?
昨天,以色列人在米斯巴聚集在耶和華面前。然而,最先詮釋那件可怕事情的聲音,並不是神的聲音,而是隱藏自己責任的利未人的證詞。以色列人聽了那番證詞,立刻如同一人般起來。說我們連一人都不回自己帳棚,不回自己房屋;要按著所掣的籤去攻擊基比亞,從一百人中挑選十人為百姓運糧。一切都在當場定了下來。然而,在這所有的決定當中,卻沒有一個求問神的場面。
但這並不表示以色列人立刻就拿起了刀劍。以色列人先打發人走遍便雅憫全支派,要求他們把基比亞的匪徒交出來,好治死他們,將惡從以色列中除掉。除掉惡,是神在律法中一再吩咐的事。這是要便雅憫先處置自己支派中罪人的正當要求。然而,便雅憫人卻不肯聽從他們弟兄的話,反倒站在匪徒那一邊,聚集起來要爭戰。其中有七百人是左手便利的,用機弦甩石打人,毫髮不差。一路讀士師記的我們,會想起同屬便雅憫支派、左手便利的以笏。曾經被用來拯救以色列的便雅憫的左手,如今卻轉向了自己的弟兄。所以,這場戰爭並不是單方面的錯。以色列沒有求問神就做了決定,便雅憫則袒護自己的支派過於公義。
士 20:18 以色列人就起來,到伯特利去求問神說:「我們中間誰當首先上去與便雅憫人爭戰呢?」耶和華說:「猶大當先上去。」
以色列人終於求問神了。但請再聽一次這個問題:我們中間誰當首先上去?要不要打,早已決定好了。他們求問神的,只是誰來打頭陣。而神也正正回答了那個問題:猶大當先上去。這裡不可錯過。這一幕與士師記開頭的場景幾乎一模一樣。約書亞死後,以色列人這樣求問神:我們中間誰當首先上去攻擊迦南人,與他們爭戰?那時神說猶大當先上去,並且加上一句:「我已將那地交在他手中。」然而到了士師記的結尾,以色列上去攻擊的對象不是迦南人,而是弟兄便雅憫。而且神的回答中沒有得勝的應許。以色列在第一天就失去了兩萬二千人。
士 20:23 未戰之先,以色列人上去在耶和華面前哭號,直到晚上,求問耶和華說:「我們再去與我們弟兄便雅憫人打仗,可以不可以?」耶和華說:「可以上去攻擊他們。」
以色列人哭著再次求問。而這一次,問題裡多了一個詞:「我們弟兄便雅憫人」。這是以色列人第一次稱便雅憫為弟兄。問題也改變了。現在問的不再是誰先上去,而是是否應該再去打仗。神說,可以上去攻擊他們。但這一次仍然沒有得勝的應許。第二天,以色列又失去了一萬八千人。神既然說可以上去,為什麼還敗了兩次?經文沒有說明原因。只有一件事是清楚的:經過兩次的失敗,以色列的問題正在改變。
士 20:26–28 以色列眾人就上到伯特利,坐在那裡,在耶和華面前哭號,當日禁食直到晚上;又在耶和華面前獻燔祭和平安祭。27 那時,神的約櫃在那裡;28 亞倫的孫子、以利亞撒的兒子非尼哈侍立在約櫃前。以色列人問耶和華說:「我們當再出去與我們弟兄便雅憫人爭戰呢?還是罷兵呢?」耶和華說:「你們當上去,因為明日我必將他們交在你們手中。」
這一次,以色列眾人、全體百姓都上去了。他們哭號,坐在耶和華面前,當日禁食直到晚上,又獻上燔祭和平安祭。在士師記中,提到禁食的只有這一處。然後以色列人求問:我們當再出去爭戰呢?還是罷兵呢?直到這時,以色列才問「要,還是不要」。他們第一次把自己確信是對的決定,放在神面前。也正在那時,神的回答才改變了:「明日我必將他們交在你們手中。」在士師記開頭所聽見的那句應許,直到此刻才重新回來。當然,這並不代表以色列已經完全回轉。故事還要往更黑暗的地方走下去。但至少在這裡,以色列在神面前深深地降卑了。
讓我們再看一次以色列的問題。起初,他們問的是誰先上去,那是已經決定要去的問題。接著,他們問是否應該再去打仗,那個問題裡第一次出現了「弟兄」這個詞。最後,他們問的是要不要爭戰,那是把自己的決定放在神面前的問題。以色列沒有問的,神並沒有先應許。當他們問誰先上去時,神只回答誰先上去;直到以色列放下自己的決定,神才應許得勝。而在這之間,以色列失去了四萬人。經文並沒有解釋為什麼代價必須是四萬人。但它清楚地讓我們看見:即使是持守正當名分的人,也可能把自己的確信當作神的旨意。基比亞的惡是真實的惡。然而,想要糾正那惡的憤怒,與「我所選擇的方式就是神的旨意」的確信,並不是同一回事。所以,求問神並不是請求神批准我早已決定好的事,而是連我確信是對的事,也要再次以「要,還是不要」放在神面前。
在今天的經文中跟著以色列的禱告走下去,我看見了自己的禱告。我也常常在心裡早已有了結論,才來到神面前。事工的方向、該做之事的先後次序,甚至對待人的方式,我也一樣犯了先在自己裡面做決定的錯誤。然後再禱告說:「神啊,我要怎樣才能把這件事做好呢?」所以,我的禱告不是「要,還是不要」,而是「誰先上去」。像以色列一樣,表面上是求問神的禱告,實際上卻是請神在我已決定的事上加上祂的名。這樣開始的事有時會受阻,辛苦的勞碌有時也會毫無果效。每當那時,我常把原因歸咎於人和環境。然而,神卻在那失敗之處,一步步改變我的問題。正如以色列兩次潰敗之後,才禁食求問「我們當爭戰呢?還是罷兵呢?」,我也是走到了絕路,才把連自己確信是對的事都放在神面前。所以今天,我回頭省察自己的禱告事項。不再帶著結論來到神面前,而是先放下自己的確信,再次求問:「主啊,這件事我該做嗎?」並且在祂面前等候,直到神回答……主啊,求祢使我放下那先定好自己心意、只求祢批准的禱告。求祢使我在失敗之處,也緊緊抓住祢改變我問題的恩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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