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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otion · 默想

    오늘의 묵상 : 사사기 4:11–24

    今日默想:士師記4:11-24

    한경우··조회 59

    제목 : 화평이 있음이라

    어제 본문 9절에서 드보라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고 했다. 독자는 그 여인이 드보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1절에서 저자가 이야기를 잠깐 멈추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정보 하나를 끼워 넣는다.

    삿 4: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왜 여기서 이 말이 나오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저자는 이 정보를 심어 두고 13절부터 다시 전쟁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17절에 가서야 이 정보가 왜 필요했는지 드러난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이긴 이야기와,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이야기다. 이처럼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는 일에는 바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스라를 직접 쓰러뜨리는 영광은 바락이 아니라 둘째 이야기의 야엘에게 돌아간다.

    삿 4: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시스라는 바락이 다볼 산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철 병거 구백 대와 온 군대를 기손 강으로 모았다(13절). 시스라 편에서는 자기 전술대로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독자는 7절을 이미 읽었다. 하나님이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을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시스라는 자기 뜻대로 나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정해 두신 자리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드보라가 바락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다. 어제 6절에서 드보라가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고 물었는데, 14절에서 또 수사 의문문이다.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그런데 이번에는 바락이 더 이상 조건을 달지 않는다. 드보라가 이렇게 선언하자 바락은 곧바로 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에서 내려간다. 8절에서 드러났던 바락의 주저함은 여기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삿 4: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전투 자체는 한 절이다. 그리고 그 한 절의 주어는 바락이 아니라 여호와시다. '혼란에 빠지게 하다'는 출애굽기 14:24에서 하나님이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다고 할 때 쓰인 그 동사다. 홍해에서 바로의 병거가 무너진 것처럼 기손 강에서 시스라의 병거가 무너진다. 5장의 노래가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5:21)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폭우나 불어난 물로 병거의 기동력이 무력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이 대비를 한 장면으로 보여 준다. 철 병거를 타고 위세를 부리며 나온 장군이 그 병거에서 뛰어내려 걸어서 도망친다. 압제자가 가장 믿었던 무기가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에서는 버려야 하는 짐이 되었다.

    그런데 시스라가 도망친 곳이 어디인가.

    삿 4: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시스라가 야엘의 장막으로 간 이유가 여기 있다. 야빈과 헤벨 사이에 "화평"이 있었다. 이 '화평'이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이다. 여기서 샬롬은 우선 야빈과 헤벨 사이의 정치적·사회적 관계, 곧 서로 적대하지 않는 우호 관계를 뜻한다. 겐 족은 모세의 장인 집안이고 삿 1:16에서 유다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인데, 그중 헤벨은 동족을 떠나 북쪽 게데스 부근으로 올라갔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야빈과 적대하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로 그 관계 때문에 시스라는 헤벨의 장막을 안전한 피난처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 역설이 생긴다. 시스라는 그 샬롬을 자기 안전의 보증으로 믿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지만, 바로 그곳에서 죽는다. 첫날 묵상에서 말한 김지찬 교수의 책 제목이 『엔 샬롬 교향곡』, 곧 '샬롬이 없다'였다. 사사기 저자가 17절의 샬롬을 직접 신학적으로 해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스라가 의지한 샬롬이 시스라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야기가 분명히 보여 준다.

    삿 4: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야엘의 말과 행동을 순서대로 보아야 한다. 들어오소서. 두려워하지 마소서. 이불로 덮어 준다. 물을 달라는 시스라에게 우유를 준다(19절). 다시 덮어 준다. 야엘의 이 일련의 환대가 시스라의 경계심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장막 문에 서서 망을 봐 달라고까지 부탁한다(20절). 시스라는 그 장막 안에서 완전한 안전을 느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도망쳐 더 이상 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동맹의 집, 자기를 덮어 주는 이불 속. 시스라에게 그곳이 샬롬이었다. 그리고 시스라는 잠들었다.

    삿 4: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유목 생활에서 여성이 장막을 세우고 관리하는 일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야엘에게 장막 말뚝과 방망이는 낯선 전쟁 무기가 아니라 일상의 도구였을 수 있다. 야엘은 전사의 칼이 아니라 자기 일상의 도구로 적장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9절의 예언이 성취된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그 여인은 드보라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다. 압제자와 우호 관계에 있던 집안의 여인이었다. 야엘은 우호 관계에 있던 사람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환대를 베풀고, 잠든 손님을 죽였다. 독자가 여기서 윤리적 질문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본문은 야엘의 기만과 환대 규범의 문제를 따로 해명하지 않는다. 대신 본문은 야엘의 행동을 시스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4:9의 예언 성취라는 틀 안에 놓고, 5장의 노래에서는 야엘을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5:24) 여인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22절에서 바락이 도착한다. 바락은 이번에는 조건 없이 순종했고, 최선을 다해 싸웠고, 시스라를 끝까지 추격했다. 그런데 바락이 장막에 들어가 보니 시스라는 이미 죽어 있었다. 적장을 쓰러뜨리는 영광이 바락의 것이 아니라는 드보라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삿 4: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결론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이 이야기에는 드보라와 바락과 야엘과 시스라가 등장하지만, 저자가 사건을 해석할 때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시스라는 병거를 믿었고 그 병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시스라는 야빈과 헤벨 사이의 샬롬을 믿었고 그 샬롬 속에서 죽었다. 사람이 안전하다고 여긴 관계와 환경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사기 전체가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함께 살고, 통혼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며 그 공존을 안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호와를 떠난 공존은 사사기에서 끊임없이 압제와 불안으로 돌아왔다. 사사기 4장이 보여 주는 진짜 샬롬은 전쟁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전쟁 한복판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보다 앞서 가시고, 싸우시고, 마침내 압제자를 굴복시키심으로 오는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나는 17절의 '화평'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묵상했다. 그 이유는 사실 요즘 내 마음에는 평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쉽게 불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평안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안, 문제가 빨리 정리되는 평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이 풀려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을 나는 바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며 시스라가 찾았던 평안도 어쩌면 그런 것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라는 전쟁에서 도망쳐 더 이상 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장막을 찾았고, 야빈과 헤벨 사이의 화평을 믿었고, 자신을 덮어 주는 이불 속에서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그러나 시스라가 의지한 평안은 시스라를 지켜 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필요한 평안도 모든 문제가 사라져서 얻는 평안이 아닐지 모른다. 오늘 본문에서 참된 안전은 철 병거에도, 동맹에도, 장막에도 있지 않았다. 참된 안전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보다 앞서 가시고, 싸우시고, 마침내 압제자를 굴복시키신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래 나는 지금 평안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안을 배우고 싶다. 문제가 아직 남아 있고 앞날이 아직 보이지 않아도, 나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내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그 평안을 소망한다. 그러니 오늘 나는 문제가 모두 해결되어야만 평안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 요구하기보다, 해결되지 않은 것들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의 샬롬이심을 믿고 그 평안을 구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中文 AI翻譯

    標題:因為有和平

    昨天的經文第9節,底波拉說「耶和華必將西西拉交在一個女人手中」。讀者會以為那個女人就是底波拉。然而在第11節,作者突然暫停敘事,插入一段看似完全無關的資訊。

    士4:11 摩西岳父何巴的後裔,基尼人希百曾離開基尼族,到靠近基低斯的撒拿音橡樹旁支搭帳棚。

    讀者無法理解為何在此處出現這段話。作者先埋下這個伏筆,然後從第13節開始繼續講述戰爭的故事。直到第17節,這段資訊為何必要才終於揭曉。也就是說,今天的經文其實由兩個故事組成:底波拉與巴拉戰勝西西拉軍隊的故事,以及雅億殺死西西拉的故事。就這樣,在擊潰西西拉軍隊的戰役中,巴拉扮演了重要的角色。然而,親手擊倒西西拉的榮耀,卻不是屬於巴拉,而是屬於第二個故事中的雅億。

    士4:14 底波拉對巴拉說:「起來,今日就是耶和華將西西拉交在你手中的日子。耶和華豈不在你前頭行嗎?」於是巴拉率領一萬人從他泊山下去。

    西西拉聽見巴拉上了他泊山的消息,就召集了九百輛鐵車和全軍到基順河(第13節)。從西西拉這邊來看,他是按照自己的戰術行動的。然而讀者已經讀過第7節,神說要把西西拉和他的車輛引到基順河來。所以西西拉看似按自己的意思出戰,實際上卻是走進了神早已安排好的地方。接著底波拉向巴拉下達出戰的命令。昨天在第6節,底波拉問道:「耶和華豈不是這樣吩咐的嗎?」而在第14節,又出現一個反問句:「耶和華豈不在你前頭行嗎?」然而這一次,巴拉不再附加任何條件。底波拉如此宣告之後,巴拉立刻率領一萬人從他泊山下去。第8節中所顯露的巴拉的猶豫,在這裡已不復見。

    士4:15 耶和華使西西拉和他一切的車輛,並全軍,在巴拉面前被刀劍打得潰亂,西西拉下車步行逃跑。

    戰鬥本身只用了一節經文。而這一節的主詞不是巴拉,而是耶和華。「使……潰亂」這個動詞,正是出埃及記14:24中神在紅海使法老軍隊混亂時所用的同一個動詞。正如法老的車輛在紅海崩潰一樣,西西拉的車輛也在基順河崩潰。從第5章的詩歌唱到「基順河把敵人沖去」(5:21)來看,很可能是暴雨或漲水使車輛的機動力完全失效。作者用一個畫面呈現出這種強烈的對比:那位乘著鐵車耀武揚威出征的將軍,如今從車上跳下來,徒步逃跑。壓迫者最倚仗的武器,在耶和華親自爭戰的戰役中,反倒成了必須拋棄的重擔。

    那麼西西拉逃到了哪裡呢?

    士4:17 西西拉步行逃跑,到了基尼人希百之妻雅億的帳棚,因為夏瑣王耶賓與基尼人希百家和好。

    西西拉之所以逃往雅億的帳棚,原因就在這裡。耶賓與希百之間存在著「和平」。這個「和平」在希伯來文中就是沙龍(שָׁלוֹם)。這裡的沙龍首先指的是耶賓與希百之間政治、社會層面的關係,也就是彼此不為敵的友好關係。基尼族是摩西岳父家族的後裔,在士師記1:16中曾與猶大人一同上去,其中希百離開了自己的族人,遷往北方基低斯附近,並與壓迫以色列的耶賓維持著不敵對的關係。正因為這層關係,西西拉才判斷希百的帳棚是安全的避難之所。然而故事在此產生了反諷。西西拉相信那份沙龍能保障自己的安全而走進帳棚,卻正是在那裡喪命。第一天默想中提到的金志燦教授所著書名為《無沙龍交響曲》,意即「沒有沙龍」。士師記的作者並沒有直接對第17節的沙龍作出神學上的解釋,然而故事清楚地顯明:西西拉所倚靠的沙龍,並沒有拯救他。

    士4:18 雅億出來迎接西西拉,對他說:「請我主進來,進到我這裡,不要害怕。」西西拉就進了她的帳棚;雅億用被子將他蓋上。

    我們必須按照順序來看雅億的言語與行動:請進來。不要害怕。用被子蓋上。西西拉要水喝,雅億卻給他奶(第19節)。再次蓋上被子。雅億這一連串的款待,一步一步瓦解了西西拉的戒心。西西拉甚至請雅億站在帳棚門口為他把風(第20節)。西西拉在那帳棚裡感受到了完全的安全——一個逃離戰場、再也聽不見刀劍聲的地方,一個盟友之家,一床蓋著自己的被子。對西西拉來說,那就是沙龍。於是西西拉就這樣睡著了。

    士4:21 西西拉疲乏沉睡,希百的妻雅億取了帳棚的橛子,手裡拿著錘子,輕悄悄地到他旁邊,將橛子從他鬢角釘進去,釘入地裡。西西拉就昏迷而死。

    在遊牧生活中,女性很可能習於搭建與管理帳棚,因此對雅億而言,帳棚橛子和錘子並非陌生的戰爭武器,而可能是日常使用的工具。雅億不是用戰士的刀劍,而是用自己日常的工具擊倒了敵軍的將領。第9節的預言就此應驗:「耶和華必將西西拉交在一個女人手中。」那個女人不是底波拉,也不是以色列人,而是一個與壓迫者維持友好關係的家族中的女子。雅億接納了與自己家族友好的人,安撫他不要害怕,殷勤款待他,卻在客人熟睡之際將他殺死。讀者自然而然會對此產生倫理上的疑問。經文本身並沒有專門就雅億的欺瞞行為與款待客旅的規範之間的問題作出解釋。相反地,經文將雅億的行動置於神對西西拉的審判、以及第4:9節預言應驗的框架之中;而在第5章的詩歌裡,雅億更被稱頌為「比帳棚中的婦女更蒙福」(5:24)的女子。接著在第22節,巴拉抵達了現場。這一次巴拉毫無條件地順服,竭盡全力爭戰,並且窮追西西拉到底。然而當巴拉進入帳棚時,西西拉早已死去。底波拉所說「擊倒敵將的榮耀不屬於巴拉」的話,就這樣應驗了。

    士4:23 這樣,神使迦南王耶賓被以色列人制伏了。

    這結論的主詞是神。這個故事中出現了底波拉、巴拉、雅億、西西拉,但當作者要詮釋這整個事件時,主詞卻是神。西西拉相信鐵車,卻不得不從車上跳下來逃命。西西拉相信耶賓與希百之間的沙龍,卻死在那份沙龍之中。人所以為安全的關係與環境,並不能保護人脫離神的審判。而這也正是士師記整卷書向以色列所發出的信息。以色列人與迦南各族雜居、通婚、事奉他們的神明,並以為這樣的共存就是安全。然而,離開耶和華的共存,在士師記中不斷帶來的卻是壓迫與不安。士師記第4章所展現的真正的沙龍,並不是因為沒有戰爭才產生的。它乃是在戰爭正酣之際,耶和華親自行在自己百姓前頭、親自爭戰,最終使壓迫者屈服而來的。

    今天在詮釋這段經文時,我再次默想了第17節「和平」這個詞。原因其實是,最近我心裡並沒有太多平安。一想到那些尚未解決的事,心裡就感到沉重;一想到那些不知將如何發展的事,我就很容易感到不安。所以我需要平安。我渴望的是什麼事都不會發生的平安,問題能迅速解決的平安,一切都按我所願安排妥當、不必再擔憂的平安。然而今天讀這段經文時,我忽然想到,或許西西拉所尋求的平安,也正是這樣的平安。西西拉逃離戰場,尋找一個再也聽不見刀劍聲的帳棚,相信耶賓與希百之間的和平,並在覆蓋著自己的被子裡,以為終於安全了,便沉沉睡去。然而,西西拉所倚靠的平安,並沒有保守他。這樣看來,我真正需要的平安,或許也不是那種因所有問題都消失才得著的平安。在今天的經文裡,真正的安全既不在鐵車裡,也不在同盟裡,更不在帳棚裡。真正的安全,乃在於耶和華親自行在自己百姓前頭、親自爭戰、最終使壓迫者屈服這個事實之中。是的,我現在並不平安。正因如此,我更渴望學習那不是從環境而來、而是從神而來的平安。即便問題仍然存在,前路依然看不清楚,但因著知道有一位神在我前頭行,我願將心交託於祂,盼望那樣的平安。所以今天,我不願向神要求「唯有問題全部解決,我才能平安」,而是祈願:即便身處尚未解決的難題之中,我仍能相信神就是我的沙龍,並在那樣的信心中,求得那份平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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