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창세기 23:1-20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 성경에서 여자의 죽은 나이를 기록한 것은 사라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경이 그녀의 죽음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운다.
창 23:2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소리 내어 울었다. 히브리어로 '스포드(סָפַד)', 그리고 '바카(בָּכָה)'. 울부짖음과 눈물. 둘 다다. 믿음의 조상이, 체면 같은 거 없이 그냥 무너졌다.
나는 이게 궁금하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산 세월 동안 얼마나 잘 해줬을까? 솔직히, 좋은 남편이었는지 모르겠다.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창 12장), 그랄에서 또 그랬다(창 20장). 사라가 하갈을 들였을 때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선택의 순간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온전히 지켜준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사라가 죽자, 무너진다.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잃고 나서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일어난다.
창 23:3 아브라함이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나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브라함은 울다가 일어나서, 그는 아내를 위해 무덤을 산다. 가나안 땅에 한 평도 없던 나그네가, 자기 이름으로 처음 등기 친 땅이 아내의 무덤이었다. 은 사백 세겔.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이다. 흥정도 했고, 계약도 정식으로 맺었다.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 다 못해준 것을,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을, 제대로 했다.
남편으로서, 이 본문이 오늘따라 다르게 읽힌다.
이번 주,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 1주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마음이 이상하게 무겁다. 아마 항상 미안한 게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대만까지 따라와 준 사람.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관계 속에서 나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 내가 사역에 치일 때 조용히 옆에 있어준 사람.
잘 해줬냐고 물으면, 솔직히 자신 없다.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더 울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함이 섞인 눈물. 그런데 아브라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울고, 일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나도 그래야겠다. 미안한 마음을 마음속에만 쌓아두지 말고. 돌아가면, 아내에게 제대로 된 자리를 만들어줘야겠다. 거창한 게 아니어도 된다. 아내가 이 낯선 땅에서 조금 더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이번 한 주, 떨어져 있는 동안 아내를 위해 더 기도한다.