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창세기 41:37-57
今日默想:創世記 41:37-57
요셉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옷이 바뀌는 자리마다 인생의 마디가 보인다. 크게 세 자리다. 그리고 그 모든 자리마다 두 가지가 함께 흐른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서 사람이 빚어짐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흐르지 않으면 요셉의 이야기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첫째, 채색옷의 자리이다. 채색옷을 단순한 편애의 옷으로만 보면 본문이 잘 풀리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케토네트 파심'이라 불리는 이 옷은 구약에서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옷이다. 그러니까 야곱이 요셉에게 이 옷을 입힌 것은 단순히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지가 아니라, '내 집의 후계자, 관리자'로 세우는 표지였다. 형들이 분노한 것도 단순한 부성애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남도 아닌 열한째가 장자권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채색옷의 자리는 이미 훈련의 자리였다. 양 떼와 종들과 살림을 관리하는 일을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노예복과 죄수복의 자리이다. 채색옷이 벗겨진 후 요셉은 점점 더 낮아진다. 미디안 상인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종이 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십삼 년이다. 자기 옷을 자기 손으로 입을 수 없었던 광야 십삼 년. 인간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난 자리다. 그런데 노예의 자리에서도, 감옥의 자리에서도 똑같은 말씀이 반복된다.(창 39:2,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인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케 하신 자리였다.
그런데 이 시간도 잘 보면 요셉이 관리자로 빚어진 시간이다. 보디발은 그저 그런 노예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기지 않는다.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임한 것은(창 39:4-6), 그가 행정 능력에서 실제로 신뢰를 얻었다는 뜻이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 제반 사무를 그가 처리한 것은(창 39:22), 그가 그 자리에서도 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광야 십삼 년은 단순한 고난의 시간이 아니다. 채색옷 시절 시작된 관리자의 훈련이 노예복과 죄수복의 자리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 시간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그를 형통케 하셨고, 그는 매일 자기 자리에서 성실히 일을 익혔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그를 빚었다.
셋째, 세마포 옷의 자리이다. 바로 앞에 서기 직전, 요셉은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었다(창 41:14). 십삼 년 만에 자기 손으로 옷을 가다듬은 자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는 요셉에게서 두 가지를 보았다.
창 41:38-39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바로가 본 것 하나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다. 함께 하심과 빚어짐,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요셉에게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준 것이다(창 41:42).
내 인생을 돌아보면 그래도 나에게 자랑할 만한 채색옷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던 광야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도 그 모든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충실히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광야의 시간은 그저 견디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매일 작은 일들을 성실히 익혀가던 시간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동시에 나는 빚어지고 있었다.
아마 우리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도 이 세 자리 어딘가에 서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를 꼭 나누고 싶다. 하나님의 복은 결코 운이 아니다. 채색옷의 자리에 있는 분은 그것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훈련의 시작점임을 알아야 한다. 광야의 자리에 있는 분은 그곳을 그냥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심을 인식하며 매일 자기 자리에서 성실히 빚어져야 한다. 세마포 옷을 입은 분은 그 옷이 함께 하심과 수고함 두 가지가 다 모인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거라며 손 놓고 있다가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인생의 주관자를 신뢰한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 주어진 이 자리에서 한 걸음씩 빚어진다. 채색옷도, 노예복과 죄수복도, 세마포 옷도, 모두 그분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믿으며, 남은 인생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길 소망한다.
跟隨約瑟的人生旅程,便會發現每一次衣裳更換之處,都是生命的轉折點。大致可分為三個場景。而在每一個場景中,始終有兩條線索並行流淌:一是神的同在,二是人在其中被塑造。若這兩條線索不能並行,便無法真正讀懂約瑟的故事。
第一,彩衣的場景。 若只將彩衣視為偏愛之衣,經文便難以通透。這件在希伯來文中稱為「克托內特·帕西姆」的衣裳,在舊約中是代表身份與權柄的服飾。因此,雅各為約瑟穿上這件衣裳,並非僅僅是「最疼愛的兒子」這一標誌,而是立他為「我家的繼承人與管理者」的記號。哥哥們的憤怒,也並非單純因為父親偏心,而是因為排行第十一、甚至不是次子的人,竟然得到了長子的名分。因此,彩衣的場景本就已是訓練的場景。從幼年起,約瑟便開始學習管理羊群、僕人與家業。
第二,奴隸服與囚衣的場景。 彩衣被剝去之後,約瑟的處境愈發低微。他被賣給米甸商人,成為波提乏的奴僕,又蒙冤被囚。這是整整十三年。十三年的曠野歲月,他無法以自己的雙手為自己更衣。從人的眼光來看,這是一切都已終結的場景。 然而,無論是在奴隸的處境中,還是在囚牢的處境中,同樣的話語一再重複(創 39:2, 21):「耶和華與約瑟同在。」是的,那看似一切都已終結之處,正是神藉著同在使他亨通的場景。
細細察看這段歲月,也可看見約瑟在這期間被塑造為一位管理者。波提乏不會將自己所有的一切都交託給一個平庸的奴僕。他立約瑟為管家,將所有的產業都交在他手中(創 39:4-6),意味著約瑟確實在行政能力上贏得了真實的信任。在監獄中也是如此。典獄長將獄中所有的囚犯都交在約瑟手下,一切事務都由他管理(創 39:22),同樣意味著他在那個場景中也獲得了管理才能的認可。
因此,曠野的十三年絕非單純的苦難時光,而是從彩衣時期便已開始的管理者訓練,在奴隸服與囚衣的場景中從未停止、持續進行的時光。神的同在使他亨通,而他每天在自己的崗位上忠實地學習本分。這兩件事同時塑造了他。
第三,細麻布衣的場景。 就在站到法老面前的前一刻,約瑟刮了鬍鬚,換上衣裳(創 41:14)。這是時隔十三年,他第一次以自己的雙手整理自己的衣裳。而在那裡,法老從約瑟身上看見了兩件事。
創 41:38-39 法老對臣僕說:「像這樣的人,有 神的靈在他裡頭,我們豈能找到呢?」39 法老對約瑟說:「 神既將這一切事都告訴你,可見沒有人像你這樣有聰明有智慧。」
法老所看見的,一是「有神的靈在他裡頭的人」,二是「有聰明有智慧的人」。同在與塑造,這兩件事在約瑟身上同時彰顯。正因如此,法老才摘下自己手上的印戒,戴在約瑟手上,給他穿上細麻布衣裳,把金鏈戴在他頸項上(創 41:42)。
回顧自己的人生,我也曾有過值得珍藏的彩衣時期。也曾有過看不見盡頭、彷彿一切都已終結的曠野歲月。然而,正因有過那所有的時光,我才能站在今天這個位置。在那些歲月中,我當認識神,並忠實地承擔神所交付的事。因此,曠野的時光不僅僅是忍耐度過的時光,也是在那個崗位上每天忠實學習細小之事的時光。神與我同在,而我也同時在被塑造。
我們的群體中,或許也有弟兄姊妹正站在這三個場景的某一處。有一件事,我很想與大家分享:神的祝福絕不是運氣。站在彩衣場景中的人,應當知道那並非單純的幸運,而是訓練的起點。站在曠野場景中的人,不應讓那段時光白白流逝,而當認識神的同在,每天在自己的崗位上忠實地被塑造。已穿上細麻布衣的人,不應忘記那件衣裳是同在與勞苦這兩者共同結出的果實。在聖經中,從來沒有一個人是撒手不管、只等神來成就一切,然後穿上細麻布衣的。
因此,今天我仍信靠那位掌管人生的主。同時,在今天所賜的這個崗位上,一步一步地被塑造。彩衣也好,奴隸服與囚衣也好,細麻布衣也好,皆相信都是出自祂的手。願我們都成為在餘下的人生中,依靠神而活的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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